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11-2년쯤 전에 잠깐 써둔 걸 옮겨놓는다. 아침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관한 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3704.html)를 읽다가 예전에 만든 자작시집을 집어들게 됐는데, 거기서 다시 읽어본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이 대표작도 국역본들이 대부분 품절/절판돼 있다. 작년에 나온 김용일 교수 번역의 <죽음에 이르는 병>(계명대출판부, 2006) 정도가 추천도서로 올라와 있다. 제목의 '형이상학적 질병'은 개인적인 관용구이기도 한데,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불안)과는 좀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도 없지는 않겠다.

 

 

 

 

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런 성격을 물려받은 것이겠지. 그런 걸 두고 의리가 없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친구들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걸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는다. 간섭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는 것이 모종의 원칙처럼 돼 버렸다.

연극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가족중심주의와 종족(민족)중심주의를 내가 혐오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런 건 박테리아나 말미잘도 다 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새끼 잘 되라고, 자기 집안 잘 되라고 분투하는 일 말이다. 단지 인간이란 종은 조금 현학적으로 그런 일을 할 따름이다(현학적인 말미잘!).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이건 모든 생물학적 종들이 지닌 자연사적 소명에 대한 일조으이 연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좋다. 그래서 감동적이기도 하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고작 그게 전부일까, 하는 의혹이 생기면서 인상을 찡그리게 되고 속이 거북해진다. 이걸 나는 '형이상학적 질병'이라고 부른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좋은 쪽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옛날의 병이 도지는 것이다.

시나 소설에서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대목이 나오면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는 '이거 아주 쓰레기는 아니군!'이란 생각을 한다. 두 개만 여기에 적어보겠다.

 

 

 

 

파니는 아이가 마음을 다칠까봐 신중학 처신을 해야했고, 그래서 고추를 넣어줄 때도 싱싱한 것으로만 골라주었다. 자기 아들이, 어느날 아침, 고추 네 개 중에서 쭈글쭈글하고 빛이 바랜 묵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일로 아이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맛볼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파니는 생각했다.(봉그랑, <밑줄 긋는 남자>)

 

 

 

 

절름발이 개미가 나서서 해명한다. 그의 이야기로는, 바위냄새 풍기는 병정개미들은 '악성 스트레스를 막는 병정개미들'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에는 유익한 스트레스와 악성 스트레스가 있는데, 유익한 스트레스는 겨레를 발전시키고 사기를 북돋아주지만, 악성 스트레스는 겨레를 자멸에 빠뜨린다. 정보들 중에는 겨레에 알리지 않는 편이 나은 것도 있다. 이런 정보들은 '형이상학적인' 고뇌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고뇌에는 아직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겨레는 고민만 하고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기력이 쇠잔해진다.(베르베르, <개미>)

07. 01. 12.

P.S. 키에르케고르는 '악성 스트레스를 막는 병정개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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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키스트 2007-01-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중심주의에는 저도 꽤나 뒷걸음질 치는 편인데요.. "내 새끼, 내 가족 잘되라"는 식은 그래도 나아요. "내 새끼만 잘되라"에 비하면 말이지요...그리고 '형이상학적 질병', 그거 아마 불치병일걸요..^^

로쟈 2007-01-1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불치인 건 특권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원숭이와 구별해주는 종차. 호모 사피엔스를 그래서 저는 '호모 사피엔자'라고 부릅니다(사유능력은 인플루엔자 같은 거라서)...

깽돌이 2007-01-1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어린시절 이야기 들으니...저도 남자애로서(!) 싸움을 잘 하고 싶은데(물론 어릴때^^)시도조차 안해본것이 한이 된듯합니다.

로쟈 2007-01-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에 제가 바둑은 쌈바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