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리뷰로 분류했던 글을 페이퍼로 옮겨놓는다. <문학과사회>(2006년 가을호)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대한 서평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분량 제한 때문에 '들뢰즈와 헤겔'에 관한 내용만 간추렸는데, 사실 책은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론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최근에 에이젠슈테인론을 대학원 수업시간에 읽다가 <신체 없는 기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그걸 다 음미하기도 전에 지젝은 서너 권의 책을 더 써낼 것이다!..
우리 영화 <왕의 남자>의 끝장면에서 광대 장생은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아, 이놈이 기생들 요분질이 시시해지니까 이번에는 사내놈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그 비역질이 보통 비역질과 달라서 밥이 나오고 비단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그런데, 이 비역질이 비단 절대권력자만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것이기도 하다면 어쩔텐가? 철학사가 바로 그러한 비역질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이 ‘비역질의 철학’이 ‘순진무구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주특기였다면?
들뢰즈 자신이 한 대담에서 밝혀놓은 터라 특별한 비밀도 아닌 이 사실을 “들뢰즈를 다루는 라캉주의적 책”(p.10)의 저자가 놓칠 리 없다. 지젝이 인용하는바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사를 일조의 비역,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무염시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그 아이가 괴물 같다는 사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지.”(p.98)
그리고 이러한 ‘비역질의 철학적 실천’을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요컨대 우리가 들뢰즈 자신 뒤에 달라붙는 행위를 감행하고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이라는 실천에 관여하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pp.101-2)
사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상용구를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은 표제 자체가 들뢰즈의 뒤에 달라붙으려는 지젝의 전략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화(dialogue)가 아닌 조우(encounter)'라고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때 그 ‘조우’의 장면으로 우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뒤에 달라붙는’ 장면이다. 즉, 지젝을 따라읽으며 우리가 이 ‘소책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들뢰즈의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이다(지젝은 자신의 책을 'booklet'이라고 지칭했는데, 번역본의 분량은 본문 400쪽이지만 원서는 213쪽이다). 들뢰즈 자신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들뢰즈’ 말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인가? 그건 지젝 자신이 짚어주고 있는 바대로, 최근 10년간 그가 “현대 철학의 중심적 준거점”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지젝이 보는 현대철학의 3항 구도는 '들뢰즈-데리다-라캉'이며, 이것은 '스피노자-칸트-헤겔'이라는 근대철학적 구도의 반복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부턴가 ‘저항하는 다중’ ‘유목적 주체성’ ‘반-오이디푸스’ 같은 들뢰즈식 개념들이 마치 ‘공통 통화’처럼, 진보와 저항의 이론적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이렇듯 ‘유행하는 들뢰즈 이미지’, 곧 반-헤겔적, 반-정신분석적 들뢰즈의 이면에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들뢰즈를 읽어낼 수 있다(이때의 들뢰즈는 헤겔적/라캉적 들뢰즈이다!). 다시 말해서, 지젝이 도입하는 것은 ‘들뢰즈 대 들뢰즈’, ‘들뢰즈에 대립하는 들뢰즈’의 구도이고 그 긴장이다.
지젝에 따르면, 들뢰즈의 최고의 책 <의미의 논리>와 최악의 책 <안티-오이디푸스> 사이에는, 곧 “의미-사건의 비물질적 생성의 불모성과 관련된 들뢰즈”와 “존재의 물화된 질서에 맞서 생성의 생산적 다수성을 찬미한 들뢰즈” 사이에는 양립불가능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놓여 있다(지젝은 들뢰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청산하고 쓴 <시네마>를 통해서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 본래의 들뢰즈로 회귀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아예 들뢰즈가 자신의 이전의 입장이 처한 곤궁으로부터 쉬운 도피처를 가타리에게서 찾은 것이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다(철학사에서 그러한 도피/회피의 사례는 드물지 않다면서).
‘잠재적인 것’(잠재태)과 ‘현행적인 것’(현실태) 사이의 대립을 ‘생산'과 '재현'의 대립, ‘생성’과 ‘존재’의 대립과 동일시함으로써 들뢰즈는 유물론으로부터 관념론으로 퇴행한다. 그럴 경우 “생산의 고유한 현장은 잠재적 공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공간에서 구성된 현실로의 바로 그 이행”이고 “생산은 근본적으로 잠재성들의 열린 공간에 대한 제한이며, 잠재적 다수성에 대한 규정이자 부정”(p.49)이라는 ‘의미의 논리’의 결과를 간과하게 된다.
사실 “들뢰즈의 위대한 반헤겔적 모티브는 절대적 긍정성, 즉 부정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배격”(p.108)에 놓여 있다. 그때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들뢰즈가 상정하는 헤겔은 ‘순진무구한’ 헤겔이다. 즉 “헤겔은 존재의 순수 긍정성에 부정성을 도입하며 또한 헤겔은 분화를 긍정적 일자의 종속적/지양가능한 계기로 환원하기 위해 부정성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지젝의 반격은 “헤겔이 궁극적으로 부정성에 대해 행하는 것은 전례 없는 부정성 그 자체에 대한 ‘긍정화’가 아닌가?”(p.108)란 반문이다
헤겔에 대한 들뢰즈의 단순화는 “칸트에 맞선 혹은 칸트를 넘어선 헤겔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간과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헤겔을 그답지 않게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읽는다(마치 헤겔의 뒤에 달라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헤겔은 칸트로부터, 자기투명하고 완전히 현행화된 존재의 논리적 구조를 표명하는 절대적 형이상학으로 회귀한 자”(p.118)란 이미지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통찰이야말로 들뢰즈적인 것이다.“하지만 헤겔이 칸트에게 여하한 긍정적인 내용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칸트적 체계의] 간극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아는’ 터무니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로가 어떻게 이미 진리 그 자체인지에 대한 통찰, 절대자가 어떻게 정확히 -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 자기 현행화의 영원한 과정의 잠재성인지에 대한 통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pp.118-9)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독해, 혹은 달라붙기가 산출해내는 것은 헤겔=들뢰즈=라캉의 ‘기이한 등가계열’이다(지젝은 들뢰즈=라캉의 테마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되기’ ‘환상’ ‘남근’ 등의 모티브를 통해서 입증한다). 이것이 어쩌면 “참을 수 없는 괴물”(p.103)이어서 들뢰즈는 헤겔을 자기 특유의 비역질, 혹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전유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로 고양시켜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은 들뢰즈가 꺼려 했던 바로 그 일이다.
“들뢰즈는 헤겔이다”라는 일종의 무한판단, 바로 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보통의 비역질과는 다른 ‘비상한 비역질’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광대-철학자 지젝이 얻어내는 결과이다. 그리고 책의 2부에서는 그 결과의 ‘결과들’을 과학, 예술(영화),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영역들에서 차출해낸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들뢰즈적 정치’의 곤궁과 불능을 드러내는 대목들인데, 지젝이 단언적으로 미리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혁명적 전복에 관한 그 어떤 가능한 관념이라도 ‘반-오이디푸스적 반란’이라는 문제틀과 총제적으로 단절해야 한다.”(p.199)
지젝이 이 책을 헌정하고 있는 조운 콥젝은 “이제부터 들뢰즈에 대한 모든 독해는 이 중요한(필수적이기까지 한) 책을 통해 우회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무조건적 존경을 빗대어 지젝은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p.72)라고 반문하는데, 그 반문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젝을 읽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06. 08. 05./ 07 06.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