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나무 숲 Nobless Club 1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몹시 내 취향일것같은 재료들을 모두 모았는데도, 결국 다 보고 나면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이 있다. 소설에도, 영화에도, 만화에도 그런 것들은 있다.
어떤 작품들은 이 이야기를 다른 방식의 매개체를 통해 전달한다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하지은의 소설 "얼음나무 숲"이 내게는 그랬다.
만화같은 이야기, 멀리 떨어진 이공간의 세계와 화려하게 들려오는 음악, 전체적인 이야기 자체의 환상성,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딱 만화로 본다면 재밌을 것 같은데,
소설로써는 그닥 재미를 느끼지 못하겠었던 소설이었다.
차갑고도 신비로운 얼음나무 숲의 이미지, 음악에 미쳐있는 천재들의 이야기-
충분히 내 취향과 맞을법한 이야기이지만 다 보고나서 다소 시시한 감정으로 책을 덮을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내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소설이었기 때문일까.
조금 더 환상적이고, 고요하고 신비롭기를 바랬는데, 소설은 오히려 어수선하다.
 
피아니스트인 고요와 바이올리니스트인 바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만난 친구 사이이지만,
고요가 모두가 사랑하는 천재인 바옐을 동경하다못해 존경하는 것과는 달리
바옐은 고요에게 차갑고 냉정하기만 한다.
카논 홀을 가득채운 사람들이 온통 그를 찬미해도, 자신의 음악을 들어줄 단 한명의 청중을 바라는 바옐에게 고요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바옐은 냉정히도 선을 그어놓고 만다. 천진난만한 고요와 냉소적인 바옐은 삐그덕 거리면서도 오랜 친구이자 동료 관계를 잘 이어나가고,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전설과도 같은 얼음나무숲을 찾아낸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바옐은 살인사건 용의자로 의심받게 되지만, 그가 사랑했던, 그를 지켜주고 있던 주변인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게 되고,예언자 키세가 에언하듯 이 가상의 나라 에단에는 종말이 찾아오는지  사람들은 바옐에게, 바옐의 연주에 미쳐가기 시작한다.

환상소설과 환타지소설을 구분짓는 차이가 확실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계는 분명 존재한다. 환상소설을 좋아하지만, 환타지 소설은 경을 띄고 싫어하는 내게는 애매모호하지만 그 경계가 뚜렷하다.
환타지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작가가 처음부터 한 세계와 그 세계관을 정해놓는 것 자체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거북스러운 느낌을 받기 때문이고, 이미지는 넘쳐나는데 감정적으로는 공감할수 없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를 질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얼음나무 숲"이 환상소설임에도 환타지 소설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할수 없으며 동의할수 없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분야에서 완벽한 천재가 사실상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을 다 쓰러뜨리고 결국에는 이겨버리는 슈퍼맨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결점의 천재, 고민없는 천재, 공백이 없는 완벽미는 매력이 없다.

소설속의 고요와 바옐, 두 천재에게도 고민은 존재하지만, 그 고민이 공감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귀족으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어쩌다 시작하게 된 피아노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면서,
자신이 천재인지는 모르고 또다른 천재인 바옐을 동경하며 피아니스트가 아닌 단하나의 존재이기를 바라는 심지어는 착하기까지한 고요에게 어떤 고민이 있었던가.
아무리 순진함을 간직한 어른이라 해도, 동료 음악가에게 질투 한번 느끼지 않고 그를 이겨보고자 하는 생각 한번 해보지 않는 완전무결한 선함을 과연 공감할수 있을까.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남모르게 피나는 연습을 했던 천재 바옐.
고고한듯 보이지만 물아래로는 엄청나게 발길질을 해 물위에 겨우 떠있는 백조처럼
기진맥진 달려야 천재가 될수 있었던 바옐에게도 분명히 "천재로 보이고자하는" 노력같은 것은 존재했지만, 소설을 보면서는 어째서 그의 과거와 알려지지 않는 사생활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고 가볍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어찌됐든간에, 그는 결국 천재였고, 이미 10살때부터 전 에단 사람들이 사랑한 천재이지 않았나.
왜 그들의 고민과 과거와 결점들이 조금도 와닿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취향 탓이리라.
 
