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 읽을 이론서 가운데 하나로 최근 번역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을 꼽아두고 있고, 현재는 영역본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다(1장까지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복사했다).

 

 

 

 

그러면서 미리 읽어두려고 한 것이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에서 루만에 관한 장이다. 그것은 열두번째 강의의 '부언설명'으로 붙어 있는데, 제목이 '니클라스 루만: 체계이론에 의한 주체철학적 유산의 전유'이다. 하버마스는 사회학의 계보가 아닌 주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읽겠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독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독어판 <사회쳬계이론>(1984)이다. 그를 조금만 따라가본다(많이 따라갈 수도 없다). 내가 더불어 참조한 건 영역본(1987)과 아래의 러시아어본(2003)이다.

Философский дискурс о модерне

"루만은 일반적 사회이론의 '개요'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개관할 수 있도록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점차 확장되는 이론 팽창의 중간결산을 한다."(424쪽) 그러니까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은 그의 이론적 중간결산이며 이로써 독자들은 루만의 전체이론을 개관해볼 수 있다는 것.

"루만의 시도는 콩트로부터 파슨즈에 이르는 사회이론의 학제적 전통과의 연결보다는 오히려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의식철학의 문제사와의 접속을 찾는다.(...) 이 이론은 주체철학의 근본 개념과 문제설정들을 물려받으려고 하며, 동시에 주체철학의 문제해결 능력을 능가하고자 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결별한 철학의 후계자'로 제시된다고 하는데, '결별한 철학'의 영역은 'abandoned philosophy'이다. 짐작에는 (구조주의 이후) '주체철학의 종언'이 회자되던 시점에서, 체계이론은 말 그대로 이 '버려진 철학'으로부터 용어들과 문제틀을 가져와서 주체철학이 풀고자 했던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 과정에서 실행되는 체계이론의 시각전환은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대상없이 만든다. 자기자신에 적용된 사회의 체계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하버마스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대목이 그 비판의 개요이자 핵심적인 착안으로 보인다. 체계이론은 현대성(modernity)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 

여기서 '시각전환'은 '주체철학으로의 시각전환'이겠고,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은 앞 부분의 내용을 참조해야 알 듯싶다. 그런데, 그런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체계이론은 무력화한다는 얘기.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적용된 사회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복잡성의 증가를 어떤 진화의 척도로 간주한다면 자연스레 이러한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로 말미암아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424-5쪽)

물론 원문을 직역한 형태이긴 할 텐데, 이런 번역문은 독자를 기운 빠지게 할 뿐더러 짜증나게 한다(형용사절이 너무 길어서 하버마스의 관심에 이르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What interests me is whether, together with this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 -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 that I have discussed in these lectures."(368쪽) 

독어본이 어떻게 씌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 영역본과 맞추어보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는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에 해당하겠다. '변형' 대신에 영역자가 선택한 단어는 '재기입(reinscription)'이다. 내 식으로 자유롭게 이해하자면 "오래된 주체철학을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정도라고 본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관심거리는 주체철학의 변형/부활로서의 루만의 체계이론 또한 주체철학이 봉착했던 문제들(혹은 그 한계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에 해당하는 건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이겠다. '유증자의 문제들' 같은 건 너무 불친절한 번역이다. 나대로 자유롭게 옮기면, "체계이론 역시 이러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철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과 함께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게 아닌가" 하는 게 나(하버마스)의 관심사이다.

그럼 어떤 문제들인가?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이다.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가 거기에 해당한다. "헤겔의 죽음 이래로 모더니티의 원리로서의 주체-중심적 이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해왔던 문제들". 간추리면, 주체철학의 유산으로서 '주체-중심적 이성'이 갖는 문제점과 한계를 주체철학의 다른 버전으로서 체계이론 또한 갖게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이다(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러니까 하버마스의 비판은 삼단논법을 따라 진행된다. (1)루만의 체계이론은 근대 주체철학의 계승이다. (2) 주체철학의 주체-중심적 이성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3)따라서, 체계이론 역시 똑같은 한계에 봉착하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주석을 통해서 해명하고 있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나는 물론, 이론을 오직 한 측면에서만 멋지게 서술한다면, 우리는 이론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이론의 이 측면만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425쪽)    

이 대목의 번역 역시 좀 서툴다는 인상을 준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이라니? 직역이더라도 문맥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영역본은 이렇게 돼 있다. "As one accustomed to the same treatment, I realize of course that one does not do justice to the richness of the theory when one single-mindedly broaches it from just one angle - but in out context, only this aspect is of interest."(421쪽) 

'수난에 익숙한 사람'은 영역본에 따르면 '이런 식의 취급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버마스 또한 이론의 일면만을 갖고서 평가/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한 가지 관점에서만 문제를 끄집어내어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더러 이론의 풍요로움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것('멋지게 서술한다면'은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맥락이란 이 책(강의)의 주제대로 '모더니티'에만 초점을 맞추어 현대 사상가들을 평가하려는 것과 관련된다. 이상이 그의 루만론의 전제와 사전 정지작업이다. 나머지 본론은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07. 07. 04.

P.S.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오늘 날아온 신간 안내 메일에는 우연찮게도 루만 연구서가 한 권 들어 있었다. <니클라스 루만: 영혼에서 체계로(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2006)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책인데 분량도 두툼한 최근간 연구서이다. <사회체계이론>을 독파한다면 참고해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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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마스의 독일어 원서는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로 Suhrkamp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요, 말씀하신 원문의 해당부분을 보면, "Leidgewohnter"가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 "forsch anschneidet"가 "멋지게 서술한다면"으로 번역된 경우입니다(모두 독일어본 p.426). 전자의 경우는 "이러한 대접[혹은 수모]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특정한 하나의 측면만을) 거칠게 재단하자면"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독일어본과 비교했을 때 영역본도 그리 적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문맥이 통하게 잘 '의역'했다는 점에는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요. 국역본의 번역이 '거칠게 재단'된 것만은 분명하긴 합니다.

로쟈 2007-07-0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어본의 경우도 그런데, 그들대로의 번역 관행이 있는 것이겠죠. 중요한 건 말이 되게 옮기는 것인데, 말이 안되는 번역본을 읽는 거야 말로 (익숙한 일이긴 하나) 분명 '수난'입니다.--;

람혼 2007-07-06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 물론 상당히 부정적인, 마치 귀류법과도 같은 방식을 통해서라는 게 더욱 큰 문제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같은 인구어 계열의 번역에 있어서는 좀 더 작업이 수월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배가 아플 때도 '아주 가끔은' 있습니다.--;

로쟈 2007-07-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는 정곡을 찌르신 말씀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예상에도 불구하고 원서까지 구해서 보기에 돈이 두 배로 든다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람혼 2007-07-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백배 동감입니다, 특히 그 '비용'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더.^^;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로쟈님이 말씀하신 과정과 정확히 역을 이루는 과정 또한 존재하는데ㅡ아마도 이 역시 로쟈님도 느끼고 계시는 바가 아닐까 생각하지만ㅡ원서를 먼저 구입해 멀쩡하게 독해까지 다 마치고는, 그에 관한 '악명 높은' 번역본이 도대체 어떻게 번역되어 있나 하는, 마찬가지로 '악명 높은' 편집증적 궁금증에서, 그 번역본까지 사게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쟈 2007-07-0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증세가 비슷하시군요.^^;

marr 2007-08-01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독일어건 영어건 경제성이란 측면에서는 한글 번역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건 모국어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문제지요. 그런 면에서 번역본을 읽으면서 머리로 재번역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지요.

로쟈 2007-08-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본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불성실하고 부정확한 번역서를 읽는 건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