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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이야기 2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55
오찬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군주의 권위를 빌려 권력을 잡은 무인들의 혈투가 주된 내용이니 황실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천황', '상황', '황후', '태후', '태자'. '친왕'을 '임금', '상왕', '왕비', '대비', '세자', '대군'으로
일일이 격하시킨 번역이 너무나 거북했다.
남의 나라 문학 작품에 그런 짓을 하면 번역자의 민족적 자존심이 높아지나.
중국 황제만이 황제이니 다른 나라는 황제의 칭호를 써서는 안 된다는 속국적 발상이 우스꽝스럽고,
한국이 못 썼던 황제의 칭호를 일본이 썼던 게 배가 아파 그랬다면 그 옹졸함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을 교수님으로 부르며 그 밑에서 일본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걱정될 정도로.
역자는 일본인 은사들 앞에서 자신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앞으로도 제대로 된 한국어 번역판이 나올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안타깝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더 안타깝다.
1권 349-350 대장군 코레모리(平維盛)는 관동의 물정에 밝은 나가이 출신의 사이토 사네모리(齊藤實盛)를 불러 "사네모리, 관동팔주에는 그대만 한 강궁이 얼마나 있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이토는 껄껄 웃더니 "대장군께서는 그럼 소인을 강궁을 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소인은 고작 주먹 길이 열셋 되는 화살을 쏠 뿐입니다. 소인만큼 쏠 수 있는 사람은 팔주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궁 소리 듣는 사람 치고 주먹 길이 열다섯이 안 되는 화살을 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활도 힘센 장사 대여섯이 겨우 부리는 강력한 활을 사용합니다. 이런 강궁들이 쏘면 두세 벌 포개놓은 갑옷도 그냥 꿰뚫습니다. 호족 한 사람의 병력이 적어도 오백 기를 밑도는 일이 없는데, 말을 타면 떨어질 줄 모르고 험한 산길을 달려도 말이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전투 시에는 아비가 죽건 아들이 죽건 개의치 않고 죽으면 그 주검을 넘고 넘어 싸웁니다. 관서 무사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아비가 죽으면 공양을 한 후 상이 끝나야 다시 싸우고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느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군량미가 떨어지면 봄엔 논을 갈고 가을엔 추수한 후 싸움을 시작하고 여름은 덥다 싫어하고 겨울은 춥다고 마다하지만 관동에서는 일체 이러한 일이 없습니다. 카이와 시나노의 미나모토 군은 지리에 밝아 후지산 기슭에서 배후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장군을 겁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란 사람 수가 아니라 계략 쓰기에 달려 잇다고 합니다. 소인은 이번 싸움에서 사아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고 답하니 이 말을 들은 타이라 군의 병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67-69 사츠마 태수(薩摩国司) 타다노리(平忠度)는 어디쯤에서 말머리를 돌렸는지는 모르나 호위 무사 다섯에 시동 하나뿐인 단 7기만으로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고조에 있는 휴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 대감 집을 찾았으니 집 앞에 당도해 보니 문이 굳게 잠겨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중략) "주상께서 이미 도성을 뜨셨고 저희 집안도 이제 운이 다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얼마 전 대감에게 당대의 뛰어난 노래를 모아 편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제 작품을 단 한 수만이라도 체택해 주시는 은혜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일생의 영예가 될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곧바로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어명이 취소되고 말아 소장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다시 어명이 내릴 터인데 이 두루마리 속에 쓸 만한 것이 있거든 한 수만이라도 넣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풀숲 그늘에 묻혀서도 기뻐할 것이고 저 멀리 저승에서나마 대감을 오래오래 지켜드릴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읊어온 수많은 노래 가운데 가작으로 생각되는 100여수를 모아 적은 두루마리를 갑옷 이음새 틈에서 꺼내 슌제이 대감에게 건넸다. (중략) 난리가 가라앉은 후 슌제이는 "천재집(千載集)"이라는 노래집의 편찬을 맡게 되었는데, 타다노리의 얼굴하며 남긴 말들이 새삼스레 생각나 감회를 억누를 수 없었다. 맡기고 간 두루마리 안에는 실을 만한 노래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미 역적의 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고도(古都)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읊은 노래 한 수를 ‘무명씨’의 작품으로 하여 채택하였다. さざなみや 志賀の都は 荒れにしを 昔ながらの 山桜かな
