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국에 관한 한 기사를 읽고 문득 테어도르 데일림플의 한 에세이가 생각이 나서 페이퍼를 만들어둔다. 기사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자신이 새로 만든 당의 간판으로 30대의 젊은 여성 사업가를 내세웠다는 것이고 이러한 '미인계'가 과연 통할까, 라는 설왕설래를 낳고 있다는 것. 데일림플의 에세이는 <브레이크 없는 문화>(이카루스미디어, 2007)에 수록된 '정직한 관료주의보다 부패한 관료주의가 낳은 이유'이다. 여기서 물론 '낳은'은 '나은'의 오기이다(이런 오기가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 라인을 두루 통과할 수 있었을지 미스테리하다).

데일림플의 책을 '상반기 베스트' 중의 한 권으로 꼽아두기도 했지만 사실 혼자서 몰래 읽어도 좋을 책이다(양서는 혼자서만 읽어라, 도 독서의 한 원칙이다!). 정신과의사 출신의 칼럼리스트인지라 책에 실린 그의 글들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취미는 가끔씩 온라인에서 그의 글을 찾아 번역본과 대조해가며 읽는 것인데, '정직한 관료주의보다 부패한 관료주의가 나은 이유'의 원 칼럼 제목은 'The Uses of Corruption'(http://www.city-journal.org/html/11_3_oh_to_be.html) 이다. '부패의 효용'쯤 될까? 영국과 이탈리아를 비교하면서 50년 전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던 이탈리아가 오늘날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히려 더 활력있는 나라로 변신하게 된 원인으로 이탈리아 관료주의의 부패를 들고 있는 독특한 시각의 에세이이다. 나는 베를루스코니 같이 '부패한' 정치인/기업인(그는 AC밀란의 구단주이기도 하다)의 집권이 어떻게 가능할까 의문을 가지면서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수준을 낮춰봤었는데 데일림플의 칼럼을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이탈리아 공직자들의 부패는 국민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후원자나 보호자가 아니라 적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며 국민은 국가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세금을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탈세를 하게 된다.(...) 이탈리아 '암거래' 경제는 다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 더 크고 복잡하다는 사실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유사시장의 규모가 공식적으로 1인당 GNP가 영국과 비슷한 이탈리아가 영국보다 훨씬 더 부유해 보이는 이유다."(295쪽)

"거대하고 정직하지만 무관심하고 무능력한 국가 관료제도는 의존과 반감이라는 서로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대를 주게 된다. 이탈리아에선 이 같은 기대감이 존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탈리아에선 누구도 정직한 체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적 행정의 자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대하고 표면적으로 호의적인 국가는 한때 방문객들이 주목했던 영국 국민의 자부심과 강인한 독립심을 완전히 부식시키고 있다. 현재 영국인들의 40%는 수입의 일부 혹은 전부를 직접 국고에서 지급받는 정부보조에 의존하고 있다."(297쪽)

"어쨌든 이탈리아인들은 자기 나라에 정직한 정부가 들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을 만큼 자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당선되기 전 벨루스코니(*베를루스코니) 수상에게 퍼부어진 부정직에 대한 주장이 논쟁거리조차 되지 못했던 이유다. 벨루스코니 수상에 대한 비난이 사실이었다 해도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이 소규모로 하고 있는 것을 신임수상은 대규모로 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거대국가는 그것이 부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하기 때문에 해롭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사실 부패하지 않은 거대국가는 부패한 거대국가보다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다."(302쪽) 

나는 이러한 이탈리아인들의 정치의식이 냉소주의인지, 현실주의인지, 혹은 낙천주의인지 헷갈리지만 여하튼 베를루스코니가 한번 더 집권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또 그런 부패한 정부와 무관하게 이탈리아 사회가 굴러가는 일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걸. 우리의 현 정부도 지속적으로 공무원의 숫자를 늘려왔는데, 이탈리아 모델을 따르자면 문제는 우리의 관료들이 도덕적인 체한다는 데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데일림플의 탁견을 빌자면, "공무원들이 정직한 곳에선 오히려 누구도 관료주의의 폐해를 막을 수 없게 된다." 혹은 거꾸로 도덕적 권위주의를 앞세운 현 정부에서도 이 정도나마 국가가 굴러가는 건 관료주의의 '숨은 부패'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고. 아래는 서두에서 언급한 외신기사이다.

한국일보(07. 08, 27) 伊 "미인계 이용해 정권 탈환" 과연 통할까?

1년6개월 전 총선에 패배한 이탈리아 중도우파 연합이 ‘미인계’를 통한 정권 탈환을 선언, 눈길을 끌고 있다. 이색 정략의 중심에 선 인물은 돌출 행위와 부패 스캔들로 이름을 떨쳐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0) 전 총리. 그는 최근 선관위에 신당 ‘자유당’과 휘장을 등록했다.

자유당의 대표는 올해 39세의 비즈니스 우먼 미켈라 비토리아 브람빌라. 20여년 전 미인대회에 출전해 ‘포토제닉’상을 받은 미녀이다. 사업가로 변신한 브람빌라는 철학을 전공한데다가 정치경력이 거의 없어 이탈리아 정계에서도 그 돌연한 등장을 놓고 논란이 불붙고 있다. 현지 정가에선 자유당이 베를루스코니의 지휘 아래 로마노 프로디 중도좌파 정권에 맞서는 선봉으로 나설 것이란 시각이 대체적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아직 브람빌라가 자신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진 않으나 차기 정권에선 여성이 총리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에둘러 말해, 그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언론들은 베를루스코니가 자유당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자임하면서 브람빌라를 당사무총장으로 지명했으며 이로 인해 중도우파 안에서 반발이 고조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중도우파 내부에선 브람빌라에 대해 “야심이 없는데다가 대중적인 인기도 전무하다”며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를루스코니가 정권을 되찾기 위한 카드로 내세운 브람빌라는 철강회사 집안 출신으로 18살 때 미스 이탈리아 선발대회에 나가 결선까지 진출하며 입상했다. 대학에 들어가선 가업을 잇기 위한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고 철학을 배워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나 학교 졸업 후 사업에 뛰어 들어 어류수입회사를 경영, 수완을 발휘했고 지금은 이탈리아 청소년벤처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전도 유망한 기업인으로 꼽히고 있다.

