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도로스 신화집 - 희랍어 원전에서 옮긴 그리스 신화
아폴로도로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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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빨리 번역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이것이 쓸데없이 여러 묘사를 넣지 않은, 말하자면 '기름이 빠진' 신화집이어서였다.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신화집들은 대개 필자들이 자신의 글 솜씨를 과시하듯 너무 '자유롭게' 얘기를 윤색하는데,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신화 수업 시간에 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책이었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 한 부피도 작고 값도 싼 판본을 원한다. 이 판본이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강점이 있을 것이다."                            -p348, 역자 후기 중에서

이렇게 '빨리 번역하려고' 애썼던 책인데, 번역 작업을 마치고 출판사에서 원고를 손질하는 사이에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먼저 발간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서양 고전 전공자가 너무 적어서 한정된 인력을 효율적으로 쓰자면 당분간은 서로 작업이 겹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만 서로 연락이 없어 약간의 '인력 낭비'가 생겼다는 점이 아쉽다."라는 감상이 붙어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번역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있겠다.

저자인 아폴로도로스는 1세기 또는 2세기에 아테네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신화집은 광범위한 내용을 핵심만 추려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적 재미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짧은 시간동안 신화 전체를 요약 정리하기에는 매우 유용하다. 마구 쏟아지는 고유명사들을 그냥 따라가기가 힘들어 '가계도라도 그려서 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 순간, 책에 이미 근사하게 정리된 가계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동했다.  앞에 나왔던 이야기가 다시 언급될 때 그 부분을 찾아볼 수 있도록 각주로 안내하고,  맨 뒤에 깔끔한 인명 색인을 달아 둔 세심함과 철저함도 전공자의 원전 번역 답다.

책이나 그림을 보다가 낯선 희랍 이름을 발견했을 때, 예전에 읽었던 신화의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때, 수필이나 레포트에 희랍 신화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을 때(이럴 때야말로 장절구분이 위력을 발휘한다.), 곁에 두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책이다. 아름답고 튼튼한 양장본임에도 무게는 가벼우며, 역자가 의도한 대로 값도 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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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2
귄터 그라스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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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발트해에 면한 상업도시 단치히이다. 독일과 폴란드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 오랜 역사 속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했으나, 그만큼 수난도 많이 겪은 도시.  독일기사단에 대항하여 한자 동맹에 가입하고 명목상의 폴란드령으로 자치권을 누리다가 18세기 이후 독일령이 되고, 1차 대전 후 국제 자유도시가 되었다가 1939년 독일에 점령당해 2차 대전을 겪고 그 후에는 폴란드령 그단스크가 된 이 곳에서, 1924년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가 태어난다.

어머니 아그네스는 지역의 토착민인 카슈바이 인이다. 독일어와도 폴란드어와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 농부들의 운명에 대해 외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는  "카슈바이인은 이주라는 것을 할 수가 없어. 언제까지나 본고장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무리들에게 두들겨 맞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쨌든 우리들은 진짜 폴란드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야." 라며 큰 소리로 웃는다.

두 개의 국가 권력 사이에 놓인 단치히의 운명은 주인공 오스카의 두 명의 아버지로 표상된다.  어머니의 합법적인 남편이자 오스카의 법적 부친인 식료품상 알프레드 마체라트는 독일인이다.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이자 평생에 걸친 간통 상대이며 주인공의 생물학적 부친일 가능성이 큰 얀 브론스키는 폴란드 우체국원으로 나치 독일에 의해 죽는다. 역자는 어머니 아그네스의 죽음이 자유도시 단치히의 멸망을, 얀 브론스키의 죽음이 폴란드 왕국의 멸망을, 소련군에 의한 알프레드 마체라트의 죽음이 제국 독일의 멸망을 뜻한다고 해설하는데,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여정은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채소 장수 그레프의 감자 저울 이야기라든지 파인골트 씨의 소독약 이야기 같은 것들은 오래도록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 민중이 겪는 고통은 나에게 세노 갓파의 <소년H>를 연상시켰는데, 독일의 사례에서나 일본의 사례에서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그 민족 전체가 우리의 적이라는 또다른 국가주의 논리가 아니라 국민 국가의 광기로부터 우리의 정의와 인간성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둠의 시대 폭압적 권력의 경계를 미끄러져 가는 난쟁이 오스카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그의 양철북을 두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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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7-02-2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mizuaki 2007-02-2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
 
