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수사 미도리의 책장 8
곤노 빈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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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를 일곱 권 읽고 사사키 조를 거쳐 딱 그런 식의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예상 외였다. 이쪽은 사회파 미스테리라기보다는 만화 같다. 스토리 텔링도 좋고 개그도 좋고 문장은 상큼 발랄. 사건이 속도감 있게 착착 전개되어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쌈박하게 끝난다. 오락소설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 46세의 주인공 아저씨가 손끝이 떨릴 정도로 귀엽다. 더구나 무려 소학교 이지메로 시작된 악연의, 그런데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친한 척 하는 경찰청 입청 동기와의 간질간질한 투숏이 연이어 나온다.  작품 전체에 주인공의 외모 묘사가 전혀 없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어서, 머릿속의 장면들이 마구마구 꽃배경으로 미화되어 간다. 읽는 내내 실실거리면서, "이거, 뭔가 알고 쓴 거지? 응? 작가, 노리고 쓴 거 맞지?" 라고 혼자 절규했다.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를 좋아했던(...이랄까 조금 과하게 열광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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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2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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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되면 인물의 이름 붙이는 일이 무척 즐거울 것 같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면 발음뿐 아니라 글자의 의미를 곰곰히 따져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삼대 경관들의 성은 안전을 지키는 성이라는 안조(安城). 이름은 차례로 세이지(淸二),  다미오(民雄), 가즈야(和也)이다. 

전쟁으로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1948년, 단 두 달의 훈련을 받고 경시청 순사가 된 세이지(淸二)는 마음이 맑은 청년이다. 그는 상냥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바람대로 골목길 주재소에서 가족과 함께 근무하는 순사가 된다.  그 세이지가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충고에 따라 지은 아들의 이름은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는  뜻의 다미오(民雄)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손에서 어렵게 자란 다미오는  아버지를 닮은 경찰이 되려 하지만,  격렬한 이념 투쟁 시대의 가혹한 공안 업무는 그의 정신을 걷잡을 수 없이 파괴한다.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바랐던 보통 사람들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 다미오는 괴로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삼세 경관이라는 주위의 기대 속에서 경시청 형사가 된 가즈야(和也)가 찾아낸 조화로운 해답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시대를 산 다른 성격의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의 영혼에는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정의를 위한 사명감 같은 거창한 것과는 다르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권위주의자나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는 출세주의자, 아니면 적어도 명령지상주의의 단순한 인물이기라도 했더라면 이들이 겪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조 가의 경관들은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산다. 냉대받던 남창의 죽음 뒤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추적하고, 구타당하는 아이 엄마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사를 방해하는 상부와 위험한 거래를 벌인다. 그것을 위해 때때로 자신들을 길러준, 그들 자신의 충성과 애정의 대상이기도 한 경찰 조직. 국가 권력과 대립하는 상황에 서는 것을 감수한다.

이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세상에서, 세 사람의 경관은 각자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고 싸운다. 결코 쉽지 않은 그 싸움이 그들의 안정과 평화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아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바꾸면서, 싸움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국가가 인간을 파괴할 때, 국가에 속하는 경관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작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경관의 영혼에, 대를 이어 그의  심장 속을 흐르는 '경관의 피'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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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2-2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보도연맹 관련 뉴스를 보면서 이 리뷰에 썼던 목가적인 감상은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니까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경찰 3대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1대는 빨갱이 토벌 와중의 민간인 학살, 2대는 박정희 정권 하의 불법 연행과 고문, 3대는 촛불 시위대에 대한 폭력 진압... 이웃나라인데도 경찰 이미지는 너무 다르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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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올라온 평범하지만 꼭 평범하지만도 않은 청년 또는 소년이 겪은 슬프지만 꼭 슬프지만도 않은 죽음과 삶, 연애와  일상에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내가 처음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기도 하다. 이걸 계기로 푹 빠져서 도서관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조리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과는 달리 갖고 싶은 걸 그다지 참지 않던 시절이라 용돈을 털어 열심히 사모으기도 했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의 병실에서 오이를 깎아 먹는 이야기 같은 것들. 죽음을 앞둔 서점 주인과 말없이 마주앉아 먹는, 간장에 적신 오이의 맛. 미도리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 중에 계란말이용 후라이팬를 사기 위해 브래지어 살 돈을 써버려서 덜 마른 브래지어를 입고 다닌 적이 있다는 것도 묘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간사이 풍의 산뜻한 계란말이와 눅눅한 브래지어.  미도리가 다녔던 여학교는 엄청난 부자 학교여서 그애는 가난한 동네 출신이 자기 밖에 없다는 것에  컴플렉스를 느꼈었다. 지바 현에 사는 아이가 같은 컴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아서 좀 친해졌는데, 걔네 집에 놀러갔더니 대저택의 정원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소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더라나. 이 이야기가 유달리 우스웠던 것은 나에게도 부자 동네 학교에 위장전입으로 들어간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경구로는 비스킷 통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인생이라는 비스킷 통에는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섞여 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맛없는 것만 남는다. 맛없는 걸 먹다 보면 맛있는 것도 나온다. 또다른 경구로 "남들과 같은 것만 읽고 있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법이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은 안 해."라는 말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남들과 같은 생각을 못하는 게 인생을 얼마나 고달프게 만드는지를 알게되었고,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침울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멋진 남자 나가사와 선배의 저 말은 여전히 멋지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 시인은 스무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록가수는 스물 넷에 죽는다는 말도 여기에 나왔었나? 삶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관찰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인생은 확실히 조금쯤 살기 쉬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적 거리감과 담담한 태도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깨에 힘주고 무리해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삶이란 건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진다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오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하지만, 그게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 중에는 "스무 살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지금 다시 보면,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이도 있지만, 무사히 안정된 일상에 안착한 그와 달리 여전히 삶이 버겁기만 한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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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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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해 주셨던 이야기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그 시간에 배웠던 교과 내용은 벌써 예전에 깨끗이 지워졌는데, 이야기만은 오래 남는다. 비단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다. 공부하기가 지겨워서 몸을 비틀며, "선생님, 재미있는 얘기 해 주세요~"라고 조르던 기억,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미야베 씨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이러한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극대화된 책이 <괴이>이다.

