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영화 <우아한 세계>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씨의 리뷰이다. 이미 기대 이상의 '물건'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2005)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한재림 감독의 두번째 영화이다. 데뷔작으로 사고 친 감독들의 경우 흔히 '두번째 영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감독의 경우엔 예외인 듯하고 여러 인터뷰 기사들을 보건대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필름2.0'에서 한 평자는 "한재림에게서 홍상수를 봤다"고 했는데, 왠지 '장르 영화의 홍상수'가 될 거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예감은 그렇다. 요즘 영화 <300>이 중년 남성 관객들로 만원사례라고도 한다. 나는 그 '근육질적인 세계'나 소위 '우아한 세계'의 이면을 이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의 횡단' 같은 것 말이다(문득, 동시대 문학이 이런 몫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러 리뷰들을 읽어봤지만 아래의 기사를 옮겨오는 건 '짧아서'이다.

문화일보(07. 04. 10) 조폭이나 화이트칼라들이나 약육강식에 휘둘리는 家長들

명백하게, 미국의 인기 TV시리즈 ‘소프라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는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소프나노스'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들어갈 때는 ‘소프라노스’였으나 나올 때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란 얘기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 사이의 얇은 막을 건너옴으로써 자칫 그렇고 그런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을 근래에 나온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게 했다.



‘소프라노스’처럼 ‘우아한 세계’ 역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한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의 좌충우돌 삶을 그린다. 중산층 가장과 조폭이라는 직업이 상충되듯이 영화의 이야기는 안과 밖이 사뭇 다르다. 바깥의 이야기는 이렇다. 들개파의 부두목급 중간 보스 강인구(송강호)는 얼마 전 수백억원의 이권이 걸린 건축 사업권을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 이 일로 그는 보스 노 회장(최일화)에게 다시 한번 두터운 신임을 얻지만 조직 내 또 다른 중간 보스이자 노 회장의 친동생인 노 상무(윤제문)로부터 심각한 견제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인구는 오랜 고향친구이자 상대편 조직인 자갈치파의 부두목 현수(오달수)로부터 사업권을 돌려달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같은 바깥이야기와는 달리 인구의 집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축으로 달린다. 집밖에서의 생활에는 살벌한 회칼과 각목, 쇠파이프가 난무하지만 일단 집안으로 들어오면 여타의 중년 가장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인구는 자신의 직업적 콤플렉스 때문에 보통의 가장들보다 더 주눅든 생활을 한다. 아이는 조폭인 아버지가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데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 온 아내 미령(박지영)은 그에게 줄곧 이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그는 투덜투덜 옷장에서 여분의 이불을 꺼내들고 마루로 나가기 일쑤다. 바깥에서도 칼 맞을 일 투성이지만 안에서 아내와 딸아이에게 맞는 마음의 칼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조폭영화(갱스터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형의 가족드라마를 뒤섞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의 중층적 모순을, 한 남자의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통해 보여주려는 일종의 리얼리티 드라마다. 영화는 특히 우리의 사회체제 자체가 가족의 해체를 유도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드러내려 애쓴다. 주인공 인구가 불안정한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 스스로 기러기 아빠의 삶을 선택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인구가 몸담고 있는 조폭의 세계는 우리 사회 자체를 은유하며 영화에서 ‘조폭세계=사회’는 그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다른 중간보스 노 상무가, 새로 따 낸 이권의 일부를 떡고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자 인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 알잖아. 회장님 드리고, 캐나다에 학비보내고, (조직) 애들한테 좀 주고, 그러면 나도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조폭의 삶이든, 시장통 날품팔이의 삶이든, 아니면 고급스러운 척 유세를 떠는 화이트칼라들의 삶이든, 알고 보면 그 원칙에는 큰 차이가 없다. 위의 놈한테 떼이고, 아랫놈들한테 떼이고, 자식과 마누라한테 떼이고 나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남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극단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의 삶은 피곤하다.



영화는 주인공 인구가 조직에서도 살아남고 동시에 집에서도 인정받는 가장이 되는 식의 상투적인 전개와 결론을 거부한다. 송강호의 독특한 난센스 유머감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아한 세계’는 그저그런 상업영화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리얼리즘영화라는 평가가 훨씬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영화평론가 오동진)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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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4-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 이상이라고 하니, 더 기대 ^^

로쟈 2007-04-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체의 와중에도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대견하기도 합니다...

hikrad 2007-04-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밤에 산책을 하는데 제 앞에서 건장한 남자가 갓난 아이를 안고 부인과 다정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핸드폰 소리을 듣게 되었는 데 이 남자가 조폭아니면 양아치 였는지 온갖 쌍욕으로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까꿍까꿍하더라구요.

순간 느꼈던 공포스러움이란....


로쟈 2007-04-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의 속을 들여다보신 셈이네요.^^;

마늘빵 2007-04-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 봤는데, 오 송강호가 영화를 제대로 빛나게 했더군요.

나비80 2007-04-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보려합니다. ^^

2007-04-11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성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 혹은 불행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이다." 저라면 그냥 그렇게 옮길 거 같습니다...

2007-04-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공부는 평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