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대개 한겨레를 사서 보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지면에서 읽는 건 드문 편이다. 그래도 내일을 한 부 사서 읽어봐야겠다. '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꼭지 때문이다. 최근 한중일 3국 합작으로 제작하고 안성기와 유덕화가 주연한 영화 <묵공>이 상영중인 걸로 안다. 관심을 갖던 차에 며칠전 한 사이트에서 영어자막으로 된 영화를 다운받아서 초반부만을 봤는데, 기사에서는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묵자/묵가의 사상에 대해서 유례없이 긴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설마 지면에 다 실리는 것일까?). 필자의 열기가 느껴지는 기사이다. 일독해 볼 만하다(묵독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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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7. 01. 11) <묵공>이여, 당신의 꿈이 만든 집단자살극을 아는가
'묵자' 읽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3, 4년 전이니 공교롭게도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것과 때를 같이한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다. 책을 정리하다 읽지 않고 두었던 <묵자>를 발견하고 펼쳐본 것이 계기였다. 첫 장부터 눈길을 사로 잡았다. 평등과 기득권타도, 분배를 외치며 집권한 노무현정부에 대한 기대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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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초의 '낙원'을 꿈꾸었던 묵자. 2,500년 전 그는 꿈은 정말 멋지고 원대했다. 차별 없는 하늘같은 나라. 내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겸애(兼愛)는 500년 후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계급차이 없이 가진 것을 골고루 나누고 아껴쓰는 절검(節儉)은 마르크스의 사회ㆍ경제 사상과 다르지 않았다.
중국 천하가 갈갈이 찢기어 언제 오늘의 형제가 적이 돼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에,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전쟁으로 피냄새가 마를 날이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홀연히 '반전'구호를 과감히 들고나온 좌파의 시조. 그는 스스로를'북방의 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봉건제도와 계급사회에서 고통 받는 백성에 눈을 돌려 기존의 신분사회를 기반으로 한 철학인 유학 대신 '겸애'를 주장하며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자신이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면 끝까지 행하는 사람'이었다. 낡고 검은 옷에 맨발로 천하를 돌며 이웃 사랑을 외친 운동가이자 묵가의 교주였다. 전쟁에 지치고, 가난에 신물이 난 백성들은 열광했다. 그들을 향해 그는 외쳤다.
“하늘은 우리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한다. 그 은혜를 저버린 자는 어김없이 천벌을 받으리라. 하늘을 숭배하는 자, 하늘의 두려워하는 자, 하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 하늘의 이치를 본받는 자는 성(盛)하리라. 그의 혼은 하늘에 있으리라. 하늘을 비웃는 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하늘을 배반하는 자는 멸(滅)하리라. 몸뚱이와 영혼이 함께 땅에서 썩어 흔적조차 사라지리라.”
“하늘은 가름(差別)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곳, 모든 생명에게 비와 이슬을 내려주고, 빛과 바람을 맞게 한다. 이것이 하늘의 마음이다. 천하는 큰 나라 작은 나라 할 것 없이 '하늘'의 고을이다. 어리고 나이 많고 귀하고 천한 구별 없이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가는 터럭이라도 할지라도 하늘이 만들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천하를 아울러 사랑하고 이롭게 하지 않겠는가.
“가름은 사람에게서 나왔다. 탐욕이 세상을 갈라놓고, 전쟁을 만들고, 빈부를 만들고, 계급을 만들었으며 귀함과 천함을 구분 지어 놓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이 가름을 없애는 일이다. 가름을 없애기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힘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바른 도(道)를 알고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재물이 있으면 서로 나눠주라.”
이 얼마나 멋진 주장인가. 인류가 꿈꾸는 지상낙원의 모델을 보는 듯했다. 정말 인류사에 감춰진, 불운하게도 덜 알려진 위대한 사상이 여기에 있었구나. 본격적으로 <묵자>를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묵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묵자를 언급한 중국 고전들을 찾았다. 이런 위대한 사상가를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니. 노무현정부는 뭘 하나. 자신들의 통치철학이 될 수 있는 모델이 여기에 있는데…'
고전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는 그것을 현실과 끝없이 비교하는 일일 것이다. <묵자>도 그랬다. 기존 세력과 가치관(유학)에 대항하며 변혁을 꿈꾸는 묵자의 외침은 그 반역의 강도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마치 노무현의 좌파정부가 처음 그랬듯이(*이 좌파정부에는 따옴표를 붙여야 하지 않을까?).
