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문학동네에서 주관한 '도스토옙스키 한달 읽기 챌린지' 기획에 대해서 공지한 바 있는데, 어느덧 기간이 종료되었다.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한 작품을 골라 한달 동안 완독하기에 도전하는 것이었는데, 독서 중에 질문사항을 보내오면 전문가가 답해주는 것도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꽤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편집부에서 지난주에 이를 정리해 보내주었었다. 내가 답한 내용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이 또한 편집부에서 정돈했다). 챌린지에 참여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PART 1. 도스토옙스키 이해하기
Q. 많은 작가들의 워너비인 도스토옙스키를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A. 많은 작가들의 워너비였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습니다. 21세기의 작가도 독자들만큼이나 졸아든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있어서요. 19세기 문학은 대(對)사회적 응전력에서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특히 러시아문학). 그렇지만 20세기 들어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더이상 한 작가나 문학이 핵심적인 모순이나 문제를 다루거나 감당하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치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20세기 이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작가적 역량만의 문제는 아니고 그만큼 다뤄야 하는 문제의 크기가 너무 커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컨대 지금 시대의 작가나 독자는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 신세 같습니다.
톨스토이도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문학이 인간의 문제, 삶의 문제, 세계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수준으로, 어느 만큼의 깊이로 다룰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일에서건 그렇지만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가령 도스토엡스키 문학은 자본의 문제를 제한적으로만 다룹니다. 도박의 심리까지는 다루지만요. 군중의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비록 이 문제는 도스토옙스키뿐 아니라 근대문학이 전반적으로 잘 다루지 못하긴 하지만. 근대소설은 문제적 개인의 대(對)사회 투쟁을 묘사하는 데 강점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문제와 관련해서는 강한 개성의 주인공들과 함께 독자를 깊이 숙고하게끔 하는 서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시점에서도 그의 문학의 궁극적 지향뿐 아니라 시점 자체가 현실을 인식하고 문제를 사고하는 데 여전히 필수적인 참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거나 혹은 세계를, 세계의 문제를 인식하는 데 여전히 필수적입니다. 도스토옙스키를 제쳐놓고도 사유는 가능하겠지만 대단히 빈곤하리라고 생각합니다.
Q. 도스토옙스키는 19세기의 사회적 병폐를 작품을 통해 지적했는데요, 이런 도스토옙스키라면 현재 21세기 우리의 삶에서 어떤 병폐를 지적했을까요?
A.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도 자유의 가치를 강조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기독교적 복음으로서 사랑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결합되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가? 우리가 그 자유를 차별없이 누리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가? 같은 인류로서 서로 증오하고 학대하는 대신에 조화로운 삶을 함께 살고자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맞서는 많은 장애들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병폐들입니다. 중국작가 위화가 ‘거대한 차이’라고 부른 사회경제적 불평등(격차)도 대표적입니다(참고로 위화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작가이지만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소설적 방법은 찾지 못한 듯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가장 좋은 책이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이 21세기만의 새로운 문제는 아닙니다.
Q.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은 문학사에서 어떤 단계(문학파 혹은 주의)에 해당하며 어떠한 의미를 갖나요?
A. 통상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작가로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함께 도스토옙스키를 꼽습니다(『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참고). 작품을 기준으로 하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은 투르게네프의 『루진』(1856)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까지를 가리킵니다. 사실주의에 앞서서 러시아문학에는 낭만주의 문학이 있었고 푸시킨과 레르몬토프, 고골 등의 대표 작가들이 활동했던 시대입니다. 사실주의 문학의 핵심장르는 산문소설이며 유럽문학의 경우 발자크(프랑스)와 디킨스(영국) 등의 대표 작가들과 함께 사실주의가 개막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문학의 선배 작가들뿐 아니라 발자크와 디킨스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발자크는 푸시킨과 생년이 같은데 '푸시킨부터 도스토옙스키까지'는 달리 '발자크부터 도스토옙스키까지'이기도 합니다(도스토옙스키는 청년시절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실주의(통상적인 사실주의와 구별하여 그 자신은 '영혼의 사실주의'라 부르기도 했습니다)는 러시아문학사의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시야를 확장하면 유럽문학사, 특히 프랑스문학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와 생년이 같은 플로베르를 비교대상으로 삼자면, 유럽소설사는 (1)발자크에서 플로베르로 가는 길, (2)발자크에서 도스토옙스키로 가는 길이라는 두 갈래 길을 기본 구도로 갖습니다. 이 두 경로의 차이는 플로베르와 도스토옙스키, 두 작가의 마지막 작품, 『부바르와 페퀴셰』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비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Q. 문학사적 위치만으로도 물론 유명하겠지만 러시아어 문장 구사에 관한 측면에서도 위대한 작품인가요? 『죄와 벌』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러시아소설의 특징인가요? 아니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만 이런가요?