플라워 오브 라이프 3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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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한 여자 사이토 시게루. 어딜 봐도 남자 같은 외모 탓에 학창 시절부터 소녀팬들만 줄줄 따라다녔던 여자, 여성스러운 말투와 여성스러운 몸짓과 빨간 원피스로  몸부림 쳐 봐도 여장한 게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유부남과의 불륜이라는 덫에서 겨우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열여섯 살 짜리 사디스트 오타쿠의 독이빨에 덥썩 물려 버린, 참으로 박복하고 박복한 사이토 선생에게도 내가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반장인 야마네이다.  머리도 좋고 인간성도 좋고, 속이 깊고 배려심 있고 의지가 되는 야마네는  모든 담임들이 꿈에 그리는 이상의 반장이 아닌가!! 별 말 없어도 묵직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야마네를 지각대장 사카이의 눈으로 담아낸 11화는 3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주인공의 비중이 높지 않은 대신 수많은 조연 캐릭터들의 매력이 갈수록 빛을 발한다. 미쿠니와 하나조노의 알콩달콩 싸움이 귀여웠고, 왕따 타케다가 이소니시, 진나이와 함께 쇼핑을 하며 서로가 행복한 거리를 찾아 나가는 에피소드는 가볍지 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사카이와 남자친구와의 대화는 따뜻했고, 아이자와와 미쿠니의 지하철 장면도 잔잔하니 좋았고, 크리스마스 파티 후 츠지가 남은 케이크를 형에게 내미는 장면에선 동경하는 여자에게 어린애로 취급당한 낙담이 충분히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미쿠니의 아빠(이 분 직장 동료로 <서양골동양과자점>의 나카츠 하루카 아나운서도 나온다.), 이소니시의 엄마, 오자키의 부모님, 진나이의 할머니 같은 어른들 모습이 잠깐 잠깐 나오는 부분에서도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져 흐뭇했다.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행복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 3권이었으나, 작가는 마지막을 마지마의 대형 사고로 끝맺음으로써 다음 권에 대한 궁금증에 불을 질렀다. 요시나가 후미의 능력이란 정말 끝이 보이지 않고, 덕분에 오랜만에 원본 만화를 지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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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호 이야기 날개돋친고전 2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작은이야기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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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양털을 찾아 떠나는 이아손의 모험은 희랍 신화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작가 아폴로니우스 로디우스가 쓴 이 서사시는 이아손의 항해를 따라가는 모험담이다. 역자는 여기에  <소년에서 영웅으로>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책 말미의 해설을 읽고 나면 과연 이니시에이션적 요소가 많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소년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이다. 여주인공 메데이아는 헤카테라는 무시무시한 여신을 모시는 마녀인데, 강력한 마법으로 사건을 좌지우지하며 아르고호의 '영웅'들을 찍 소리 못하게 한다. 어둡고 환상적이며 잔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잔혹한 책읽기>를 통해서 고전 문화 전반에 대한 역자의 지식 수준을 충분히 알았기에 신뢰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른 번역본과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우선 현대어 중역이 아니라 원전을 그대로 옮겼다는 것,  원문의 사소한 표현까지도 최대한 살려 놓았다는 것(운율을 맞추기 위한 꾸밈말이나 신들의 별명, 그리고 고유 명사 등), 마지막으로 원문에 있는 행수표시를 생략하지 않고 기재했다는 것이다. (이 시대 책에는 성서의 무슨복음 몇 장 몇 절처럼 절마다 번호가 있다. 살려두는 쪽이 나중에 찾아보기에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원전번역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현대 소설과 다른 화법이 껄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방식의 책을 한두 권만 읽고 나면 희랍어식 문장 구조에 금방 익숙해진다. 담백하고 소박한 단어들을 따라 고대 작가의 화법을 여유 있게 즐기노라면, 대학 시절의 강독 수업이 떠올라 아련한 그리움조차 느껴진다.  양장본이지만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들고 다니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것과 희랍인 자신들이 그린 도자기 그림부터 근대의 유화작품들까지 아름다운 도판 자료들을 충분히 수록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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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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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과학을 전공하는 남자(구체적으로는 이공계 대학원 학생이나 일부 학부생이 되겠지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로맨티스트>라는 것이다. 길지 않았던 실험실 시절에 남자 선배들이 나누는 ‘어젯밤 드라마’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가지게 된 편견인데, 오사카부립대 전자공학부 출신인 히가시노의 경우에도 <로맨티스트>라는 부분만은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다.

 

 

 


<비밀>의 스기타나 <아내를 사랑한 여자>의 나카노에서 익히 보았던 헌신적인 순정남 캐릭터는 이 작품의 이시가미에서 한 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내성적인 중년 남자가 옆집의 혼자된 아주머니(화려하지는 않지만 청초하고 가녀린)를 짝사랑한다는 설정부터가 일단 일일연속극스럽다. 그 아주머니가 끔찍이 사랑하는 중학생 딸이라든지 이들 모녀가 세상의 모진 풍파로 고생한다든지 하는 내용은 대중성을 한 단계 높여주며 가슴 따뜻한 순애보의 포석을 놓는다. 이 순정의 토대 위에 살인사건이 더해지고, 작가의 특기인 치밀한 두뇌게임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역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경악의 반전이 대단원을 준비한다. 범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랑의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예상을 뒤엎는 결말이긴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로맨틱한 마무리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소설은 이것으로 네 번째 읽는데, 어느 것이나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다. 그는 구석구석까지 공을 들인 트릭과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결말과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 휴머니즘으로 독자를 극진히 대답한다. 누군가 “뭐 재미있는 책 없니?”라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작가이다.

 

 

 


이 책 <용의자 X의 헌신>에는 전작과는 다른 매력도 있는데, 이시가미와 유가와 사이에 오가는 과학에 대한 대화들이 그것이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과 대학교 물리 선생의 우정이 조금 오타쿠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 다 순수한 마음으로 과학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서 독자도 덩달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 뒤에 보이는 공학도였던 작가의 인간적인 맨얼굴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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