미인대회 출신의 아름다운 외모와는 걸맞지 않게 “내 말을 누구든 막을 수 없다”고 스스로 호언할 정도로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브람빌라는 상당한 추진력도 갖춘 여장부 스타일로 전해졌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함께 사는 남자친구 에로스 마지오니도 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와의 사이에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브람빌라는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서 2005년 그의 눈에 처음 띄었다. 베를루스코니가 지난해 총리에서 퇴진한 뒤 브람빌라는 전국에 5,000개의 자유클럽을 만들어 지지자를 결집, 중도좌파로부터 정권을 탈환한다는 선거전략안을 건의해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정치 분석가들은 베를루스코니의 밀어 붙이는 성향에서 브람빌라가 중도우파 연합 내부의 반발을 극복하고 오는 10월 ‘민주당’으로 통합되는 중도좌파의 왈테르 벨트로니 로마 시장의 대항마로서 옹립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벨트로니 로마 시장은 프로디 총리의 후계자로서 일찍부터 중도좌파 연합의 ‘황태자’로 불려 왔다.(한성숙 기자)

07. 08. 26-27.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iosculp 2007-08-2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니 공감이 가는데.
경제학자가 아니니 그냥 살면서 느낀것이라면 지금 한국경제의 활력을 빼앗은것도 공무원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자영업자들 카드 수수료 문제가 신문에 오르내리는데 아마 이런것 신경쓴 먹물들은 없는것으로 봅니다. 점심 짜장면 먹고 주인장한테 여기 카드 수수료 얼마요 물어보면 대략 4.5%전후, 이건 주로 중소 자영업자들의 카드 수수료인데요. 매출이 2천이면 90만원이 수수료 나가는것이죠. 이게 수수료만이 아니라 소득액 노출이 되어서 세금도 더내고 부가가치세도 내게 되면 대충 계산하면 2천이라면 달에 다른것 빼고 150-200정도를 나라에 더 받치게 되는것인데요. 이런부분이 자영업자의 탈세와 연관이 되지만 역으로 국가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의 나름대로의 자생력을 확보해온 부분이라고도 볼수 있지 않나 생각이 되거든요.
열심히 일하면 세금 내는대신 자신의 종자돈을 모을수 있는것이 이런 자영업자들이었는데
투명화가 되면서 자신이 설수있는 기반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도덕적으로 버는만큼 세금내라라는 애기는 좋지만. 벌곳이 없어지면, 그리고 그 낸 세금이 간판정리나 기타 시장님이나 나랏님 관심분야에 주로 투자되고 공무원들 퇴직후 자리보전하는 사업에 우선적으로 이용된다면(이건 공약사업이라 법적인 하자도 없고, 서류꾸면 투명하게 처리하면 아예 하소연도 못하는 짓이 주변을 살짝만 봐도 보이는데)
과연 소득을 투명하게 한다는것이 누구 좋은일이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거든요.
소득투명화를 내걸고 전국민 카드사용(공제를 위해)하게 만들었는데 재테크의 기본은 카드사용하지 말라인데요.800만인가 신용불량자을 만들어버린 카드의 위력은 공무원들의 협잡에 놀아난 꼴 같기도 하고요.
소득이 적어지면 택시운전사가 술집삐끼가 되고 아줌마들은 전화방 노래방으로.
밑바닥이 붕괴된다는 느낌과 거기에서 돈을 모을수 있는 방법이 원천봉쇄되어간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쩝.

로쟈 2007-08-27 12:18   좋아요 0 | URL
데일림플의 논점은 작은 국가의 경우엔 정직한 관료주의가 미덕이지만(예컨대 싱가폴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을까요) 거대국가(리바이던)의 경우 정직한 관료주의라는 건 부패한 관료주의보다도 유해하다는 것인데, 말씀대로 우리의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을 듯하네요. 최선의 의도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도, 의도로 모든 걸 변명할 수는 없겠죠...

자꾸때리다 2007-08-2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에는 별로 안 예쁘군요. 적어도 손예진, 한지민, 엘렌 그뤼모 정도는 되어야 미인이라 할 수 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쟈 2007-08-28 08:36   좋아요 0 | URL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마스크이긴 합니다.^^;

웅아 2007-08-2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부이탈리아만 놓고 보면 아마 유럽에서 가장 잘 살 겁니다. 권력도 장악하고 있고 모가 아쉽겠습니까? 부패가 더 좋죠. 남부이태리가서 저런 소리하면 글쎄....

이태리의 행운은 미국과 멀다는거... 미국의 전가의 보도 기업투명성에 걸리지 않으니 ...

로쟈 2007-08-28 08:38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는 2차 대전 이후 60차례 이상 정권이 교체되었다는군요. 애당초 정치적 안정 같은 건 (남부로서도)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섬나무 2007-08-2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의 한 원칙을 깨신 로쟈님의 아량 추천!^^

로쟈 2007-08-29 19:3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