151-153 요시나카(源義仲)는 시나노를 떠나올 때, 토모에(巴 御前)와 야마부키(山吹)라는 시녀 둘을 데리고 상경했다. 야마부키는 몸이 아파 서울에 남았으나 토모에는 내내 행동을 함께 했는데, 특히 이 토모에는 긴 머리에 얼굴이 백옥 같아 요ㅇ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강궁에 마상이건 도보건 간에 한 번 칼을 뽑았다 하면 그 어느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는 일기당천의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말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잘 다녀서 요시나카는 전투가 벌어지면 토모에에게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대도와 강궁을 들려 일군의 지휘관으로 명해 내보냈다. 수차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고 전사했으나 마지막 일곱 기가 남을 때까지 토모에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었다. (중략) 요시나카는 토모에를 향해 "너는 여자이니 어서 어디로건 떠나거라. 나는 싸우다 죽겠다. 누군가에게 붙잡히게 될 것 같으면 자결할 생각인데 내가 마지막 전투에 여자를 대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렇구나." 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떠나지 않아 몇 번이나 설득했더니 토모에는 "어디 쓸 만한 적이 없나. 마지막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하고 기다리는데 무사시 지방의 이름난 장사 온다노 모로시게(恩田師重)가 20여 기를 이끌고 나타났다. 토모에는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온다 옆에 말을 대고 힘껏 잡아채더니 자기가 타고 있던 안장 앞가리개에 밀어붙여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목을 비틀어 벤 다음 집어던졌다. 그런 다음 갑옷을 벗어던지고 관동 방면을 향해 떠나갔다.
154-155 "소인 한 사람을 천 기쯤으로 여기십시오. 화살이 일고여덟 대 남아 있으니 잠시 활로 적을 막고 있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숲은 아와즈 송림이라 하는데 저 송림에서 자결하십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가는데 또 새로운 군사 50여 기가 나타났다. 이마이(今井兼平)가 "주군께서는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저는 이 적병들을 막고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요시나카(源義仲)는 "서울에서 죽었어야 하는 내가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은 너와 한 데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로따로 죽기보다는 한곳에서 싸우다 죽기로 하자"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내달리려 하개에 이마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머리를 붙잡고 "무인이란 평소 아무리 군공을 세우더라도 죽을 때 자칫 잘못하면 두고두고 불명예가 되는 법입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지치셨고 후속의 아군도 없습니다. 적군에게 에워싸여 이름도 없는 잡병에게 밀려 말에서 떨어져 전사라도 하게 되시면 그렇게도 일본국에 이름을 떨친 요시나카 장군을 내 부하가 해치웠다고 떠들어댈 테니 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하고 설득하자 요시나카는 알았다며 아와즈 송림으로 향했다. 이마이는 혼자서 50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등자를 밟고 일어서서 "평소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여라. 나는 요시나카 장군의 유모 아들 이마이노 카네히라로 금년에 서른셋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요리토모 어른께서도 알고 계실 테니 내 목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도록 하여라" 하며 쏘고 남은 화살 여덟 대를 시위에 얹어 연거푸 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서 적군 여덟 명이 말에서 고꾸라졌다. 다음에는 칼을 뽑아 들고 이리 치고 저리 베며 휘두르고 다니니 정면으로 맞서는 자가 없어 적을 수도 없이 베어 쓰러뜨렸다. (중략) 이시다가 칼 끝에 목을 꽂아 높이 쳐들고 "근래 일본 땅에 명성이 자자한 요시나카 장군을 이시다가 죽였노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싸우고 있던 이마이가 듣고서 "이제 누구를 막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여길 보아라, 관동 사람들아. 일본 제일의 용사가 자결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하며 칼끝을 입에 물고 말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니 칼이 전신을 관통해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와즈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199 뭍에 막 오르려 하는 것을 쿠마가이(熊谷直実)는 말을 옆에 갖다 대고 붙잡고 땅으로 굴렸다. 내리누른 채 목을 베려고 투구를 들추어 보니 겨우 16-7세의 소년이었는데 엷게 화장을 하고 이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들 나이 또래에다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용모를 하고 잇어 어디에다 칼을 들이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뉘시오? 이름을 알려 주시오. 내 살려드리리다" 하자 소년은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놓을 사람은 못 되오만은 무사시 사람 쿠마가이노 나오자네라 하오."하고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소년은 "그렇다면 너에게 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에게는 좋은 상대일 테니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목을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략) 쿠마가이는 너무도 안쓰러워 어디다 칼을 대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지고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울면서 목을 벴다. "아, 무인만큼 죄 많은 직업이 또 있을까. 