문체가 속도감은 있는 반면 가벼워서 아련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소설 중반쯤 터지는 살인 사건이 따로 노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후반부 밝혀지는 진실에서는 황당하고 허탈한 웃음마저 나버려서 개인적으로 몹시 기대하던 책이었는데 많이 실망했다.
그래. 소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취향에 맞지 않을 뿐이다.
그냥 내 취향에 너무 맞지 않는 소설이었을 뿐이다.
적어도 그런대로 볼만한 소설이기는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할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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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3-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블레스클럽 시리즈 처음 알게 됐어요~ 조금 아쉬운 작품이었나봐요...
(그나저나 방금 책 주문했는데, 시즈님 ThanksTo 3개 했어요ㅋㅋㅋ
E.M 포스터 전집 <모리스> <전망 좋은 방>하고 주제 사라마구 작품 하나
잘 했죠??ㅋㅋㅋ)

Apple 2008-03-08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얼마전에 책사면서 쥬베이님 땡스투 여러개 했다는...^///^우하하하하하하
사실 쥬베이님리뷰보고 보고싶어진 책들도 몇개 있고 해서요..^^
(뭐샀는지 보면 어떤거에 땡스투했는지 알게되실듯....)
음...약간 아쉬웠어요. 그냥 제 취향과 잘 맞지 않는 책을 잘못 고른것같기도 하고요...'ㅅ'
 

2008년 3월의 책!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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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31일에 저장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8년 03월 27일에 저장
구판절판
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8년 03월 24일에 저장
구판절판
악의 심연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2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8년 03월 19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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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키퍼 2
킴 에드워즈 지음, 나선숙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마음속에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르던 때였다.
마음 착한 의사 헨리와 그보다 많이 어린, 그래서 보호본능이 절로 일던 아내 노라,
그리고 노라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아이.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한 가정속에서,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그들은 세상 어떤 것도 넘쳐나는 사랑으로 이겨낼수 있을 것만 같았던 부부였다.
그들이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랬다.
 
눈이 내리던 어느 밤, 예정보다 일찍 시작된 진통, 눈이 너무 많이 내렸기 때문에 담당의사를 급히 호출할수 없어서, 헨리는 직접 자신의 아이를 받기로 한다.
남자아이라면 폴, 여자아이라면 피비, 산통을 느끼면서도 노라는 행복하게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다. 건강하게 남자아이가 태어난 후, 머지않아 또다른 진통이 몰려오고, 노라는 폴이라 불뤼게 될 아이의 쌍동이 여동생 피비도 낳는다.
하지만 건강하고 완벽하게 태어난 폴과 달리, 피비는 다운증후군에 걸려 태어난다.
두 아이를 받아낸 헨리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준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나 선천적으로 심장이 몹시 약했고, 12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동생을 잃은 상실감으로 어머니가 무척 힘들어했던 시절을 헨리는 떠올린다.
아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자신의 유전자 때문인 것 같았고, 노라가 받게 될지 모르는 상처가 두려웠다.
그래서 헨리는 피비를 버리기로 한다. 간호사 캐럴라인에게 피비를 장애아 시설에 보내도록 부탁하고, 노라에게 할 말을 여러 번 심사숙고해 생각했지만, 노라가 폴의 쌍둥이를 찾는 순간,
거짓말처럼 충동적으로 그 아이가 죽어버렸다는 말이 튀어나와 버린다.

한번의 거짓말과 그가 평생 간직하게 될 비밀.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상실감은 노라를 나약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헨리는 그 나름대로 노라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을 안고,
튼튼하고 건강할 것만 같았던 가정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헨리는 노라가 선물해준 "메모리 키퍼"라는 카메라를 시작으로 점점 사진에만 빠져가게 되고,
그런 헨리를 바라보는 노라는 그가 쌓아가는 비밀의 벽에 부딪히며 겉돌기 시작한다.
말할수 없는 비밀을 가직한 자, 혼자만의 기억을 싸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헨리는
눈이 많이 내리던 그 날 이후로, 모든 감정을 닫아버린 듯이 살아간다.
그는 어린시절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가난이 두려워 음악을 하려는 아들에게 현실의 압력을 넣었고, 자신은 더 큰 비밀을 안고 있기 때문에, 노라의 외도를 알면서도 눈감아 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아들에게는 사진으로 현실도피를 해버리는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노라에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비춰지고, 더이상 그들은 가정이 아닌 생활을 이어나간다.
 
