어젯밤에 미처 올라오지 않은 북리뷰 기사들이 있나 훑어보다가 한겨레의 이번주 '김윤식의 문학산책'을 읽고 옮겨놓는다(가장 최근에는 아마 콰이강의 다리에 관한 칼럼을 옮겨놓았던 듯하다). 인문학에 대한 노교수의 정의를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롭다.
한겨레(07. 09. 08) 인문학의 자리 되새겨준 논문
밀도 높은 인문학의 저술은 어째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한동안 묻어두었던 이 과제가 새삼 떠오름은 웬 까닭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행구호와는 무관한 것. 제 책상 앞에 놓인 한 권의 책, 요컨대 구체적 현실 앞에 제가 알몸으로 마주했음에서 온 것이오. ‘내셔널리즘과 반복하는 식민지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현해탄을 건너온 이 책은 <식민지 조선/ 제국 일본의 문화연환(文化連環)>. 도쿄대학 학술박사 논문으로 제출된 이 저술의 핵심 부분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에 금방 응해오는 것이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논한 제1장 ‘반제국주의의 폭력과 동시대의 폭력 비판’. 원제목은 ‘반제국주의 폭력과 멸죄적(滅罪的)인 힘’(<사상>, 2000. 11).
근대화의 난제 중의 난제인 저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가 마침내 가능하다는 것. 저주의 방도가 그것. 그 목소리가 하도 커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오. 저주란, 또 그 연속성이란 무엇이뇨. 단재 왈, “갑이 을에게 심구(深仇)가 있어 이를 갚으려면 힘이 부족하고 그만두려 하면 마음이 불허하는지라 이에 을의 화상(畵像)을 향하여 그 눈도 빼어보고 그 목도 베어보고 혹 을의 이름을 불러 염병에 죽어라”라고 거듭 뇌기가 그것. 여기까지 오면 저자 J(제이) 교수가 어째서 일본 국수주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다룬 석사논문을 버리고 단재 자리에 서서 재출발했는가에 마주칠 수 있소.
J교수, 그녀는 무엇이며 또 누구인가. 스스로를 다만 386세대라 했소(1964년 서울생, 83학번). 경제성장 덕분에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읽은 세대. 대학에 와서야 역사의식(광주의 5월)에 눈뜬 세대. 운동권 룸펜으로 남느냐, 거리에 혹은 구로공단에 나서냐의 갈림길 헤매기의 세대. 도서관 옥상에서 꽃잎처럼 떨어지는 학우를 목도한 날, 밤을 새워 토론한 세대. 다음날 새벽 책가방과 신발을 나란히 벗어 두고 한강에 투신자살한 급우를 둔 세대. 그 급우의 유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소. 전위에 서지도 못하고, 민중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는 척하는 흉내도 낼 수 없어 자살한다고.
세상은 그녀를 ‘회색인’이라 했소. ‘가짜 희망’이란 무엇인가. 세상엔 과연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이 물음을 J교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음에 틀림없소. 이 책을 회색인으로 죽은 급우에게 봉헌했음이 그 증거. 당대의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 회색인을 이렇게 읊었소. ‘민주 열사 박혜정(朴惠貞)’이라고. 이마가 유달리 나온 수줍은 학생. 젊은 날 제가 지도교수 노릇 한 그 박혜정. 제자의 죽음을 해명하라는 총장과 당국의 요구를 묵살했던 무능한 지도교수.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이뇨. 거짓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학문이 아니었겠는가. 살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쉼 없이 묻는 공부가 아니었겠는가. 민중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척하는 연기도 할 수 없는 자리. 거기 깃드는 정신의 이름이 인문학이 아니었던가. 어느 쪽에 편들지 않으면서 쉼 없이 감행하는 자기 넘어서기, 거짓 희망에 눈멀지 않기, 요컨대 주인·노예 변증법의 고리 끊기.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는 이상한 나무. 인문학이 이 나무를 닮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을 닮아야 할까.(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07. 09. 08.
P.S. 아래는 80년 광주의 경험과 이후의 죽음들에 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오마이뉴스(04. 12. 08) 광주의 경험, 죽음 우리 곁에 다가오다
광주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한국현대사에서 정치권력과 시민의 생명 문제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숫자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와 견주어 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의문사 사건은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10·26, 자제력을 지키던 대중과 권력의 긴장관계가 깨지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학살로 인하여 한국사회가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 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 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19혁명을 거친 후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되어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집권 동안 계엄령은 모두 3회 실시되어 총 31개월간 지속되었고, 위수령 역시 3회 실시되어 총 5개월간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에 걸쳐 발동되어 69개월 간 지속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5개월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비상수단이 상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가두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북의 김일성 정권도 마찬가지이다. 김일성 정권도 철저한 주민통제로 유명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6년 헝가리 반공봉기나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광장 사건 등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남북의 분단과 전쟁, 전쟁 기간 중의 인구이동, 그리고 각각의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살로 인하여 이북 역시 이남과 마찬가지로 저항세력에 대한 교통정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정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대중들 역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나름대로 넘어야 할 선은 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져 갔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3백만 명만 깔아 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이런 분위기를 진술하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1980년 5월 광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 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정권탈취기도에 저항하여 떨쳐 일어선 광주시민을 상대로 학살을 감행했다. 약 2백여 명의 시민들이 국군의 총칼에 의해 살해당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www.518.org)에 의하면 사망자 및 행불자는 207명으로 되어 있다.
