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찾느라고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칼럼들을 몇 개 읽게 되었다. 그 중 우리 근대문학과 톨스토이에 관련한 칼럼은 '러시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육당과 춘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는다. 딱 3년전쯤 칼럼이다(톨스토이에 대한 박노자의 평가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최근 영어권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에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가 나란히 선정되어 '최고의 소설가'란 평도 얻은 톨스토이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이 칼럼의 초점은 '소설가'가 아니라 '사상가' 톨스토이이지만...

한겨레21(04. 02. 26) 너희가 '톨스토이'를 아느냐

근대 초기 한국에서 서구 중심 세계 체제로의 정신적 편입의 한 중요한 통로는 ‘서구영웅 기리기였다. 공자나 맹자가 그 빛을 잃고 ‘나파륜’(拿巴倫·나폴레옹), ‘비사맥’(比斯麥·비스마르크) 등의 ‘제국주의의 영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창간호(1908년 11월) 1면을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모습으로 장식하고, <나폴레옹 대제(大帝)전(傳)>을 연재한 육당 최남선의 잡지 <소년>과 같은 서구 중심주의적 계몽주의의 매체 자본은 물론, 황제 고종도 곽종석(郭鍾錫)과 같은 굳건한 유림들로부터 “나폴레옹을 고대 중국의 무왕(武王)보다 더 용맹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구 위주의 세계관에 일정 부분 포획되었다.  

톨스토이 수용, 한가지 수수께끼

그럼에도 가끔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선 소수의 서방인들이 세계적인 살육의 판도 속에서도 한국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대표적인 서방인으로 바로 현대의 평화주의와 반(反)국가주의의 원조로도 잘 알려진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였다.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식민지 시기의 말기까지 이어진 톨스토이 붐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 톨스토이 소개의 매개가 된 메이지 말기의 일본의 경우처럼,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근대 미증유의 폭력성에 환멸과 절망을 느낀 이상주의적 젊은 지식인들에게 살육과 증오가 없는 ‘대안적인 근대’의 길을 보여주었다. 톨스토이가 보여준 길이 꼭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 인도주의적 대안이 제시됐다는 것은 양심을 보유하는 지성인에게 반가운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신생>(新生)이라는 잡지의 창간호(1928년 10월)에 쓴 논설이 보여주듯,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폭정에 도전하여 박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빈농들과 살기를 실천한 ‘안빈낙도의 지사(志士)’, ‘직언(直言)의 선비’의 이미지와 부합된 톨스토이의 인격은 유교적인 심성에 젖은 근대 초기의 지성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한국 지식인들은 유교와 불교, 묵가(墨家) 철학 등의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톨스토이의 존경의 태도에 감탄하기도 했다. 예컨대 <조양보>(朝陽報) 제10호(1906년 9월25일자)에서 톨스토이를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소개한 한 개신 유림은, 그가 “맹자의 이상을 이룩하려는 세계 일류의 사상가이니 한국의 유림들도 자애 자중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처럼 되자는 것이 대다수 개화파의 소원이었지만 한국이 부득이하게 ‘먹히는’ 쪽에 속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이 ‘약육강식’을 부정하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보기 드문 존경심을 가진 톨스토이의 가르침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톨스토이 사상의 수용을 연구하자면 한 가지 수수께끼에 부딪히게 된다. 톨스토이의 저작 중 <기독교와 애국주의>(1894), <두개의 전쟁>(1898), <죽이지 말라>(1900), <러시아를 비롯한 기독교 민족들이 왜 곤궁에 빠졌는가?>(1907년 탈고) 등 말년의 논문들은 국가와 교회, 애국주의의 허상과 ‘문명’의 허망한 꿈, 과학의 권위 등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자 군대나 학교, 교회 등의 살육·노예화·기만의 기구들을 등지고 살라는 실천적 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100년 전의 톨스토이 저작물들을 읽어보면 많은 성역들이 이미 깨져버린 오늘에조차 그 탈(脫)근대주의적 과감함에 놀라게 된다. “유럽 정부들은 국회에서의 자유주의적 궤변이나 거리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위들을 엄청난 양보를 하는 척하면서 용납해도 병역 거부나 군비로 쓰일 세금의 납부 거부는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병역 거부야말로 모든 지배의 폭력적인 성격을 노골화하는 피지배자 해방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군사 존폐의 문제를 지배자들의 의지에 맡긴다면 전쟁이 더 끔찍해지지 끝날 리는 없다. 전쟁을 없애려면 지배자에 대한 공포나 지배자들이 제시하는 이득 몇푼 때문에 살인자들의 대오에 몸을 팔아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동시에,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병역 거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선각자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평화 회의와 관련해서>·1899)

