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에 선 두 부자가 여기에 있다.
세계는 망해버렸고, 그나마 생존자라고 있는 사람들은 약탈자가 되어버리거나, 또는 힘없이 당하거나, 또는 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끝없이 어디론가 걸으며 "생존"해 있을 뿐이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다. 그들이 예전에 품었을 지도 모를 희망이나, 욕망이나, 분노나, 철학이나 예술.
당장 한시간 내에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괜찮아. 아빠 여기에 있어.
그냥 그런 말들. 이 무자비하고 황량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그런 말들이었다.
세상은 계속 무너지고 있고, 그들은 살아있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지는 않다.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세상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초식동물처럼 이리저리 쫓기면서 그날의 양식을 얻을수 있으면 그 뿐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편할텐데, 왜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는 것일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니 살아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외향만을 가지고 있을 뿐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살아지기 때문에, 지친 몸을 끌고 정처없이 걷는다.
음식을 얻기위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남쪽으로 가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예정된 마지막을 향한 행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끝에 새로운 시작도 있었다.
종말후의 세상을 얘기하는 영화를 보고, 나는 다시 내게 묻는다.
살아가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건지, 아니면 살아지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건지.
대부분의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은 살아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종종 처참하고 비참해지는 인생. 그 길을 매일매일 걸어가면서 언젠가 나는 바다를 보게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이 영화가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가혹한 세계에 내버려져도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 당연한거라면, 그것만큼 소름끼치는 일이 또 있을까. 어디엔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희망때문에, 행복해질지도 불행해 질지도, 아니 그보다 먼저 살아있는 의미를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신이 있다면 차라리 희망의 불씨조차 빼앗아가버리는 것이 최소한의 배려이자 미덕이 아닐까.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 놓여진 주인공들을 통해, 살아지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삶의 고달픔과 허망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리고 소설속의 그들의 여정이 무섭도록 고달프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말들은 아름답고, 그 마지막은 슬펐던 것처럼,
이 인생이라는 길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실망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어야 겠다.
코맥 맥카시의 소설 <더 로드>에서 중요한 건 비주얼도 아니고, 플롯 자체도 아니다.
악몽처럼 처참한 공간에 내버려진 두 부자의 생존하는 방식, 아무것도 아닌 단어가 주는 마음 짠해지는 감동이 이 소설이 주는 미덕이요, 가치인데, 이 "비주얼로 풀이할 수 없는" 매력을 어찌 스크린으로 풀이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종말후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영화로 풀이되면 분명 2012같은 느낌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실망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재밌게 보았던 소설이니,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두고보자는 느낌이 강했는데,
막상 영화로 본 <더 로드>는 내 지례짐작보다 훨씬 괜찮고, 훨씬 멋있는 영화였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한 감독의 노력이 엿보이고, 실제로 아이의 엄마의 이야기가 꽤 많은 부분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소설속의 버석거리며 쓸쓸해지는 단어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비고 모텐슨의 목소리가 소설속의 그런 느낌들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준다.
황량히 무너지는 세상에 내버려진 비고모텐슨의 한없이 지친 목소리로 읊조리는 대사들은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괜시리 슬프고 가슴아프더라...
나 혼자, 몇번이나 눈물을 삼켰던지....
벅찬 감동이라고 할지, 먹먹한 슬픔이라고 할지, 어떤 감정을 남기고 영화가 끝나버렸는데,
원작만큼 재밌는 영화는 거의 본 적 없지만, 소설만큼이나 재밌었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