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