소설의 재미를 만드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문제 제기가 서늘한 파문을 남기기도 하고, 인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독자를 끌어당기기도 한다.  감칠맛 나는 문체나 독자를 쥐고 흔드는 서스펜스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에 매력이 넘치는 소설, 그리하여 인물을 바꾸고 배경을 바꾸어도 여전히 재미있을 것 같은 소설을 만나는 것은 분명 귀중한 체험이다. 

<괴이>에 실린 아홉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들을 언젠가는 바꾸어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무서운 이야기', '귀신 이야기' 를 한 도막 해야 할 상황이 있지 않은가? 배경은 에도 시대지만 꼭 에도 시대가 아니어도 좋다. 인물은 가게의 심부름꾼 소년이지만 꼭 심부름꾼이 아니어도 좋다.  보편적인 원한과 보편적인 공포,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인 보편적인 어둠을 이토록 은근하면서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면 어디의 누가 나오든 한결같이 재미있을 것이다. 몇 번이고 정성들여 다시 읽어, '나의' 이야기 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갈무리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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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16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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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에 카이 삼촌이 처음 등장한 것이 9권이었나?

가끔 투덜거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얌전한 성격에, 엄마하고도 할머니하고도 사촌 누나들하고도 심지어는 저쪽 세상의 존재들하고도 별로 부딪히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평화주의자 리쓰와는 달리, 이 아저씨한테는 처음부터 트러블 메이커의 아우라가 보였다. 리쓰 안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할아버지와 격돌했던 전력도 있고, 리쓰한테 미칠 악영향을 막기 위해서 카이는 내보내는 게 좋다는 말도 누가 했었지. 그게 사토루 삼촌이던가 고우 삼촌이던가... 어쨌든, 시리즈 10권이 넘어가고 슬슬 신선함보다는 익숙함이 주된 감상이 되어가는 이 만화에서 카이 삼촌은 활력을 주는 존재다.

16권에서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트러블 해결 담당으로 취직한 카이 삼촌은 타고난 재능을 직업으로 연결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년이나 저쪽 세계에 붙들려 있던 학력도 재산도 없는 중년 남자에게 적당한 직업을 찾아주기 위해 작가가 꽤나 고심했을 듯하지만, 일단은 본인도 고용주도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느낌. 업무 처리 방식이 살짝 과격하긴 해도 본인 말로는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은 없다고 하고, 좀 수상하지만 차도 샀고, 더 수상하지만 여자친구(?)도 생겼고....

문제는 카이 삼촌의 일에 리쓰가 동행할 경우인데, 사촌 누나들이랑 함께 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던 '이이지마 시너지'는 상대가 카이 삼촌이 되니 자못 폭발적이다. 그걸 잘 됐다며 이용해 먹는 것이 카이 삼촌이고,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리쓰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 이 대조적이면서도 서로 닮은 숙질 콤비의 활약이 궤도에 오르며, 전회와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는 16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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