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외쳤다. “의로움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며 천하의 보배다. 의로움은 어리석고 천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귀하고 지혜로운 것에게서 나온다. 그럼 무엇이 귀하고 지혜로운가. 하늘이 귀하고 하늘이 지혜로울 다름이니, 의로움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의로움을 행하기가 불가능하더라도 절대 그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목수가 나무를 깎다가 잘 되지 않는다고 먹줄을 버릴 수는 절대 없다. 이를 따르는 것이 '천의'(天義)다.”
묵가는 확신주의자들이었다. “칭찬 받으려 의를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가는 것이 진실로 올바른 도라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입으로만 그러지 않고 몸소 실천했다. 목수 출신인 묵자 스스로 몸에 따라 옷을 입고, 배나 채우려 음식을 먹으며 떠돌아다니는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음악을 부정하고, 전쟁이 있는 곳이면 열흘이 걸리더라도 달려가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김학주 교수는 그의 저서 <묵자, 그 생애·사상과 묵가>(명문당 펴냄)에서 그런 이들을 이렇게 규정했다. "지배자의 비위를 건드리고 시대조류를 어기며 낮은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격한 주장들을 내세우고, 또 자기 희생을 무릅쓰며 그러한 주장들을 실천하였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 없이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묵가는 묵자를 정점으로 받드는 조직적인 집단을 이루어, 그 집단의 주장과 조직을 위하여서는 자기 희생을 가벼이 여기며 일사분란하게 단결하였으니, 이것도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묵가라는 종교의 교주였고, 그의 사상은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묵가는 단순한 학파가 아니라 당시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종교집단이기도 했다.”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묵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인류 최초로 기록될 끔찍한 종교적 집단자살극이. BC381년의 일이다. 이날의 사건을 소설식으로 꾸며보면 이렇다. 맹승은 '검은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거자(巨子)다. 그는 친한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한 초나라 양성군의 부탁으로 제자 183명과 함께 그의 성을 지키는 일을 맡기로 했다. 성에 도착하던 날, 양성군은 옥을 반으로 깨뜨려 하나를 맹승에게 주며 말했다. “우리 이걸 부신(符信)으로 삼아 나눠 차세. 믿음의 맹서일세. 어떤 일이 있을 땐 이 부신을 서로 합치고 기꺼이 서로를 따르기로 하세.”
맹승은 훗날 언젠가는 이 옥 조각이 자신과 제자들의 피를 요구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 역적이 되고, 아침에 초의 땅이 저녁에 진의 땅이 되는 배반과 전쟁의 혼란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맹승은 이 위험천만하고 어리석은 맹서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가 베풀어준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맹승은 젊은 시절 양성군의 식객이었다. 양성군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함께 거두어 주었다. 다른 식객이 주인을 도운답시고 빈둥대며 입만 나불거리는 것과 달리 맹승과 제자들은 잠시도 쉬지않고 집 안의 궂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맹승을 양성군은 좋아했다. 기꺼이 대부로 대접했고, 친구가 돼 아침 저녁 겸상까지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때 맹승은 다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보든 이 친구와의 신뢰는 지키리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하늘의 의로움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초나라 왕이 승하했다. 한달 전이었다. 초나라도, 양성군에게도 비극의 전조였다. 양성군은 서둘러 맹승에게 성을 맡기고 왕궁으로 갔다. 도읍인 영(?)으로 떠나는 양성군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감돌았다. 그 이유를, 그리고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를 맹승은 이제야 알았다. 왕의 장례가 있기도 전에 재상 오기가 죽었다. 천하의 별이 또 하나 떨어졌다. 그가 누구인가. 불과 6년 만에 덩치만 컸지 허약하기 그지없는 이 나라를 200년 전 장왕시대의 영광으로 되돌려놓지 않았는가. 구차하게 이웃 나라와 손잡지 않고 위와 한의 남하를 막고, 날로 세력을 뻗치는 진(秦)의 깊숙한 곳까지 공격, 천하를 다투던 인물이 아닌가.
