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학술저널 '담비'(http://www.dambee.net/)에서 학술동향기사 한 편을 옮겨온다. '한국사회학'에 게재된 한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도 기사의 부제로 붙어 있는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문화적 모더니티의 세계감 분석'이 그 논문의 제목인 듯하다. 사회학 논문으로서는 이채로운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흥미로운 주제이고 분석이다.

담비(07. 02. 24) 멜랑콜리, 우울한 토성의 아이들

세계관, 인생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감(世界感)이라는 단어는 뭘까. 최근 문화적 모더니티를 연구하는 논문에 자주 등장하게 될 단어다. 프랑스에서 국내 사회학자로서는 드물게 영상사회학 이론을 전공하고 돌아온 김홍중 박사의 논문은 문화적 모더니티와 관련한 첨단의 인식론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도 매우 알기 쉽고 유려하게 인식의 깊이와 이론적 해박과 서술의 겸손함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가 '한국사회학'  제40집 3호에 발표한 '멜랑콜리와 모더니티'는 이 '세계감'이라는 낯선 용어로 인간의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어느 날 파리의 한 유명한 신경전문의에게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세기병"에 시달려 살고픈 의욕이 거의 없으며, 기분이 늘 침울하고 항상 권태롭다고 털어놓았다. 의사는 걱정말라고 다독인뒤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드뷔로의 공연을 보러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인생이 달라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드뷔로는 19세기 프랑스 무언극 배우로 명성을 떨쳤는데, 천진하면서도 슬픈 웃음을 자아내는 현대적 광대의 원형을 창조한 배우다. 그런데 의사의 말에 대한 환자의 답이 가관이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바로 드뷔로입니다."

이상은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의 '권태, 영겁회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드뷔로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중세의 광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의 신랄한 재담과 파괴적인 농담 그리고 과장된 몸짓과 가면 뒤에는, 종종 사태를 명증하게 파악하는 비판적 지성의 단초 혹은 이러한 지성의 소유자가 '어리석은' 세계에 대해서 가질 법한 깊은 상심이 은폐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위의 일화에 숨은 더 심각한 것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울을 풀어주는 광대마저 우울증에 걸린 난감한 상황이다. '세기병'이라는 표현은 우울이 이제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사나의 세계감(感)으로서 존재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성의 원천'으로서의 멜랑콜리. 이것이야 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이 시대의 질병이며, 우리로부터 명령과 복종과 행동과 희망의 용기를 앗아간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지적한 바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세계감이 사회의 모든 부면에서 성취된 전례 없는 혁신에 대한 자신감과 낙관 위에 설립된 근대의 진보적 세계관의 필연적인 그림자라는 것.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막스 베버)를 만들었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까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지금껏 온갖 학문들은 근대적 세계감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인 이 토성적 감정의 발생과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다. 멜랑콜리는 대다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임이 점점 분명해지는데도 말이다. 김 박사는 이 지점에서 그것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하이데거의 '정조'(Stimmung) 개념을 끌어온다.

역시 서구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하이데거가 192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겨울학기 강의에서 던진 질문은 참으로 멋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사유를 뒷받침하는 감정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무엇인가. 이성의 추리와 전개로 구축되는 철학의 기저에 특수한 감정의 상태가 놓여있다는 인식, 즉 로고스와 파토스의 위계를 전도시키는 시도가 담겨있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통해 '사유'와 '의지'에 늘 종속되어 있던 '느낌' 즉 감정의 질서를 학문적으로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가장 유명한 개념은 다자인(현존재, Da-Sein)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바로 그것. 세계 안에 던져진 유한자는 자신앞에 펼쳐지는 무한한 가능성과 직면하고 있는 자기형성적인 주체이다. 하이데거는 다자인을 다자인으로 만드는 것은 코지토가 아닌 정조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권태, 환희, 불안의 정조를 분석했으며, 정조란 다자인이 세계와 화음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세계의 객관적인 음조와 주체의 음조가 섞이고 부딪히고 조정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음역(音域)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조가 사유보다 근원적인 체험의 양식일 때, 사유라는 상부구조는 자신의 전(前)-사유적인 하부구조로서 감정적 차원을 갖게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을 가능케한 것은 '경이의 감정'이었고, 데카르트적 근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의혹의 정조'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조차 20세기의 사유를 규정하는 본원적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차갑고 냉정한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정조가 압살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근대적 사유의 근원적 정조는 느낌의 불가능, 열정의 불가능, 파토스의 불가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적 사유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조는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그 퇴행과 은폐이며 감정의 원초적 폭발이 아닌 소멸이라고 말이다. 니체가 근대문화 일반을 데카당스라 부르며 그토록 폄하했던 이유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뛰어 넘어 초월적인 것과 소통하는 고양의 체험에 동반되던 비극적 감정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초엽의 인간들은 이러한 존재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인 주체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를 분절하고 측량한다. 반면 권태롭고 우울한 우울자들은 그가 대면할 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하고, 세계를 분절할 수 있는 경계를 상실한 이들이다. 그는 정서의 욕동을 단호하게 억제하면서 미래를 투기하지 못하고, 토성적 정조에 사로잡혀 현실원칙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욕망의 노마드다.