한편,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피비는 어떻게 되었을까.
간호사 캐럴라인은 피비를 시설에 데려다주려다가 열악한 환경에 아이를 내버려 둘수가없어
아이를 들쳐안고 도망친다.
다른 아이들에게 자연히 시기가 되면 찾아오는 행동, 몸을 뒤집고 물건을 잡는 행동마저 열성을 다해 가르쳐야 하며, 남들 다 가는 학교 한번 보내려고 세상과 전투를 해야하는 캐럴라인.
남의 아이를 데려다가 이 무슨 고생인가 싶겠지만, 피비를 키우는 동안 캐럴라인 역시 변해가기 시작한다. 고아처럼 자라나 늘 외로웠고, 늘 혼자뿐이던 생활에 자신도 모르게 지쳐있었다는 것을 캐럴라인은 피비를 키우면서 알게된다. 그리고 피비 덕에 그녀에게 사랑도 찾아온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보이는 생활, 언제나 부지런 해야하고, 잠시도 눈을 뗄수 없는 생활. 그러나 캐럴라인이 헨리에게 말했던 말처럼, 그녀는 피비를 데리고 살아가면서 피할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많이도 겪었지만, 그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성장시켜나가는 행복감도 얻었다.
 

킴 에드워즈의 <메모리 키퍼>는 하나의 선택이 인생을 얼마나 바꿀수 있는가 보여주는 책이다.
어쩔수 없다고 느껴지는 선택, 자신의 아이를 버리면서까지 가족의 행복을 바랬건만,
결국 그 가족은 행복해지지 못했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과 혼자만의 비밀은 그들의 결혼생활을 지배해버려서, 집은 서서히 균열되어가다가 결국에는 무너져버린다.
어쩔수 없는 선택과 그로인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해볼수도 있겠지만, 누가 헨리를 탓할수 있을까. 아이를 버린 죄로 그 세월동안 언제나 침묵했고, 사진속에서 늘 떠나간 딸을 그리워한 헨리를, 누가 단죄할수 있을까.
 
카메라는 비밀을 담는다는 뜻의 라틴어가 어원이라고 한다.
메모리 키퍼.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 헨리에게 주어진 카메라는 이처럼 비밀로 가득찼다.
깊은 상실감으로 가득찬 맥빠지는 책,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악인도 악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책,읽다보면 애잔한 슬픔이 비밀스럽게도 흘러넘쳐서 나도 모르게 눈앞이 먹먹해지기도 했지만, 데이비드가 딸을 그리워하며 찍어쟀던 사진처럼 무척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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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2-2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책 소개를 보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작품이에요^^
시즈님 서평으로 먼저 접하네요
헨리의 선택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하네요, 시즈님 말씀처럼 그만 탓하기도 어렵겠죠??
그의 심리갈등 양상이나 스토리전개가 무척 기대되는 작품이에요
서평 잘 보고 갑니다^^ (집중해서 3번 읽었음ㅋㅋㅋ)

Apple 2008-02-2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재밌어요..^^책도 술술 읽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부드럽고 좋습니다.
 
