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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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00:41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나왔군요.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당장 신청해야겠습니다.히히

로쟈 2006-12-18 01:18   좋아요 0 | URL
네, 연말에 반가운 책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한데, 입이 좀 나오게 되는 건 우리책들이 너무 비싸다는 것. 원서보다 비싼 책들이 언제부턴가 일반화되고 있는 듯합니다(물론 하드카바인 걸 고려하면 더 비싼 건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소프트가 따로 나오는 건 아니니까 결과적으론 더 비싸죠). 난치병 환자들의 구호에 "약이 없어서 죽을지언정 약값이 없어서 죽지는 말자!"라는 게 있는데, '책값'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져서야...

드팀전 2006-12-18 09:13   좋아요 0 | URL
친절한 페이퍼네요.^^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를 보다가 -제 혼자 생각인지-번역된 국문법이 영 낯설어서 중간에 접었던 기억이 납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올해 보관함에 넣고 못 읽은 책중에 하나였는데 <전체주의의 기원>도 일단 보관함에 들어가야겠어요.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는 몇 년전에 봤는데 얇지만 두툼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6-12-18 11:05   좋아요 0 | URL
<폭력의 세기>는 번역에 대한 지적들이 많은 책입니다(드팀전님의 혼자 생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도 사놓고 아직 들춰보지 못했는데, 또 두툼한 책이 나와 대략난감입니다. 거둬야 할 식솔들이 늘어날 때의 기분이 비슷할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