적들은 그의 이름만 듣고도 몸을 떨었다. 잔인함과 출세욕과 뛰어난 용병술로 숱한 일화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는 노(魯)의 장수가 되기 위해 적인 제(齊) 출신 아내의 목을 서슴없이 베었다. 병사들과 똑 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걸었으며 자기 식량을 직접 들고 다니는 등 기꺼이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병사들은 그 모습에 감격했다. 오기는 알고 있었다. 승리는 무기도, 병사의 수도, 맛있는 음식에도 있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에 있다는 것을.
장수에게 감격한 병사는 '목숨 아끼지 않은 전사'가 된다. 그것을 알고 있는 한 어머니는 종기가 난 아들의 고름을 그가 직접 빨아주었다는 소식에 통곡했다. 사람들이 연유를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에 남편이 종기가 났을 때, 그가 고름을 빨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에 감격해 물불 안 가리고 싸워 결국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아들까지 그렇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왕의 신임도 두터울 수 밖에 없었다. 오기는 군사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개혁의 칼도 휘둘렀다. 그의 전략은 간단했다. 그냥 있는 것 잘 정리해 두 배로 만들기였다. 재물만 탐하면서 불평불만 해대는 귀족과 관리들을 쓸어내 버렸다. 그리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앴다. 예외는 없었다. 빈둥거리는 왕실의 친척의 봉록을 없애고 그것으로 군사를 길렀다. 군대는 풍족해졌고,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오기는 남쪽의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의 진(陣), 채(蔡)를 정벌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권력과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뺏긴 왕족과 귀족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나라의 부강보다 자신의 이익이 중요한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강력한 그의 후원자인 왕이 죽은 것이다. 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 거사에 양성군도 가담했다.
쫓기다 막다른 길에 몰린 오기는 왕의 시신 아래 숨었다. 그들은 오기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은 오기는 몸에 무수히 꽂혔고 그들은 오기의 사지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화살이 왕의 시신에도 무수히 가서 막힌 것이었다.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시 오기는 지략은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죽어가면서도 원수를 갚을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멍청한 그들은 오기가 왜 도왕의 시신 아래로 숨었는지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위험에 처하고서야 알았다. 덜 떨어진 태자 역시 아버지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오기가 아니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불효자로 남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는 숙왕(肅王)에 오르자마자 장수 영윤(令尹)을 불러 명령했다. "아버지의 시신에 화살을 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라. 그 일족까지 죽이고, 그들의 성을 거둬들여라."
그 일로 이미 70여 집안이 도륙됐다. 이제 마지막 양성군 차례다. 더구나 순순히 목을 내놓지 않고 도망가버렸으니 왕의 분노는 더욱 크리라. 왕의 명령은 정당하다. 그 정당함에 맞서는 것은 반역이다. 맹승은 고개를 돌려 제자들을 보았다. '저들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래도 왕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위해 대신 지켜주기로 약속한 남의 성을 내줄 수도 없다. "내일이면 왕의 군대는 올 것이고, 우리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맹승은 바람을 피하려 고개를 잔뜩 숙인 채 누(樓)로 걸음을 옮겼다. 양상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누구보다 앞장서 백성들과 함께 들판에서 일하느라 땀에 절어 여기저기 버캐가 핀 헐렁한, 정강이까지 올라온 검은 홑바지가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를 깃대 삼아 사납게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 것이 불안해 보였다. 자루가 긴 창인 극(戟)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가누어 누에 오른 맹승은 바람에 꺾인 흰 수염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는,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실눈으로 남쪽 벌판을 응시했다. 극의 끝에 달린 붉은 천이 그의 머리 위에서 펄럭였다. 왕의 군대 전령이 다녀간 지 반나절. 벌판에는 흙먼지만 자욱할 뿐이다.
흙바람에 30리 밖에 있는 왕의 군대도 전진을 멈추고 쉬고 있으리라. 이런 흙바람 속에서 굳이 군사를 몰아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적과의 전쟁이 아니다. 난동에 가담한 한 신하의 목숨과 재산을 거둬들이는 일이다. 순순히 항복하고 성을 내 준다면, 굳이 칼에 피를 적실 이유가 없다. 모두 왕의 백성이고, 땅이기 때문이다. 전령은 그 시한을 오늘 해지기 전까지라고 했다.