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가 어리다는 것, 나이가 들었다는 것.
고작 한살차이라도 아직 아이같은 사람과 이제는 어른이 된 사람은 분명 차이가 난다.
인간이 가질수 있는 감정중에 어른이 되면 조금씩 사그라들 감정,
그래서 신체적 나이가 아닌 경험적, 정신적 성숙의 나이를 구분짓는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선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번쯤은 누군가를 부러워해보고 동경해보았던 경험은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나는 조금 더 타인을 부러워했던 사람인 것 같다.
인생 전반에 걸쳐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던 나는 (조금 게을러 보일지는 몰라도) 항상 여유가 흘러넘치던 친구들을 동경했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잠을 잘 여유를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도무지 해결방법이 없을 때 차라리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나약한 의지조차도, 나는 가끔씩 부러워하곤 했다. 누군가는 불성실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해도, 내게 조금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라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타인의 그런 점을 동경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런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동경이 사라진 후에 나는 그 모든 것이 한때의 추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동경이 내게 아무런 결과를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종종 그런 동경의 추억은 꽤 쌉쌀하고 그리운 색채를 띄고 마음속을 부유한다. 나는 더이상 누군가를 부러워 하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씩은 내 안의 많은 날카로웠던 감정들이 살면서 무뎌지거나 죽어버렸다고 느낀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조금 더 컸음을 느꼈다.
꽤나 두툼한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읽으면서 책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였던 20대 초반의 감정들을 떠올리며 이 책을 보게 되었고, 책장을 다 덮었을때 쯤에는 알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내가 잃어버린 것과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열악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부모님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이 무작정 대학으로 진학한 캘리포니아 청년 리차드는 부모님의 온갖 눈치를 받으면서도 대학을 포기하지 못한다. 남들 다 가는 대학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학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도 그저 그렇고, 그렇다고 딱히 열정을 바칠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드는 학문을 찾지도 못해 방황하던 중, 리처드는 다소 폐쇄적이고 고풍스러운 햄든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평소 유럽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던 그에게 고풍스러움이 넘쳐나는 햄든 대학은 천국같은 곳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조금 할줄 아는 것이 그리스어였는데, 그리스어 고전학과에는 이상하게도 학생수가 얼마되지 않는데도 더이상 학생을 받지 않고,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리처드는 결국 그리스어 고전학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학과 굉장히 이상하다.
학생수는 고작 여섯명, 무슨 과외도 아닌 것이 이 학과에 들어가면 학교의 다른 수업은 받을수가 없게 되어있고 모든 수업과정은 교수 줄리언 모로에게 이수받게 되어있다.
자신만 제외하고는 모두들 경제적 여유가 넘쳐나는 학생들 뿐.
그들이 학교에서 유난히 독특해보이고 고립되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소위 있는 집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묘하게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풍겨나오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그들의 이런 점을 동경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여유로움과 귀족적인 취향을.
그들은 가끔 혼자 영화를 보러가고, TV도 보며, 잡지도 읽는 리처드를 새로운 인종을 보는 냥 신기하게만 바라보고, 다소 소외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여섯명의 그리스어 고전학과 학생들은 친구가 되어간다.

그리고 우발적인 한번의 살인.
리처드가 알게된 다섯명의 친구들의 비밀에 리처드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살인에 대한 실질적인 공포보다는 비밀을 서로 공유하는 쾌감이 아니었을까.
늘 동경하던 세계에서 드디어 자신이 끼어들게 되었다는 묘한 성취감과 소속감, 혹은 우월감이
결국 리처드를 돌아올수 없는 강으로 이끌어버린다.
그리고 또 한번의 계획된 살인.
이제는 더이상 발을 뺄수조차 없다.
방관자이던 그가 드디어 공모자가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동경했던 세계의 허상이 산산히 부수어지기 시작한다.
 
 
장르소설과 순문학에 걸쳐있는 <비밀의 계절>은 읽는 내내,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아직도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을 만큼 재밌는 소설이었다.
플롯 자체의 참신함 보다는 두번의 살인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는 과정이라던가, 20대 초반 학생들에게 있을 법한 타인에 대한 선망과 동경, 하나씩 잃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진지한 문체에 실려 몹시 매력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어떤 때에는 리처드였고, 또 어떤 때는 헨리 였던 나 자신의 20대 초반을 떠올리면서 입속에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심지어는 그게 살인일일지라도) 친구들과 나누어가지는 모의의 쾌감, 그로인해 자신들의 오만이 자신들을 추락시키는지도 모른 채, 때로는 냉담하고 때로는 다정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도 한가지 사건이 불러온 충격적인 죄의식으로 불안에 휩쌓이게 되는 과정들은 비단 이 친구들뿐만이 느껴본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가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는 데도 전체적으로 어떤 긴장감이 맴돌고 있어서인지 (나는 그걸 가난한 대학생과 부유한 대학생, 그들의 신분 자체에서 오는 불안정한 긴장감이라 생각한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도나 타트는 8년간 이 소설을 구상해서 써냈다고 하던데, 천재작가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데뷔작이다.
(깐깐하고 차가워보이는 작가의 외모와 책이 무척 잘 어울리지 않았나.)
 
