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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ㅣ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편인 고베 도보 여행기를 읽고 나서야 겨우 책의 전체적인 인상이 잡혔다. 미국, 멕시코, 중국, 몽골, 일본.... 연관성을 찾기 힘든 여러 변경들을(이 책의 원제는 '邊境·近境'이다. '하루키의 여행법' 쪽이 한국 구매자들을 끌어당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의 정취하고는 거리가 있다.) 헤매고 다니며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일곱 편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해 소리 내어 웃으며 책장을 넘겼지만, 한 번쯤 발을 멈추고 생각해 볼 만한 메시지들 또한 이 책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신 대지진과 연쇄 살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고베에서는 무라카미 씨 자신의 입으로 폭력의 이야기가 부각된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폭력의 그림자는 노몬한의 기록에 있다. 일본 군의 지하 기지를 만드는 강제 노동에 동원된 후 기밀을 지키기 위해 살해당한 중국인들, 물도 없는 초원을 200 km 이상 행군해 가 소련 전차의 캐터필러 밑에서 생을 마친 관동군 젊은이들, 노몬한 전쟁의 대승이라는 구호 뒤에 숨겨진 막대한 희생을 치렀던 몽골인들... 몽골군 장교의 총에 쫓기며 탈진할 때까지 초원을 달리다 마침내 살해당하고 마는 암늑대를 본 그 날 밤 무라카미 씨는 격렬한 공포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멕시코에서의 폭력의 그림자는 인디오들의 가난과 반란과 죽음, 관광지의 다이버들이 가진 보통의 얼굴, 픽업 트럭의 짐칸에 실려가던 상의가 벗겨진 시체들로 상징된다. 심지어 소들로 가득한 미국 중부의 평원을 지나거나 이스트 햄프턴의 유명 인사들의 별장 거리를 걷거나 자연림이 우거진 무인도나 논 가운데의 우동집에 있을 때조차 평화의 이면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이러한 그림자를 느끼는 것.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로부터 들릴 듯 말 듯 호소해 오는 속삭임을 듣는 것.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진 작가로서의 감수성이다. 그리고, 그가 뚱한 표정으로 멋대로 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안에도 이러한 문제 의식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패전과 점령 이후 50여 년, 그 위장된 평화의 이면을 날카롭게 해부해 내는 무라카미 씨의 펜 끝을 따라가 보면, 해방과 전쟁과 정치적인 격변을 거치며 오히려 폭력에 무감각해진 한국 사회의 모습이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