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