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사회적 독서'란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내가 하는 일은 매달 네 권의 책을 선정하고 그걸 '광고'하는 일이다. 구매를 권유하고 여차하면 독서를 권장하는 일. 2월의 목록에 올려놓은 책 중에 문화평론가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강, 2006)가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에 빗대어 말하자면, '아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개인을 보다'쯤에 해당하는 책이다.


실제로 책의 8할은 대중문화, 특히 영화에 대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나머지는 인터뷰이다(저자의 인터뷰집으론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강, 2004)가 있다). 저자는 현재 '씨네21'에 3주에 한번꼴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데, 지난달에 그가 올린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나의 취지야 물론 한번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자칭 진보이자 B급 좌파' 김규항이 글을 쓰던 자리에 '합리적 진보'를 고민하는 남재일의 글이 겹쳐놓이는 것도 담론의 공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변화이다. 이 변화는 트렌드일까?
아래 두 칼럼에서 필자는 얼핏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합리성'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겹쳐놓으면 한 가지이다. "다만 현재의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 무엇"을 그가 '합리적 진보'라고 말할 때, 그 합리성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서의 합리성이 아니라 고학력자도 점집을 찾게 만드는 '위안의 해석학'으로서의 합리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자 지망생들이 "조선, 동아는 ‘정파성이 부담스러워서’ 기피하고, 한겨레는 주로 ‘월급이 낮아서’ 기피"하는 합리성이 거기에 해당한다.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의 '모호함'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남재일의 개인주의가 존중하는 가치가 바로 그 모호성이며, 나대로 이름붙이자면 '좀스런 이성의 간계'이다. "도그마에 대한 거부는 이념의 내용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는 방법론에 대한 거부이다."라고 그가 말할 때, 도그마란 '대문자 이념'에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이념에 대한 열광은 가슴 한 구석에 보존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지!'란 속좁은 '확신'이 '좀스런 이성의 간계'의 바탕이며 개인주의의 물주이다. '칼같지 않은' 그의 뜨뜻미지근한 칼럼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런 개인들의 총합으로서의 사회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이다...
씨네21(07. 01. 05)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합리적 진보
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입사 희망 언론사를 적어내라고 했다(*필자의 전공은 언론학이며 현재 한국언론재단에 몸담고 있다). 매체 구분 없이 3순위까지 적힌 희망 언론사 유형을 5년 정도 모아보니 일정한 패턴이 있다. 다수의 학생은 일단 지상파 방송을 1지망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 2, 3지망으로 신문을 선택할 경우 조중동과 한겨레신문이 많다. 신문을 1지망으로 할 경우는 중앙일보가 많다. 그 다음은 한겨레신문이다. 조선, 동아는 2, 3지망에 많다. 종종 자신이 지망하는 언론사가 아니라 기피하는 언론사를 적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 동아 제외’, ‘조선 제외’, ‘조선, 동아 및 한겨레 제외’, ‘한겨레 제외’ 등이 많다. 이들을 면접해보니 조선, 동아는 ‘정파성이 부담스러워서’ 기피하고, 한겨레는 주로 ‘월급이 낮아서’ 기피한단다. 중앙일보만 기피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중앙일보는 기자 지망생들에게 ‘합리적 진보 내지 중도’로 자리매김해 있다. 실제 논조는 그보다 보수적이다. 그런데 실제보다 더 진보적으로 비친 것은 왜일까? 여러 이유로 ‘조선, 동아 및 한겨레’를 제외하고 싶은 욕구가 투사됐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사정은 학생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내가 본 한 신문사의 독자조사 결과에 보면,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이 생각하는 ‘합리적 진보’에 가장 가까운 신문은 중앙일보라는 응답이 많다(*필자는 중앙일보 기자로 10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여기서 ‘합리적 진보’는 뭘 지시하는가? 지시하는 구체적 내용이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합리적 진보’는 다만 현재의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 무엇을 말할 뿐이다. 지향점없이 추진력만 있는 상태! 현재에 대한 부정은 있되 미래에 대한 긍정이 없는 상태!