“우리 뿐이로구나.” 짧게 한숨을 섞어 이렇게 중얼거린 맹승은 고개를 돌려 누 아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깃발처럼 펄럭이며 서있는 185명의 제자를 내려다 보았다. '검은 무리'의 상징이 돼버린 누더기 칡 베옷, 땡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 바지 아래로 드러난 앙상한 종아리, 너덜해진 짚신이 그들의 고된 노동과 절약으로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콩국과 냉수로 끼니를 채워 온 그들의 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 주고 있었다.
'옛날 우(禹) 임금처럼 소나기에 목욕하고, 거센 바람에 머리 빚으면서 장딴지의 살과 정강이의 털이 없어질 만큼 밤낮으로 고생하면서도 거둔 것은 나눠주며 살아왔다. 그게 우리의 법이지 않는가. 단 한번, 단 한명 그것을 어긴 적은 없었다. 죽음 앞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저들은 어떤 길이라도 따를 것이다. 모두 불에 뛰어들고, 칼날을 밟으라면 밟을 것이다.'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맹승은 눈을 감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빛보다 어둠이 늘 더 편안했다. 스승은 빛이야말로 하늘이 주시는 평등의 선물이라고 했지만 그는 어둠이야말로 '하나'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했다. 삼라만상이 어둠에 복종할 때,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던가. 누구도 어둠을 거스를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어지러운 세상은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꾸는 세상에 대한 꿈은 또 얼마나 좋은가. 꿈을 배반하는 건 늘 어둠을 증발시켜 버리는 환한 태양이다.
마른기침을 해도 먼지 먹은 목이 터지지 않아 맹승은 허리에 찬 물통을 열어 남아있는 물을 모두 마셨다. 먼지 먹은 얼굴들의 시선이 버려지는 물통을 따라 일제히 움직였다 다시 그의 얼굴로 모였다. 그들 역시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듯했다. '검은 무리'의 맹서를 읊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맹승은 옥 조각을 쥔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듯 조용해졌다. 바람을 가르며 맹승이 입을 열었다.
“제자들이여, 검은 무리여! 나는 이 성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약속으로 이 부신까지 받았다. 그런데 지금 서로 합쳐 뜻을 따르기로 한 다른 한쪽 부신은 볼 수 없고, 힘으로는 왕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 맹승은 잠시 말을 끊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검은 구름 뒤에서 해가 떨어지고 있는지 사위는 더욱 검었다. '검은 하늘, 검은 땅, 검은 사람… 잠시 후면 이 모든 것을 지울 더욱 짙은 어둠이 우리를 찾아 오겠지.' 제자들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킬 수 없다면, 스스로 죽을 수 밖에 없다.”
놀란 눈동자들이 일제히 맹승을 향했다. 낮은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소리에 귀가 웅웅댔다. 맹승은 그들의 눈길을 피해 자신의 키보다 1자는 족히 더 긴 극의 끝을 바라보았다. 맨 위에서부터 날이 자루와 직각으로 한 뼘 간격으로 짧게 뻗어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맹승은 '이 극은 남을 죽이기는 좋은 무기지만, 자살하기에는 자루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깬 건 수제자 서약(徐弱)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죽어서 양성군에게 도움이 된다면 죽는 것이 옳지만, 우리의 죽음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단지 우리의 도(道)를 지키다 우리들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서약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뒤쪽에서 젊고 낯선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우리는 양성군의 일족도, 그의 군사도 아닙니다. 우리의 죽음을 양성군도 바라지 않을지 모릅니다…”
모두 놀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며 맹승은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뭐더라. 완(緩)이지 아마. 늘 얼굴에 깊은 그늘을 갖고 있는….' 그가 떠듬거렸다. 자신의 말에 스스로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가 점점 오그라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죽음이야말로 친구의 신의와 뜻을 저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맹승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와 양성군의 관계는 스승도 되고 벗도 되며, 벗도 되고 신하도 된다. 죽지 않는다면 이제부터 엄한 스승을 구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검은 무리'에게서 찾지 않을 것이며, 현명한 벗을 구함에 있어서도 '검은 무리'에게서 찾지 않을 것이며, 훌륭한 신하를 구함에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죽는 까닭은 우리의 의(義)를 행하고, 우리의 업(業)을 계승케 하려는 것이다. 거자는 송(宋)에 머물고 있는 전양(田襄)에게 물려 줄 것이다. 전양은 현명한 사람이니 어찌 '검은 무리'의 존재가 세상에서 끊어질까 걱정하겠는가?”
