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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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에는 1999년이라는 서점 스탬프가 찍혀 있다. 이 책으로 작가가 아쿠타가와 상 받고 한창 떴을 때.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감동받지는 못했나 보다. "우와, 이 작가 되게 똑똑해 보이는군. 멋있다!" 정도 생각했으려나.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 알라딘에서 히라노의 새 책에 대한 글을 읽고, 별 생각 없이 다시 꺼내 든 이 책에 나는 흥분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거나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쉽다거나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쾌감으로 등줄기가 떨렸다.  마음 깊이에서부터 공감할 수가 있었다.

"나는 예술 지상주의자이다. 문학을 통해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말이 단지 젊은 치기나 겉멋이 아님을 알았다. 소설 속의 화자인 니콜라 수사 또한 성스러움을 찾아 헤매는 인물이다. 성스러움, 다른 말로는 아름다움, 다른 말로는 지혜, 신, 또는 진리. 그것을 찾아 파리 대학을 떠나 피렌체로 향하던 열아홉의 열정적인 젊은이가 어느 피폐한 농촌 마을에서 만난 환상 또는 기적이 소설의 내용이다. 경건함과 열정, 비밀과 타락, 증오와 광신이 15세기 말의 기괴한 어둠 속에 소용돌이친다.

특히 마음이 끌리는 인물은 마을의 주임 사제 유스티노와 이단 심문관 자크이다. 일견 상반되어 보이지만 이 둘은 닮았다.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인간, 일생을 바쳐 추구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 자포자기하여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영혼을 학대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증오로 영혼을 파괴하는 인간.

소설의 결말에서  숭고한 열망은 범용한 자들의 증오에 짓밟히고  기억마저도 왜곡되어 사라져간다. 그러나,  작가는 죽은 이의 저작을 공부하며 연금로에 불을 지피는 니콜라를 통해 희망을 남겨 둔다. 비 걷힌 하늘 저편에서 무지개를 발견하는 중년의 니콜라에게서, 나는 너무나 진지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를 겹쳐 본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 자신을 겹쳐 본다. 스물 두 살 먹은 새파란 대학생이 쓴 짧은 소설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이해한 나. 그러나, 니콜라가 피에르를 따라가듯, 나도 히라노가 가는 길을 따라가 보고 싶다. 느리게, 그러나 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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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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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 소설"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 판사의 일주일 남짓한 짧은 모험을 따라가며, 독자는 두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근대적 정신의 태동을 느낀다. 군중 속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탄생하는 과정을 본다.

합리적 이성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 키호테와 산초는 근대인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나 국가의 가르침도 세간의 상식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만의 눈으로 비판하고 재해석하여 수용하고, 이들을 통해 성장해 간다.  돈 키호테의 해석이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이 재해석 과정은 분명 인간 정신의 능동적 움직임을 보여 준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리하여 시대의 상식과 불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독자는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깨닫는 동시에 400년의 시간을 넘어 연대감과 위로를 또한 느낄 수 있다.

문학사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만으로도 한번은 읽어 볼만한 책이다.  게다가 읽기에 부담스럽지만도 않은 것이 스페인 시골의 아름다운 풍광과 신과 국왕을 사랑하며 느긋하게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준다.  그리고, 삽입된 다양한 일화 속에 등장하는 적극적이고 과감하며 생기 발랄한 히로인들이 또 미소를 머금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번역하고 아름답게 잘 만든 책이라는 점에서 이 시공사판 완역판은 소장 가치 또한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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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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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등장인물들은 친숙하고 서술은 산뜻하고 묘사는 감각적이고 표현은 유머러스하고, 욕설조차도 걸리는 데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우와~ 정말 글 잘 쓴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책이다. 이 정도면 선물용으로 삼아도 욕 들을 일 없겠다.

고등학교 때 지리 선생님이 뜬금없이 "칠레로 이민가려고 했었는데 포기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아옌데 정권의 탄생과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한 붕괴와 관련 있는 얘기였나 생각했다. '민중' (평소 징그럽다고 느끼던 이 말이지만, 이 소설의 바닷가 사람들이라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의 희망과 아픔, 그들을 보는 위대한 노시인의 사랑과 좌절, 그리고 "불타는 인내"가 아름다운 메타포와 더불어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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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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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게 뭔가 하고 한숨을 쉰다. 영어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지나 아예 열등감에 시달린다. 세상의 중심에서 역사가 내달리는 동안 변방에 뒤쳐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테고,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압도해 오는 서구 문명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도 나만은 아니겠지. 그런 점에서 절대왕정기 오스만  술탄의 화가들인 나비, 올리브, 황새, 엘레강스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은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서구 국가의 먹물들이 너나없이 느끼는 초조감의 서곡이 아닐까.

장인에게서 도제에게로 존경과 애증, 폭력과 에로스와 더불어 비밀스럽게 이어져 온 엄격한 전통의 토대 위에서 "신이 보시는 세상"을 재현해 왔던 오스만 화가들은  "내가 보는 세상"을 그려내는 서구의 혁명적 신기술 원근법 앞에서 경악하면서도 매료된다. 격렬한 욕망과 죄책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달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번영하는 수도의 화려한 하늘 위에 서서히 쇠퇴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 눈물겨운 아름다움과 눈물겨운 쓸쓸함을 이 작가가 얼마나 생동감 있게 그려 내는지 책을 읽는 내내 이스탄불의 거리에, 빵굽는 냄새와 시장의 소음에 섞여 있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이하고 신선하며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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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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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퇴근길에 들른 대형서점 구석에서, 수트 정장 차림으로 쭈그리고 앉아 다섯 시간만에 독파했다. 수시로 낄낄거리며 뒤로 넘어가기까지 했으니 옆에서 봤으면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기 딱 좋았을 것이다. 정말 오랫만에 아무 생각 없이 유쾌하게 웃었다.

먼저 칭찬하고 싶은 것은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유머감각이고, 그 다음으로 칭찬하고 싶은 것은 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코드를 조금이라도 통하게 해 보려고 많이 노력한 번역이다.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했다는 것이 팍팍 느껴졌다.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지만, 역주들이 없었다면 이만큼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픽션의 성패는 캐릭터가 결정한다고 믿는 편인데, 천사와 악마, 마녀와 마녀사냥꾼, 적그리스도와 '놈들', 그리고 '개'까지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잔뜩 나와서 즐거웠다. 거기에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전개, 마음으로부터 공감할만한 메시지, 어떤 장면(지옥의 전사들과의 마지막 결전 장면 같은 것)은 퍽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6월의 해리포터 5학년 이후 넉달만에 만난 최고의 오락소설이다. 이번 주말에도 서점에 읽으러 갈까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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