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일정이 취소되어 약간 일찍 귀가하게 되었고 그걸 빌미로 잠시 부지런을 떤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를 옮겨오려는 것. 차례상 이번주엔 시인이 다루어지게 되는데,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이장욱이 시인으로 호출됐다(그는 시인들로부터 즐겨 해설을 부탁받는 시인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그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지면기사에서 '만나보게' 되는군.

경향신문(07. 04. 28) [작가와 문학사이](16)이장욱-그는 그냥 ‘문학’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는다. 둔한 귀에 그것은 때로 소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고성능 안테나다. 예컨대 김행숙·황병승·김민정 등의 독창적인 목소리는 어떻게 한국 시사(詩史)에 안착할 수 있었던가. 일단은 그 목소리 자체의 힘이겠지만, 그들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해설이 탁월한 안테나의 역할을 해준 탓도 있다. 그 해설을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이장욱. 그는 소위 ‘미래파’의 산파 중 하나다. 그 자신이 이미 뛰어난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첫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2002)은 충분히 읽히지 않은, 그러나 좋은 시집이다. 어떤 시에서 화자는 X레이 사진을 보다가 문득 한 소식 깨친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감상적인 필름’) 본래 ‘고백’은 내면, 진실, 질서로 구성되는 성(聖)삼위일체의 산물이다. 내면이 있고 내면의 진실이라는 것 또한 있어 그것이 질서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고백을 낳는다. 그러나 보라, X레이 사진에 내면 따위는 찍히지 않는다! 이 유물론은 2000년대 시의 공통감각 중 하나다. 자, 고백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내면 없는 화자를 창안했고(‘코끼리군’이라는 화자) 좀 다른 고백을 시도했으며(‘편집증’에 대한 관심) 무질서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다(시공간의 혼란).

이 미학과 관계하는 이장욱의 개인 어휘가 ‘자세’다. 내면이 없는 무인칭의 존재들이 만나고 엇갈리며 빚어내는 카오스적인 무늬를 일러 ‘자세’라 한다.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이를테면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가 그의 관심사다. “누군가 그대를 불렀다고 생각하여/그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단 하나의 이미지로 정화되는 생/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호명’) 그는 그런 자세들을 ‘사랑’한다. 그의 시가 대개는 냉정하면서도 어딘가 낙관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사랑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6)에서 이 스타일은 거의 완성된다.
“비가 내리자 /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 당신을 잊고 / 잠시 무표정하다가 / 아침을 먹고 / 잤다 //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 내 몸은 굳어갔다 // 한 사람을 살해하고 / 두 사람을 사랑하고 / 잠깐 울다가 / 음악을 들었다 //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 나는 금욕적이며 / 장래 희망이 있다 //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 그 후로도 오랫동안 /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좀비 산책’ 전문)
묘하게 슬픈 시다. 1인칭을 3인칭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면과 깊이와 원근법이 없어지지만, 덕분에 이상한 울림이 생겨난다. 접속사가 없어서 더 그렇다. 좀비가 부질없게도 ‘사랑’과 ‘장래 희망’을 말하고 있어 쓸쓸하고,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와 같은 접속사 없는 문장의 무심한 울림 때문에 더 쓸쓸하다. 이것이 이장욱 풍의 세계다. 낯익은 일상과 익숙한 수사학이 철저히 살균되어 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열기와 치기에 심드렁한 21세기형 모더니즘이다. 그가 “널 사랑해”(‘근하신년’)라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전혀 느끼하지가 않다. 그의 매력이다.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러시아 현대시 연구서를 펴낸 노문학도다. 아니다. 그는 당대 한국시의 첨단을 탐사한 평론들을 쓴 평론가다. 아니다. 그는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소설가다. 아니다. ‘픽션에세이’라는 이상한 장르를 만들어낸 에세이스트다. 아니다. 그는 본래 시인이다. 아니다…… 뭐랄까, 그는 그냥 ‘문학’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다. 그는 ‘외계인 인터뷰’라는 제목의 시와 평론을 쓴 적이 있다. 그는 마치 이 행성에서 행해지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의 실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외계인처럼 보인다. 농담이다. 지구인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장욱’이라는 이름의 문학은 계속 전진하라.(신형철|문학평론가)
07.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