국가와 폭력을 ‘과도기의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100년 전의 ‘주류’ 사회주의자보다도 톨스토이가 훨씬 더 철저한 근대의 이단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같은 군사주의적 ‘영웅’들이 ‘신민(新民)의 모범’ 대접을 받고 병역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의식됐던 개화기나 일제 시대에, 어떻게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급진파’ 톨스토이가 조선 지성계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톨스토이의 조선 초기 숭배자 중의 한 사람인 최남선의 사례를 들어보자. 나폴레옹의 신봉자로서 <나폴레옹 격언집>까지 잡지 <청춘>(제8호·1917년 6월)에 실은 육당이 어떻게 톨스토이를 동시에 숭배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근대국가에 대한 육당의 시종일관적인 선망을 아는 사람이라면 톨스토이를 1908~10년에 ‘예수 이후의 최대 인격자’, ‘대선지자’(大先知者), 공자와 같은 ‘부자’(夫子)로 불렀던 그의 태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육당의 “톨스토이 선생을 곡(哭)함”(<소년>, 제9호·1910년 12월)이라는 일종의 톨스토이 평전을 읽어보면 최남선의 톨스토이관(觀)이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靈)의 철학가’ 이미지만 만들다

최남선이 본 톨스토이는 금욕적인 생활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 미신이 아닌 이성에 근거를 두는 ‘신봉’(信奉·신앙)을 예수처럼 가르쳐준 ‘종교인’이었다. 즉, 그의 탐욕·폭력 극복론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닌 원론적인 종교적 이상이라는 것이 톨스토이 사상에 대한 육당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영(靈)의 철학가 톨스토이’ 이미지를 만들려는 최남선은 병역 거부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어디까지나 불가피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는 육당이었기에, 전쟁을 일으킨 러·일 양쪽 정부가 다 강도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톨스토이 러일전쟁 반대의 서한(1904년 8월7일자로 일본의 사회주의자 기관 <평민신문>에 게재)도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친일적 성향의 신예 개화파가 톨스토이의 탈근대적 대안을 추상화·종교화해서 병역 거부·국가에 대한 불복종 호소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적인 핵심을 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과 같은 개화 잡지에서 나폴레옹의 ‘격언’과 톨스토이의 ‘교훈’이 옆자리에 나란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온건’ 지성인들에 의해 종교화돼 ‘개인 수양의 이념’으로 탈바꿈돼버린 톨스토이주의의 비극…. 물론 톨스토이주의의 주된 ‘강령’으로 “군직(軍職)에 들어가지 말라”(즉, 병역 거부해라)는 것을 든(<개벽>, 제9호·1921) 진보적 천도교인 박달성(朴達成·1895~1934)과 같은 급진적 언론인이나, 지배계급을 ‘기생충’에 비유한 톨스토이의 노동중시론을 선호했던 1920년대 국내외의 조선 아나키스트 등은 사회·정치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스승으로 생각했지만, 이광수와 같은 부류의 ‘주류’ 예속 부르주아층의 논객들에게 톨스토이주의는 다만 비정치적인 ‘인격 수양’ 또는 ‘개량된 기독교 윤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닌 톨스토이의 대안 담론을 근대적 국가주의의 지배 담론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최남선과 이광수식 이해를 넘어

그들의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러시아 밖에서 톨스토이가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큰 권위를 지닌 나라들 중 하나인 한국에서 톨스토이 사상의 가장 핵심인 병역 거부와 국가주의에의 절대적 반대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작품들이 ‘교양인’에게 거의 필독으로 돼 있지만, 군대와 국가를 부정하는 그의 논문들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남선과 이광수식의 톨스토이 이해의 한계를 우리가 언제 넘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접어든 우리가 아직도 100년 전의 친일적인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참고 사이트 ]
1.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디지털판(러먼)
http://www.lib.ru/LITRA/TOLSTOJ/
2.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영역(英譯)의 디지털판
http://www.ccel.org/t/tolstoy/
3. 톨스토이 저서의 영문판과 여러 관련 영상들
http://www.selfknowledge.com/431au.htm
4. 톨스토이의 영문 전기와 일부 저서의 영문판
http://www.literatureclassics.com/authors/Tolstoy/
5. 톨스토이 학보(영문 학술지- 토론토대학교·캐나다)
http://www.utoronto.ca/tolstoy/

07. 03. 01.

P.S. 그러니까 좀 균형잡힌 톨스토이 수용을 위해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이야기만 읽을 게 아니라 <사랑의 법칙과 폭력의 법칙>(아웃사이더, 2004) 같은 책들도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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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1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이것도 여러 친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었는데, 이제 비교문학 협동과정이 개설되었으니, 많은 '협동'을 통해 탐구되어야 할 지점이겠지요.

로쟈 2007-03-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협동과정'에서 톨스토이(러시아 근대문학)에 관심있는 대학원생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들어봤는데요.^^;

기인 2007-03-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국 근대문학 전공하는 친구들 중에, 무교회 운동 우치무라 간조와 톨스토이 등에 관심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저도 1920년대 톨스토이에 대한 인식에 관심 있습니다. :)

소경 2007-03-1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같은 이야기만 아는 처지가..부끄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