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0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독일문학기행시 헤세의 고향 칼브를 방문했던 일을 계기로 가방에 넣어갔던 책들 가운데 <크눌프>에 대해서 적었다. 한때 국내에서는 <데미안>,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를 갖는 작품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주간경향(18. 11. 05) 고향을 떠나 새 고향을 찾는 방랑자
헤르만 헤세의 고향 칼브를 찾았다. 칼브는 남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이 고장이 배출한 문호에 대한 배려와 자부심이 도드라져 보였다. 헤세 문학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헤세가 다녔던 길 곳곳에 ‘헤세의 길’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그의 시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작은 마을이어서 헤세가 다니지 않은 길이 따로 있을까 싶지만 작가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만큼 칼브는 헤세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헤세는 칼브에서 태어나서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매일같이 건너 다녔다는 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다리 중간에는 노년의 헤세가 마을을 지긋이 바라보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고 나중에는 스위스로 국적도 바꾸지만 헤세가 다른 곳과 바꿀 수 없었던 고향이 칼브였다. 칼브에는 헤세의 동상과 함께 그의 작품 주인공으로는 유일하게 크눌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크눌프>(1915)의 주인공으로, 한때 <크눌프>는 한국 독자들에게 <데미안>만큼 많이 읽힌 작품이다.
칼브라는 이름이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헤세의 자전소설 <수레바퀴 아래서>(1906)가 칼브를 배경으로 하기에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의 동상을 만날 법했다. 하지만 칼브의 상징은 푸근한 방랑자의 모습으로 거리에 서 있는 크눌프였다. 실제로 헤세 자신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칼브를 다시 찾았을 때 고향의 거리 곳곳에서 살아있다고 느낀 존재가 크눌프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눌프와 고향을 하나로 느꼈다고 하므로 크눌프가 곧 칼브인 셈이다.
시인이자 방랑자인 크눌프는 안온한 삶에 대한 거부자다. 병이 들어 무두장이 친구의 집을 찾아와 신세를 지지만 성실한 장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내가 꾸리는 가정을 그는 동경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의 목표나 행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부모도 낯선 존재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최고의 사랑을 베푼다 하더라도 부모가 영혼까지 물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집을 떠난다.
다른 한편 크눌프의 천성은 모든 사람에게 친화적이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다.” 작품의 결말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라고 자책하는 크눌프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고향을 떠났지만 크눌프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방랑자다. 고향 상실의 시대가 근대라면 크눌프는 근대적 개인에 대한 자각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이 서로에게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는 세계를 지향한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크눌프>가 의미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면 그러한 지향이 크눌프나 헤세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18.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