그들의 죽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지붕 위의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요란하게 울었다. 맹승은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다. 놀란 맹승이 눈을 번쩍 떴다. “스승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청하옵건대 제가 먼저 죽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역시 서약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짧은 칼이 그의 목을 뚫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분수처럼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뿜어져 나온 피가 장작 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동시에 쿵 하고 서약이 쓰러졌다. 그의 죽음이 신호라도 되듯 제자들이 일제히 '검은 무리'의 맹약을 암송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남이란 없다. 남을 내 부모형제처럼 섬긴다. 재물은 남을 위해 쓰며, 빈궁하게 산다. 우리에게는 나라도 왕도 규범도 없다. 오직 하늘의 의로움만을 따른다. 전쟁을 단호히 반대한다.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며, 지도자에 절대 복종하며 죽음도 기꺼이 바친다.”
맹승은 오른손에 잡은 과를 발 앞에 비스듬히 세워놓고는 힘차게 끌어 당겼다. 세번째 날이 그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귀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목에 뭔가 자꾸 걸렸다. 기침을 해보려 했지만 되질 않았다. 뭔가에 머리가 세차게 부딪쳤다. 눈에 하늘이 보였다. 어둠, 그것도 아주 진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둘러보려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누군가 맹약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보았다. 검은 피가 메마른 땅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눈앞에 시꺼먼 물체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저 놈의 까마귀. 맹승은 놈을 노려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고 떴지만 어두워 사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왕의 군대가 도착했다. 대장 영윤은 검은 무리의 주검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스승의 한마디에 한 사람의 도망자 없이 모두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신념과 집단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가벼이 여기는 '검은 무리'라는 말은 들었지만 영윤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붓을 들어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양성군의 성을 거두다. 광기의 무리 183명 모두 자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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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상상만해도 끔찍한 이 사건을 소설가 최인호는 <유림>(열림원)에서 '오늘날 맹신적 사교집단의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도를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모습에서 고귀함을 느끼기 보다는 광신의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 테러리즘이 타인을 향했을 때를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광신이야말로 자신과 다른 상대에게 무자비할 수 있지 않은가. 애써 묵자 시대에서 찾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그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묵자>는 잠시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고, 현실만 더욱 어지럽히는 한낱 꿈처럼 보였다.
안성기가 왕의 군대의 대장 항엄중 역을 맡아 눈길을 끄는 홍콩 장지량 감독의 한ㆍ중ㆍ일 합작 영화 <묵공>(墨功)은 그러나 이 집단자살극을 싹 감추고 홀로 찾아온 묵자의 거자인 혁리(류더화)의 영웅적인 방어전쟁을 그리고 있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마 광신도의 자살극으로는 차마 묵자의 '반전' '평화' '겸애'사상을 이야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묵자>에 나와있는 것처럼 방어라면 일가견이 있는 묵자의 전술을 보여주려면 자살항복으론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액션 사극일 수 밖에 없고, 그 속에서 묵자의 사상을 논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성이 있어야 황궁도 있다. 저을 무찔러야 자유가 있다. 전쟁은 피하는 게 좋다. 전쟁에서 안 억울한 사람 있나. 비공(非攻)과 겸애만이 평화의 길. 전쟁에서는 산 자나 죽은 자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 사람이 사람을 왜 죽여야 하지'란 대사를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이다.
그러나 용감히 전쟁을 치르면서 혁리가 한탄하는 이런 말조차도, 정반대로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를 지킨다며 집단 자살한 행동만큼이나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어쩌면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양성의 왕이 한 말이야말로 묵자에게는 날카로운 비수일 것이다. 결국 성을 지키고, 백성을 지킨 사람은 혁리가 아닌 바로 그 왕이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결코 현실일 수 없다. 현실과 거리가 먼 꿈일수록 달콤하다. 사람들은 쉽게 그 꿈에 열광하고, 희망을 품는다. 꿈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이며 꿈 꾸는 자가 행복한 이유다. 그래서 세상은 늘 꿈으로 가득하고, 그 꿈에 사람들은 취하고, 꿈에 취한 사람들의 더욱 고통스런 신음을 남긴다.(이대현 편집위원)
07. 01. 12.
P.S. 오전에 한국일보를 사서 읽었지만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짐작대로 지면기사는 아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