A. 문장 내지 문체에 대한 관점은 둘로 나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문체는 작가들의 모범으로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푸시킨과 투르게네프,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간결성의 미학은 도스토옙스키와는 거리가 멀며, 그와는 반대로 고골의 계보에서 만연체와 장광설의 미학을 대표합니다. 문체만을 기준으로 하면 플로베르는 발자크보다 훌륭한 작가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레 더 위대한 작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문학은 곧 문체'라고 보는 것은 문학에 대한 한 가지 관점, 좁은 의미의 문학주의적 관점일 뿐입니다(한국문학에서 유독 문체가 강조되는 것이 문학사가 단편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은 여느 러시아소설에 견주어도 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인들이 말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소설에서라면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장광설들이 러시아소설, 특히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는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 점은 저도 부럽게 생각합니다.
Q.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죄와 벌』의 생각들이 오버랩되어 보이는 부분들이 좀 있네요. 범죄, 살인 등을 예상하고 있는 듯한 발언들요. 도스토옙스키의 글 속에 범죄,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살인 등의 범죄는 원래 근대소설의 인기 소재이고 레퍼토리입니다. 영국에서는 ‘게이트소설’이라고 이런 유형의 범죄소설들이 인기 장르이기도 했습니다(그래서 탐정소설도 발달했겠지요). 다만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는 이런 범죄들이 특정한 이념(사상)과 연관되어 있고 이 점이 영국소설과 다른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범죄는 러시아사회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러시아처럼 부르주아혁명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후진적인 사회에서 단번에 새로운 사회로의 도약이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말하면 부르주아혁명을 건너뛰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직진하는 게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끔 하는 것이 러시아사회의 특수성입니다. 살인이나 테러와 같은 과격한 방식은 사회변혁의 가능성이 합법적인 경로로는 모색될 수 없을 때 불가피하게 동원되는 수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PART 2. 러시아 이해하기
Q. 러시아 사람들이 정식 이름보다 애칭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름이 어려워서인가요? 그리고 애칭은 주로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애칭마다 다른 의미나 뉘앙스가 있는 건가요? 이러한 이름들을 쉽게 외우는 꿀팁은 없을까요?
A. 러시아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이름 때문에 등장인물이 몇 명인지 알 수 없다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사실 다른 모든 나라의 이름이 우리에겐 입에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식 이름은 친숙해져서 쉽게 느껴지는 것일 수 있고요. 러시아소설의 독자라면 알겠지만 러시아 인명은 ‘이름+부칭+성’으로 돼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성이고(여성형은 도스토옙스카야) 그의 이름은 표도르입니다. 미하일로비치가 부칭인데 아버지의 이름이 미하일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풀네임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됩니다. 전체 이름을 다 부르는 경우는 희소하고 대개 이름과 성, 이름과 부칭을 부릅니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애칭을 쓰는데 이름을 변형한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표도르가 이름이니 그 애칭은 ‘페쟈’입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 애칭도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비하해서 부를 수도 있어서 이 경우는 ‘비칭’이라고 합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로디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의 경우 애칭은 로디온에서 나온 ‘로쟈’입니다. 제가 필명으로 쓰고 있는 이름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세 아들은 이름이 각각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이고 그 애칭은 미챠, 바냐, 알료샤가 됩니다. 쉽게 외우는 팁? 친해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암기하려고 노력하는 건 과도한 것 같습니다. 저도 모든 인물의 풀네임은 알지 못합니다.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자주 나오니까 기억할 뿐입니다.
Q. 도스토옙스키 소설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짙게 담겨 있는데요, 관련해 러시아정교회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이 뭐가 있을까요? 유로지비도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까요?
A. 러시아정교회에 관한 최소한의 상식이라면, 같은 기독교이지만 가톨릭에 대한 맹렬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정교는 말씀보다 의례를 중시하기에 말씀을 강조하는 개신교와도 다릅니다. 정교가 강조하는 미덕은 자신을 낮추는 겸허이고 침묵입니다. 또 한 가지, 러시아정교는 제정러시아의 중요한 통치기반이기도 했습니다. 관제 이데올로기에서는 전제주의와 러시아정교, 그리고 농노제의 ‘삼위일체’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서유럽에서 기성 종교권력과 그 부패에 맞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정교는 권력과 밀착돼 있었고 한 번도 그에 맞선 적이 없습니다. 참고로 사회주의 시대에 탄압받았지만 현재도 러시아인의 절반 이상은 정교 신자입니다. 유로지비(여성은 유로지바야)는 중세 때부터 전해져오는 것으로 '성스러운 바보'라고 부르는데 바보이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간주됐습니다. 개신교나 가톨릭에서라면 그렇게 우대하지 않았을 것 같으니 러시아정교 문화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PART 3. 『죄와 벌』 이해하기
Q. 라스콜니코프는 왜 노파를 죽여야만 했을까요? 돈 때문에? 가난? 정의감?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에? 로쟈가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게 된 동기와 심리가 궁금합니다.