무사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막힌 일을 겪지 않아도 됏을 것을. 너무도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하고 한탄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한참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내갑의를 벗겨 목을 싸려 했더니 허리에 비단 주머니에 넣은 피리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무참한 일이 있나. 오늘 새벽 성안에서 피리를 분 게 바로 이 소년이었구나. 지금 아군에게는 수만 기가 있으나 싸움터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역시 고귀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하며 요시츠네에게 보였더니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 소년은 수리대부 타이라노 츠네모리(平經盛)의 아들로서 대부 아츠모리(敦盛)라 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쿠마가이는 출가하여 구도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피리는 피리의 명수였던 조부 타다모리(忠盛)가 토바 천황에게 하사받은 것이라 했다. 여러 아들 중에 츠네모리가 물려받아 가리고 있던 것을 아츠모리가 재능이 뛰어나 가지고 있게 된 것이라 했는데 이름을 코에다(小枝)라 했다. 음악이란 불도에서 보자면 광언기어인 셈이어서 미망에서 오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한 무인을 불도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2-263 나치에서 수도하고 있던 승려 중에 코레모리(維盛)를 잘 알고 잇던 이가 있었는데 동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분이 누군가 했더니 시게모리(重盛) 대감의 장남인 삼위중장이시네 그려. 저 어른이 아직 사위소장으로 았던 안겐 원년(1178) 봄에 법황의 오십 세 수연이 있었지. 당시 시게모리 대감께선 좌대장이셨고 숙부 무네모리(宗盛) 경은 우대장이었는데 두 분은 어전 계단 아래 앉아 계셨고 그 밖에 토모모리(知盛) 중장과 시게히라(重衡) 경을 비롯한 일문들이 대례날처럼 차려 입고 원을 그려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저 어른이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고서 청해파(靑海波)를 추셨는데 마치 이슬에 젖어 함초롬해진 꽃과 같은 자태로 소매를 바람에 펄럭이며 춤을 추시니 일대가 환히 빛나 보였다네. 황후께서 관백 대감을 통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리셨는데 시게모리 대감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서 법황께 절을 올리셨어. 그러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 옆에 있던 정신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일이지. 한때 대궐 궁녀들 사이에서 소설의 옛 주인공을 방불케 한다는 말을 들었고 이내 대신 자리에 오를 줄 알았는데 저리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시다니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네그려. 변화무쌍한 게 세상일이라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러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우니 옆에 있던 수도승들도 따라 울어 소매가 흠뻑 젖고 말았다.
280 서울에서는 새 천황(後鳥羽天皇)이 첫 제사를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행차가 있었는데 좌대신 사네사다(實定) 공이 행사를 주관하였다. 재작년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목욕 행차 때는 무네모리 내대신이 행사를 주관했었는데 용대기(龍大旗)를 앞에 세우고 장막 안에 정좌한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가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보련을 호종한 삼위중장 토모모리, 도승지 시게히라 경을 비롯한 타이라 일문 및 근위부 무사들의 차림은 비할 바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이날은 판관대부 요시츠네가 행차의 선두에 섰는데, 시골 출신인 기소노 요시나카와는 달리 촌스러운 구석은 없었으나 그래도 타이라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빠지는 사람을 골라 세운 것보다도 못해 보였다.
305 요시츠네(源義経) 역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고 있었는데 타이라 군 병사들이 배 안에서 쇠갈퀴를 가지고 요시츠네의 투구 드림을 휙휙 하고 두세 차례 걸쳐 잡아당겼다. 부하들이 대도와 협도를 휘두르며 막아내어 위기는 모면했으나 그 와중에 활이 쇠갈퀴에 걸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요시츠네가 몸을 숙여 채찍으로 끌어당겨 건지려 하자 부하들이 그냥 버리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몇 차례나 시도한 끝에 간신히 주워들더니 웃으며 물러섰다. 나이 많은 무사들이 혀를 차며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설사 천 냥 만 냥 하는 활이라 할지라도 어찌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요시츠네가 "내가 활이 아까워서 그런 줄 아느냐. 내 활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힘을 써야 시위를 걸 수 있는 활이거나 숙부님 활처럼 강궁이었다면 일부러라도 떨어뜨려서 적이 줍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힘없는 활을 적이 주워 가지고 ‘이게 미나모토 군의 대장군 요시츠네의 활이란다‘하며 비웃을까 봐 목숨을 걸고 건져온 것이다"하고 이유를 설명하니 맞는 말이라며 모두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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