그들은 사람을 죽였고, 그 두번의 살인은 그들에게 동질감과 고립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상상하기 조차 두려운 살인의 순간,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알게된 것은
후에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살인을 확인했을 때였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란다.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도 흥미로워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에게만 집중하느라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수 있었을 법한 이성적 판단보다 그까짓 자신들만의 비밀이 그다지도 중요했던 것일까.
아무리 잘난 척해도, 아무리 지적인 척 해도, 결국 그들이 아직까지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의 행동이 그저 청춘의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들의 오만을 깨닫고 나서야 알게된다.
그 순간 그들의 청춘은 바람앞의 촛불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죽어버리고,
서로가 꽁꽁 감춰둔 비밀을 나누던 청춘의 계절은 끝나버린다.
한낱, 아름다워서 무서웠던 꿈인듯이.
 
영미문학다운 수려한 문장력뒤에 매혹적인 비밀을 가직한 이 소설에는 지나가는 청춘의 쓸쓸함이 담겨져있다.
미스테리와 성장 이야기가 조분조분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책을 덮으면서 마음이 몹시도 먹먹했다.

p.s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번역 부분이었다.
번역의 잘되고 못됨을 떠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대화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노티나는 대화체가 거슬리기가 한두번이 아닌데다가,
아무리 고풍적인 느낌이 풍기는 소설이라 하더라도,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들을 난발하는 점이 상당히 거슬렸다.
세상의 20대 초반의 어떤 여자아이도, 안경쓴 사람을 비아냥 대며 "안경잽이"라고 하지 않고
"목사(目四)"라는 말로 지칭하지 않으리라 나는 장담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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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2-2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요. 살까말까 계속 망설이고 있는데....
시즈님의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아직도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을 만큼 재밌는 소설이었다." 요 문장!! 눈동자 크기가 급 변했습니다ㅋㅋㅋ

Apple 2008-02-22 16:59   좋아요 0 | URL
망설이지 않아도 될만큼 재밌으니 지르세요!!!^^흐흐...
저는 나오자마자 읽고 싶었는데, 당분간 가난한지라 책살 돈이 없어서 이제서야 읽었습니다.-_ㅠ

물만두 2008-02-2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Apple 2008-02-22 16:59   좋아요 0 | URL
암요~^^
 
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한밤중에 세수를 하고나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부끄럽지만, 이런 버릇이 생긴 것은 어릴 적에 밤 12시에 거울을 보면 뭐 어떻게 되더라...하는 괴담을 심심풀이 삼아 따라해보다가 생긴 버릇인데, 아직도 가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다.
거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얼굴 전체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눈동자에 집중을 하게되는데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보면 눈동자속 우주에 빨려 들어갈 것 같으면서도, 거울속의 나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다른 사람일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든다. 그다지 좋은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지만, 이게 은근히 중독적이란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는지 시인 이상은 "거울"을 통해 나를 거울속과 거울밖의 나로 분열해버리고, 현실과 이상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모순을 한탄하고 있지 않나.
 