A.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한 동기는 작품에 충분히 설명돼 있습니다. 공리주의적 동기와 초인사상(범죄이론),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는데 소냐에게 하는 고백을 들어보면(소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므로 독백으로도 읽히는 대목입니다) 핵심은 초인사상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서 특별한 권리를 갖는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Q. 라스콜니코프는 살인 전에도 그후로도 심하게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가 범인이라고 밝히고 싶어하는가 하면 들킬까봐 무서워하며 증거물을 숨기기도 합니다.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가요?
A. '라스콜'이란 이름이 '분리' '분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를 구성하는 두 자아는 각각 이기적인 자부심(자존심)과 이타적인 인류애(동정심)으로 분열돼 있으며 이것이 다시 통합되기까지의 여정이 『죄와 벌』의 줄거리입니다. 이 분열은 라스콜니코프와 소냐 사이의 대립으로도 ‘외화(外化)’되는데, 에필로그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이제는 소냐의 길이 나의 길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이 대립을 해소합니다.
Q.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뿐 아니라 동생 리자베타도 죽이는데요. 도스토옙스키는 왜 로쟈가 착한 리자베타까지 죽이게 했을까요? 또하나의 살인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 외에 리자베타까지 살해하는 건 어떤 의미일지 독자들마다 해석해볼 사안인데, 사실 치밀한 계획하에 완전범죄를 기도했음에도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에는 여러 가지 우연이 개입됩니다. 리자베타의 예상치 못한 출현과 라스콜니코프의 추가 살인은 그 절정입니다. 인간이 마치 2×2=4처럼 모든 것을 계산하여 일을 실행하고 합리적 이성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성 과신에 대한 경고로 읽을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이성 너머에 있는 것이 신의 섭리입니다. 혹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구도를 갖다 쓰자면 유클리드적 이성(지상적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비(非)유클리드적 이성입니다.
Q. 초반에 라스콜니코프가 꾼 악몽, 사람들에게 얻어맞는 말을 지키려고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그렇게 착하던 로쟈는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나요?
A. 라스콜니코프의 꿈은 그의 곤궁과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시장터에서 학대받은 암말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던 로쟈는 그의 바탕에 있는 보편적 인류애(동정심)을 대표합니다. 그렇지만 청년 대학생이 된 라스콜니코프는 거기에 더해 굉장히 이기적이고 투쟁적인 오만한 자아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마치 관 같은 다락방에서 그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범행을 계획하지만 전당포를 리허설차 두번째로 방문하고 나서는 곧바로 그 일의 추악함에 혐오감을 느낍니다. 내면에서 두 자아가 충돌하는 것이고 이는 꿈에서 학대받는 말과 마부의 관계로 변형됩니다. 늙은 암말은 전당포 노파와 함께 라스콜니코프 자신도 상징합니다. 범죄이론을 통해서 살인자의 길로 내몰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Q. 소설에서 라스콜니코프나 라주미힌이 대학생이라고 밝히자마자 태도를 바꾸는 인물이 여럿 있습니다. 당시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나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특별했나요?
A. 한국의 경우도 1950년대나 60년대에 대학생은 소수이고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는 그 이상으로 희소했고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통상 인텔리겐치아(지식인) 계급이라고 하는데 대학생이 그 기준이었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Q.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어머니는 일 년에 120루블의 연금을 받는다고 하고, 이후 두냐가 3천 루블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면서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당시 1루블은 지금으로 치면 얼마 정도 될까요?
A. 당시 러시아의 화폐 루블의 가치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데 고골의 『외투』(1842)에 등장하는 하급관리(9등관) 아카키 아카키에비치의 연봉이 4백 루블이라고 나옵니다. 『검찰관』(1836)의 주인공 흘레스타코프는 7백 루블짜리 수박을 먹는다고 허풍을 떨기도 하고요. 프랑스도 그런데 19세기에 화폐가치의 변동이 크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3천 루블은 현재의 원화가치로 5천만 원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연봉을 감안하면 하급관리나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은 40~50루블 이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하루 수입으로 환산하면 1.2~1.5루블 정도입니다. 물론 재화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니 어디까지나 추정일 따름입니다.
PART 4. 특별 질문
Q. 이현우 선생님의 필명 '로쟈'는 『죄와 벌』의 로쟈에서 따온 것인가요? 그렇다면 왜 이 인물의 이름을 필명으로 정하셨나요?
A. 이미 적은 대로 로쟈는 라스콜니코프의 애칭(로디온의 애칭)입니다. 20년쯤 전에 인터넷 공간에서(특히 카페) 활동하게 되었는데(그런 게 처음 생겨서) 별명을 설정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중국 영화배우 이름을 몇 번 흉내내어 쓰다가 친숙한 ‘로쟈’로 낙착했습니다. ‘노자’나 ‘로자 룩셈부르크’와는 무관합니다(그맘때 유명해진 박노자 교수와 혼동되기도). 게다가 그맘때 『죄와 벌』을 번역하던 중이기도 했습니다. 기억에는 2/3까지 번역하다가 강의 같은 일들에 밀려서 중단되었고 끝내는 흐지부지되었습니다(이후에도 장편소설을 번역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번역원고는 컴퓨터 하드를 몇 번 교체하는 과정에서 유실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