근원적인 내적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파편들을 끊임없이 섭취하고 내면화하는 일종의 복합적인 식인증적 주체와 조응하는 멜랑콜리의 세계, 이것은 하나의 '기호학적 폐허'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물신으로 구성된 파편적이고 환몽적인 세계와 식인증적 주체의 변증법적 관계를 더 들여다보면 놀라운 역설이 발견된다. 토성적 정조의 근본적 징후인 '식인증'은 어떻게 보면 '우울증적 전략'이라 부를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에르 페디다(Pierre Fedida)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심화시키면서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에 따른 퇴행적 반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실된 대상을 살아있게 만드는 몽환적인(또는 환각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이걸 좀더 명료하게 요약한다. 토성적 정조는 무언가의 상실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사실은 상실을 인식하고 상실을 문제시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사실. 무언가를 상실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에 상실을 인지하고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계내의 기호들을 삼킨다는 것이다. 우울자는 그가 단 한번도 소유해 본적이 없는 '그것'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의 회복을 끝없이 '연기'(延期)한다고 말한다.

사실 우울자에게, 진정한 소유의 대상은 바로 상실감 그 자체이다. 이 대목에서 아감벤은 "식인증이란 이처럼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상실된 것으로서' 나타나게 하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재현불가능한 것으로서 표상되게 하며,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알레고리적으로'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토성적 정조의 전략"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사회적 모더니티가 빠른 속도로 일소해버린 초월적 가치들과 대상들, 즉 사유의 타자들을 문화적 모더니티의 영역에서 생존시키려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김 박사는 부언한다. 신은 죽었지만 '죽은 신'은 하나의 형식으로 살아남고, 예술도 죽었지만 '죽은 예술'은 하나의 이상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소멸한 총체성은 가능성의 범주로서 살아남고 이들 앞에서 우리는 우울하다.

초월적 가치를 아직도 신앙하는 자는 우울하지 않다. 또한 이들이 완벽하게 소멸되었다고 믿는 자 역시 우울할 수 없다. 우울자는 그 중간에 머물면서 '소멸됨으로써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끝없이 추구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인이 바로 보들레르이다. 릴케 같은 이도 '두이노의 비가'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은 존속한다. 영웅의 추락은 단지 존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김 박사는 결론에서 "근대적 로고스의 타자를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사유의 형식 안으로 포섭하는 문화적 모더니티의 심연적 성찰성의 근저에는, 하이데거가 권태라고 불렀던 근대적 형이상학의 근본 정조, 즉 토성적 정조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패기만만한 진보주의자들과는 달리, 어둡고 우울하지만 한층 더 심오한 정신적 역설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리뷰팀)

07. 02. 25.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1929/30년 겨울학기 강의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까치, 2001)로 번역돼 있다. '우울증'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책은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동문선, 2004)인데 기억에 딱히 '모더니티'를 특화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페디다의 <우울증의 유익>도 소개되면 좋겠다.

마침 '모더니티'와 관련해서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앙리 르페브르의 <모더니티 입문>(동문선, 1999), 앙리 메쇼닉의 <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동문선, 1999), 그리고 에른스트 벨러의 <아이러니와 모더니티 담론>(동문선, 2005) 등이다. 물론 모더니티 관련서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적어도 20여 권의 목록이 꾸려질 수 있다). 개인적으론 미술 관련서로 칼리니스쿠의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시각과언어, 1998)까지 챙겼으면 하지만 아마도 박스에 들어가 있는 듯싶다(이 책은 일종의 사전이다). 그 다섯 얼굴에 모더니티의 주된 정조로서 '우울한 표정'을 더 보태면 되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2-25 10:48   좋아요 0 | URL
이런 사이트도 있군요. 즐찾에 넣어놔야겠어요.

싸이런스 2007-02-25 12:24   좋아요 0 | URL
"근대적 사유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조는 파토스의 분출이 아니라 그 퇴행과 은폐이며 감정의 원초적 폭발이 아닌 소멸이라고 말이다" 감정이 소멸되면 인간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마저 불구화 되기 때문에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는 이론(Damasio, Antonio)을 생각한다면, 소멸이라기보다는 apathy의 정조가 아닐까요.

로쟈 2007-02-25 12:39   좋아요 0 | URL
아프님/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어가보시면 됩니다.^^
싸이런스님/ 사실 분출구가 없는 건 아닌데요. 스포츠나 카니발 같은 걸 보면. 문제는 그러한 '폭발'이 '근대적 사유'에는 은폐/소멸돼 있다는 것이고, 말씀대로 그때의 '소멸'은 냉담과도 대치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논문은 안 읽어봤기 때문에 맥락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포커 페이스 같은.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논문이라는 담론'의 형식이 요구하는 게 바로 apathy이죠...

싸이런스 2007-02-25 14:17   좋아요 0 | URL
그래서 논문 읽는게 글케 지루하나보군요. ㅠ.ㅠ

주니다 2007-02-25 20:31   좋아요 0 | URL
P.S.에서 언급하신 동문선의 책들 번역 상태는 어떠한지요? 멜랑콜리와 모더니티는 흥미롭고도 계발적인 주제인 듯 하네요. 이 주제와 관련된 로쟈님의 페이퍼를 기대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5 20:45   좋아요 0 | URL
저는 페디다의 책이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르페브르의 책은 영역본을 곧 구할 생각이구요, 메쇼닉의 책은 일부만 복사했습니다(영역본이 없어서요). 일견 번역이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검은 태양>은 원저나 영역본과 같이 읽어야 하구요, 벨러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리니스쿠의 책은 읽을 만하지 않았나 싶은데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007-02-2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6 12:25   좋아요 0 | URL
**님/ 감사.^^ 인문서가 잘 안 나간다는 건 거의 '기본조건'인지라 이유가 안 될 거 같구요, 책은 '고집'으로 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사장님'처럼 고집만 있어도 문제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