"몸"이라는 소설을 통해 알게 된 김종일의 신작소설 "손톱" 역시 그런 모티브의 소설이다.
아이를 잃고 이혼을 경험한 아픔이 있는 여자 홍지인은 어느날부터인가 기묘한 꿈에 시달리게 된다. 자기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 살해당하는 꿈, 일어나면 하나씩 빠져있는 손톱.
그저 꿈일뿐인데, 악몽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녀는 잘 때마다 한번씩 죽었다가 살아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원인을 알수 없는 가운데, 어느새인가 자신의 주위를 머물고 있던 노숙자를 통해 "라만고"를 알게된다.
마다가스카르섬의 왕족의 손톱을 먹어치우는 자, 라만고.
고통스럽게도 이어지는 이 라만고의 의식은 하나씩 그녀의 손톱을 뽑아가고,
그녀의 연인인 세준과 친구인 민경이 함께 가세해 이 미스테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손톱은 계속 사라져만 가는데, 지인은 자신을 지탱해주던 연인도 친구도 믿을수 없어져버린다.
라만고란 무엇이며, 열개의 손톱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그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생길까.

악몽과 하나씩 사라지는 손톱, 매분 매초마다 잊혀지지도 않고 이어지기만 하는 지긋지긋한 공포와 혼란을 거듭하다가, 홍지인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재밌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이 책의 후반부, 모든 것이 밝혀지는 부분은 흔히들 말하는 이야기가 반전되는 상황이 아니라,
애초에 작가의 의도는 독자의 상상력과 따로 놀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반전이 짜잔~하고 등장해 뒤통수를 내리치는 통쾌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숙연한 마음이 든다는 것.
사람을 찌르고 난자하고 죽이는 잔인무도한 행위를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만나게 되고, 그런 장면을 신나게 읽어내려갔던 나 자신의 악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거울속의 나는 거울밖에서 살아가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선의 끝은 악이오, 악의 끝은 선이다."
누구나 절대 선일수 없고 절대 악일수 없다.
아무리 파렴치한 인간이라도, 개보다도 못한 한낫 쓰레기에 불과한 인간이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성과 죄의식은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묘한 것은 이런 것 때문이 아닐지.
나쁜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놓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가지는 이중성과 자아모순.
마음속의 악마와 천사가 끝도 없이 싸우다가 결국은 악마가 이겨버린다고 해도,
천사가 손톱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인간에게도 희망은 있다.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무섭고 잔인했던 이 소설이 참으로 긍정적으로 느껴졌고, 그래도 인간임을 믿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의 시 "거울"과 라만고의 전설을 적절히 배합시켜, 장르에 충실해 할 바를 다하면서도
주제의식을 잃지 않는 잘쓰여진 재밌는 소설이다.
진실이 후반부에 한꺼번에 밝혀진다는 점이 반전을 의식한 효과가 아닐까 싶어 아쉽기도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문제이니 넘어가도록 한다.
자기전에 잠깐 읽으려다가 결국은 끝을 보기전에는 잠을 들지 못하게 되었을 정도로 박진감이 넘쳐흐르고, 눈앞에 떠오르 듯 선연한 묘사와 첨예한 긴장감, 신경질적인 감정선이 멋드러지게 조화되어 오랜만에 한번 쉬지않고 신나게 읽어내려갔다.
"몸"부터 공포단편선, 그리고 이 책 "손톱"을 거듭하며 성장해나가는 김종일 작가의 필력이 감탄스럽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는데, 잘만든다면 멋있는 공포영화도 탄생하지 않을까 싶어서 기대가 된다.
이 책, 정말 멋지다!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신의 잠을 손톱으로 낚아채버릴 이런 소설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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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2-1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읽고 싶어요!!!
시즈님 서평만으로도 흥미진진!ㅋㅋ 국내작가의 공포소설이라 더 관심이 갑니다^^
아직 단편선말고는 읽은게 없어요...

Apple 2008-02-17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자신있게 추천합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어요.

ren 2008-03-0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시즈님 저 렌이에요 으아 이거 마구 끌리는데요

Apple 2008-03-0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헤헤..여기서도 보다니..반갑습니다..^^

하이드 2008-03-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작가 이름 적고 갑니다.

L.SHIN 2008-03-1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리뷰 만으로도 어떤 소설인지 그 긴장감이 느껴졌던 좋은 글입니다.
공포소설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가의 필력이 어떤지 궁금하군요.(웃음)

Apple 2008-03-13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
Lud-S>>네. 시간나시면 보세요.^^ 취향에 잘 맞을지 모르겠네요. 이런 소설들은 취향차가 커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