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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새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1998년 3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절대 이런 글은 못 썼을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남성 작가들이 섬세한 글을 쓰는 것은 군대에 가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농담처럼 얘기하는 일도 있다. 그러면 군대에 갔다 오는 한국 남자들은 어떤 글을 쓰는가? 성석제는 재미있는 예이다. 처음의 표현을 그대로 빌어 오자면 '이 사람이 한국에서 안 태어났으면 절대 이런 글은 못썼을 거야.'이다. 성석제에게 다행인가? 아니다. 한국에게 다행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급속한 경제 성장 뒤에서 이리저리 뒤틀리고 병든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꼬집고 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현란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삐딱하게 이죽거리는 그의 소설 속에서 독자는 조선 후기 고전 소설의 풍자와 해학을 떠올리게 된다. 개화기 이후 전통사회의 붕괴와 서양 문화의 급속한 이식과 더불어 우리가 잊어버린 줄 알았던 '한국적'인 웃음을 이 작가는 여봐란 듯 흔들어 보인다. 모순이 있는 한 풍자도 살아 있다. 조선조 말이거나 21세기거나, 중국을 섬기거나 미국을 섬기거나, 이 조선 땅 밑바닥 백성들의 피 속에는 풍자의 정신이, 위대한 거짓말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가 이것을 일깨우고 있는 한 우리에게 성석제는 소중하다.

'궁전의 새'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메르헨이 아니다. 비록 이 글이 기타 리 스캔들의 해피엔딩이나 진용이의 전설적인 성공을 통해 '나는 동화요!'하고 능청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독자 역시 배를 잡고 데굴데굴 웃으며 즐겁게만 읽을 수도 있지만, 웃음을 멈추고 이면을 헤집어 보면 어렵지 않게 심각한 메시지들을 만날 수 있다.

할아버지와 유봉 어른이 사라진 은척은 우리의 잘려진 뿌리이다. 그 자리에는 글만 알았지 아무렇지 않게 어린 아이를 공장에 내다 파는 당숙과 칼만 안 든 강도 같은 깡다구와 거짓말 '은척신문'을 발행하고 1등이 내정된 노래자랑대회를 여는 유지들이 남았다.
작가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문제들만 늘어놓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도 해피 엔딩의 메르헨 세계로 돌아가 버린다. 그를 비난하는 것도 부질 없는 일이다. 이런 도피까지 그는 해피엔딩의 고전소설을 빼닮았을 뿐인 것을.앞으로 무엇을 어찌 할지는 독자에게 남겨진 문제이다. 나? 나는 그냥 웃고 말까 한다. 위대한 거짓말의 백성은 게으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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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세노 갓파 지음, 박국영 옮김 / 서해문집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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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 '소년H'를 보고 감동받은 사람은 꼭 보기를 권한다. 종전의 폐허 속에서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간판집 점원으로 취직했던 우리의 하지메 짱은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멋진 책까지 쓴 것이다. 정말로 대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팬들은 딱 한 군데 잠깐 언급되는 구로야나기 데쯔코 씨의 이름도 찾아보시라. 이 역시 대견한 소녀이다.)

손으로 그린 예쁜 그림이 곁들여진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은 부담 없고 유쾌하며 따뜻하면서도 통속적이지 않다. 어디를 펼치더라도 기쁘게 읽을 수 있다. 단, 빨리 덮기에는 아쉽고, 책장이 자꾸만 넘어가는 것이 아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부록으로 실린 '두 번의 이상한 여행'과 '괴짜 친구의 작업장 <고양이 빌딩> 전말기'가 가장 긴 이야기인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번째 이야기가 정말로 마음에 들 것 같다. 우연히 서점에서 손에 넣었는데, 사자 마자 친구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다시 구하느라 애를 먹었던 책이기도 하다. 이럭저럭 세 권이나 사버렸다. 선물용으로는 더할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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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Game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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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마이치코는 최근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이다. 백귀야행을 처음 접할 때만 해도 그저 재미있다, 신선하다고만 느꼈었는데 그 뒤로 후속작들을 모으면서 새 책을 볼 때마다 늘 감탄하곤 한다. 대중적인 인기작가라고 하기에는 매니악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정신 산만한' 독특한 話法에 기인한다. 연재 잡지가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시간 간격을 두고 들쭉날쭉하게 그렸다는 이 작품은 그래서인지 더더욱 산만한 느낌이나, 그 산만함이 산만함이라기보다는 경쾌한 발랄함으로 보이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예상을 저만치 앞서가는 작가의 재기 탓이다.

고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2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주인공 소년들이 겪는 결코 가볍지 않은 갈등을 작가는 결코 그 안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짚어낸다. 감정의 변화는 지루한 서사가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며 (작가 자신도 주인공들의 폭력성에 놀라고 말았다고 후기에서 농담하고 있지만) 고민과 괴로움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유머의 필터를 거치며 객관화된다. 감정 과잉의 만화들에 질린 독자가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청량감이다.

그러나, 독자를 그저 킬킬거리는 관찰자로만 남겨놓지 않는 무언가, 이 소년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이 작품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과 세상을 대함에 있어 냉정한 분석적 시각을 버리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하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광기 어린 폭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면에 있는 긍정적인 측면들을 작가는 간과하지 않는다. 이들의 내면에 있는 상식과 배려심, 완성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존재를 과시하는 어린 지성이 귀엽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것은 이 책에 묘사된 일본의 대학입시이다. 공부 잘하는 녀석일 수록 고생스럽게 공부해야하는 입시제도는 상당히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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