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국문학이 단편 중심에서 장편 중심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제제기를 담은 최재봉 기자의 칼럼을 옮겨온 바 있는데, 그에 호응하는 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인/비평가 남진우의 칼럼과 이번에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전경린의 인터뷰 기사를 보태놓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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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7. 01. 10) 장편소설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20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7권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이 작품이 유명해지자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한다. "이 긴 작품을 다 읽어내려면 결핵에 걸리거나 다리가 부러져서 침상에 오래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내가 이 작품을 못 읽은 것은 아직 다리가 부러진 일이 없어서이다.)
● 단편 편향은 한국문학 발전의 장애물
요즘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차분히 소설을 읽기보다는 하루 종일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TV에 넋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일화는 역으로 현단계 한국문학이 가진 취약한 부분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한국문학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음미할 수 있을 만큼의 유장한 호흡과 일정한 규모를 지닌 작품, 다시 말해 장편소설의 창작에 그리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문학의 중심을 소설이 차지했다면 그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연히 장편이다. 하지만 한국문단에선 신문학 초창기부터 유독 단편소설이 강세를 보여왔고 이 현상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물론 제도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존재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단편소설에 대한 정도 이상의 편향은 이제 한국문학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최근 세계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한국문학이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뛰어난 장편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한국 독자가 외국소설을 읽을 때 자연히 장편에 손이 가는 것처럼 외국 독자들도 한국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좋은 장편소설부터 찾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의 진흥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범문단적으로 단편을 덜 쓰고 장편에 주력하자는 식의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까. 당연한 사실이지만 요란한 구호를 앞세우기보다는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장편에 몰입하고 거기서 문학적 경제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각종 문학상이나 정부의 지원에서 장편소설에 대한 인센티브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다.
현재 우리나라엔 수많은 문학상이 있지만 유명 문학상이 대부분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신인 공모를 제외하고는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은 극히 희소하다. 심지어 단편과 장편과 창작집을 두루 섞어 심사하는 문학상도 있는데 이는 마라톤 선수와 100미터 달리기 선수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평가하겠다는 발상에 다름아니다. 문예진흥위원회 등 관련 단체에서 창작 지원을 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 문학상, 지원도 장편에 인센티브를
지금처럼 문예지에 실린 단편소설 가운데 우수작을 선정해서 지원하는 방식은 심하게 말하면 장편소설을 쓰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랜 기간 고생해서 쓴 장편소설로 받을 수 있는 초판 인세가 불과 얼마인데 단편소설 하나로 그보다 훨씬 많은 지원금을 받게 된다면 작가들이 당장 집중할 장르가 무엇일지는 자명하다.
단편소설을 열심히 잘 쓰다보면 저절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니 죽음이니 하는 추상적 주제에 매진하기보다는 한국문학을 진작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방안의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다.(남진우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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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01. 11) 전경린 “단편써야 먹고사는 풍토 안타깝다”
지난해 발표한 단편 ‘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동네’ 여름호 수록)로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전경린씨(45)가 단편 위주로 흘러가는 현재 한국문학 풍토를 비판했다. 전씨는 지난 9일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문단 구조가 단편을 쓸 수밖에 없는데 독자들은 이야기가 풍부한 장편에 목말라하고 있다”면서 “장편이 쏟아져 나와야 한국문학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전업작가들이 단편을 선호하는 이유는 우선 문학계간지에 수록될 때 원고료를 받을 수 있고 다시 소설집으로 묶어낼 수 있는 데다 ‘연봉’ 정도의 상금을 주는 문학상 또한 단편 위주로 돼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시행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금 역시 대부분 단편에 주어진다. 문예위는 지난 한해동안 계간지에 실린 우수작품 144편에 대해 각각 300만원씩 지원했는데 이중 장편은 10여편에 불과하다. 이 지원금은 한 작가가 1년에 3번까지 받을 수 있다. 때문에 ‘단편 3개만 잘쓰면 기초생활비는 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반면 장편소설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써봤자 전적으로 시장판매에 기대는데 현재의 수천부 판매량으로는 원고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문예지가 대중성보다 문학성 위주로 쓰여지는 단편을 주로 수록하기 때문에 장편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 작가 입장에서도 장편 연재의 경우 이미 발표된 부분을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고칠 수 없다는 부담 때문에 탈고까지 거친 뒤 한번에 발표하는 전작(全作)을 선호한다.
전씨는 “한국문학이 활성화됐던 1970년대를 돌아보면 박완서 최인호 이외수 등의 선배들이 독자와 호흡하는 장편을 쏟아냈다”면서 한국작가들은 단편에 매달리고 일본소설을 비롯한 외국소설이 장편을 장악한 현재의 문학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또 남녀간의 갈등, 외도, 폭력 등을 주로 그려온 자신의 작품세계와 관련, “통속은 우리 삶과 가장 밀착돼 있는 테마”라면서 “통속에 대한 배제는 우리 문단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자 독자와의 호흡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문학성과 통속성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걸어왔다”면서 “통속 범주의 테마들을 새롭게 조명, 창조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면 문학의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작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유부남이었던 모경과 결혼한 뒤 의처증과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 인희가 독일의 언니집을 찾은 뒤 낯선 이국땅에서 주변과 삶에 대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는 줄거리다. 심사를 맡았던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최근 소설들이 작위적인 구성에 몰두하거나 파편화된 일상을 과장적으로 그려내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통속적 소재를 인간 내면에 자리한 선과 악의 양면성에 대한 예리한 검증과 섬세한 기술로 승화시켰다”고 소개했다. 이 작품을 비롯, ‘빗속에서’(공선옥), ‘아버지와 아들’(한창훈), ‘소년J의 말끔한 허벅지’(천운영) 등 우수작 7편이 실린 수상작품집은 이달 중순 출간된다.(한윤정 기자)
07. 0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