1960년 이후 한국정치를 특징지어 온 군과 학생의 대립이 이제 최루탄에서 실탄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거의 지워지거나 왜곡되어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인민군이나 좌익이 저지른 것으로만 생각하던 광주시민들에게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광주의 많은 어린이들은 이 학살이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 국군 복장을 하고 저지른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충격을 가져 왔지만, 의문사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죽인 쪽과 죽음을 당한 쪽 모두에서 감지된다. 양쪽 모두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 나름대로 유지되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거센 저항과 탄압에 대한 자제력이 상실되었으며, 정치적인 죽음을 대량으로 목도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쪽은 당장 방자해지기 시작했다.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임기윤 목사가 1980년 7월 27일 의문사를 당했고, 1980년 7월 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는 단식농성 중이던 비전향장기수 변형만과 김용성이 감호소 당국의 강제급식과정에서 의문사를 당하는 등 광주학살 직후인 1980년 7월 한 달 동안만 모두 3건의 의문사가 발생했다.
반란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살육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불량배 일제 소탕'이라는 미명 하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폭력행사를 계속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최소 수십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엄격히 요구하는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하 의문사법) 상의 의문사는 아닐지라도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광주학살에 뒤이은 삼청교육대 사건은 비록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 대한 공포감 확산과 더불어 권력이 지목한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광주에서의 죽음을 겪으면서 저항세력 역시 죽음과 새롭게 대면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기간 동안 1975년의 제2차 인혁당 사건 등 여러 차례의 사법살인이 있었지만, 당시에 널리 알려진 의문사로는 최종길 교수 사건과 장준하 사건이 있었고, 이 이외에 저항과정에서 직접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한 민족민주열사는 전태일(1970년)·김상진(1975년)·김경숙(1979년) 등에 불과했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불러내다
한국전쟁 기간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거치면서 한국은 죽음조차 죽인 사회로 전락했다. 죽인 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억울한 정치적 죽음은 널리 알릴 수도, 슬퍼할 수도, 추모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잊혀진 죽음이 되고 말았다. 전태일·최종길·김상진·장준하·김경숙 등의 죽음이 이어졌지만, 아직 죽음은 우발적인 비극처럼 여겨졌고,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를 겪으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너무나 멀리 있었던 죽음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만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싸우는 정권이 살인정권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은 이미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학살자들은 광주에서 잔혹한 학살을 감행한 것이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과시하며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의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저항세력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본때를 보여 대중들이 겁을 먹게 하면 한국전쟁 직후처럼 모든 반대파가 사라져 버린 무저항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들의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죽어 있던 죽음을 오히려 불러냈다.
광주의 죽음도 광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민군의 저항이 진압된 직후인 5월 30일에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투신했고, 6월 9일에는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했다. 1981년에는 광주가 고향인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고, 1983년에는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장기간의 옥중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으며, 서울대생 황정하도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서관에서 추락, 사망했다.
특히 박관현은 단식투쟁 중에 열린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죽어간 영령들에게"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최후진술을 했다.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책임감이 깊어갈수록, 일반국민들이 독재정권과 어용언론의 정보통제와 여론조작 속에 광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어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political suicide)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1986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오한섭·박영진·김세진·이재호·변형진·이동수·박혜정·이경환·강상철 등 무려 9명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투쟁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거센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 1986년 6월 11일 노동자 신호수가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가 19일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6월 18일 기관원에 연행된 서울대생 김성수는 20일 부산 앞바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 부천서에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 있었다는 점 기억해야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발생한 사건으로 1·2기 의문사위에 진정·접수되어 의문사로 인정되거나 최소한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은 사건은 모두 19건인, 이 중 녹화사업을 비롯한 군대 내 사건이 10건, 삼청교육대 관련 사건이 2건, 교도소나 감호소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3건 등으로 군대·삼청교육대·교도소 등 특수시설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78.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실종사건도 2건이나 된다.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실종사건의 경우 1기 의문사위에서는 모두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2기 의문사위는 정은복 사건을 의문사로 인정했다. 실종사건은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많은 의문사 사건에 사인뿐만 아니라 사체까지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이런 시도가 성공했을 경우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실종사건이 되고 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