이명박 대세론의 진원지도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한겨레21>이 최근 40대 500명을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40대는 왜 이명박 대세론에 빠졌나’에 따르면, 이명박의 지지율은 55%로 초강세다. 이명박의 지지자 중 62.6%는 ‘앞으로 계속 지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지지층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거다. 대선 결과야 내년 가봐야 아는 것이지만 현재 이명박이 누리는 인기는 ‘합리적 진보’라는 지향없는 추진력을 흡수한 결과가 아닐까? 이명박의 정치적 위치는 ‘합리적 진보’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현재의 40대가 이명박 지지층을 형성하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자는 말한다. 강고한 보수적 정서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가 진보 정권의 미진함을 계기로 용수철처럼 회귀하는 것이라고. 이 시각은 한국의 이념 지형을 진보와 보수로 이원화하고, 이명박=한나라당=보수로 등식화한다. 이 진보의 도그마는 이명박이 중도에서 시작해 보수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열린우리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지지층이 이명박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진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화되는 것이기보다는 진보든 보수든 강고한 정치 도그마에 대한 거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도그마에 대한 거부는 이념의 내용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는 방법론에 대한 거부이다. 만약 그렇다면, ‘합리적 진보’로 표상되는 대중의 정치적 욕구를 수렴하려면 진보와 보수 그 어디쯤에 점을 찍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이념과 현실 사이 그 어디쯤에 나를 위치시킬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를 뉴라이트로 개명하는 시간에 ‘도덕적 보수’를 생각하고, 진보의 도덕성을 홍보하는 시간에 ‘합리적 진보’의 방법론을 생각하는 것 말이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 도그마를 확신하는 사람은 쉬이 ‘지금’과 ‘내가’의 함정에 빠진다. 지금 당장 변해야 하고,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세상에 대한 헌신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한 조급증 때문인 것 같다. 격렬한 정파성의 본질은 대의와 역사의 탈을 뒤집어쓴 집단적 욕망이다. 한국사회의 정파성은 보수일변도의 불구에서 균형을 향해 회복되는 과정의 산고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하게 특권화된 정치 도그마는 공론장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합리적 진보’와 ‘이명박 대세론’이라는 기표는 이제 도그마를 거부하는 또 다른 사회적 기운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씨네21(07. 01. 2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음악카페)-(사주카페)=0
압구정동에 사주카페가 성업 중이라고 한다. 고객의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받은 20~30대라고 한다. 점치는 성향은 대략 학력과 반비례하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역술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한국에서 가장 점을 안 치는 부류는 농부들이다(어부나 광부도 마찬가지일 게다). 가장 점을 자주 보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들이다(정치가나 연예인도 여기 속하지 않을까?). 그에 따르면 점치는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결정적 변수는 학력이 아니라 직업의 성격이다. 나는 이 경험적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농부가 점을 안 치는 건 점을 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노동의 성패는 자신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 변수가 있다면 돌발적인 기상 상황이다. 이 사태는 농부 개인의 힘으로 예방이 어렵다. 그래서 농부는 미래를 알고자 하는 대신 좋은 미래를 무작정 기원한다.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우제는 일종의 기도이다.
하지만 사업가나 정치가는 노동의 성패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 그리고 부침이 심하다. 당연히 불안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에 의지하는 농사와 달리 사회관계에 의지하는 생업의 속성상 자신의 처신이 미래의 사태를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기 쉽다. 역설적이지만 나의 처신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최적의 처신에 대한 강박이 깊어지고 실패에 대한 불안도 깊어진다. 그러니 안개 자욱한 교차로에서 효율적 처신의 길을 묻는 사업가가 점괘를 갈구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사업가에게 점은 수정 가능한 미래를 내 손으로 기획하고자 하는 계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점집을 찾는 모든 사람이 사업가처럼 현실적 지침을 찾는 건 아니다. 박사학위 소지자인 아줌마 Y양은 건강검진받는 빈도보다 좀더 자주 점집을 찾는다. 그녀는 점집을 옮겨다니며 과거에 대한 해석과 미래의 전망을 탐문해왔다. 그녀가 자주 점집을 옮기는 것은 사주풀이의 진실성에 대한 비교확인의 동기도 있지만, 자신이 들은 스토리의 수준이 양에 차지 않아서이다. 그녀가 듣고 싶은 ‘풀 스토리’는 그간의 불운을 팔자로 환원하고 미래의 희망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주는 상투적인 해피엔딩의 드라마이다.
나는 그녀의 비합리성에 대해 힐난조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사주풀이를 하는 것이 내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겐 도움이 된다. 듣고 싶은 얘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대가로 나는 돈을 지불한다. 사주풀이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남자들이 폭탄주 돌리는 것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무해하다.” 그녀에게 점은 위안의 해석학일 뿐이다.
사주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젊은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언제나 하나의 역할과 기능으로만 자신을 호명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건 마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 속 세트에서 사진 촬영을 하며 영화 속 판타지를 잠시 체험하는 즐거움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종종 사주카페를 비합리성의 온상처럼 보는 글을 접할 때가 있다. 거기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을 한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이도 있다. 나는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것보다 그걸 비과학적 태도의 상징으로 보는 편협한 사고가 더 한심해 보인다. 합리성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도구적 가치이지 삶을 위한 가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합리성을 인간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본원적 가치로 전제하는 것은 아마도 고용자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고용자의 눈에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청춘들은 효율적 생산을 위해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할 시간을 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게다. 고용자의 눈은 애초에 제도 속의 인간이 아니라 제도의 효율적 작동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도 아니면서 고용자의 눈을 가진 사람들, 어찌 보면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놓쳐버리는 가장 가련한 외눈박이일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사주카페를 차디찬 합리성의 세계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잠시 녹이는 화로로 봐주는 사소하고 따뜻한 눈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07. 02. 08.
P.S. 참고로,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에서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정신적인 귀족'의 불안과 고독의 출전은 '씨네21'이다(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28645). 지난 2005년 2월에 <그때 그 사람들>을 놓고 벌인 두 사람의 좌담인데, 나로선 80년대 초반학번들이 (40대 중반이 된) 현재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건 <오래된 정원>을 놓고 역시나 같은 지면에서 얼마전 영화평론가 변성찬과 임상수 감독이 나눈 좌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