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어 3
후루야 미노루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한없이 0에 가까운 사나이가 여기 있다.
바다 저 깊은 곳에 죽어있는 듯, 살아있는 듯, 서서히 움직여 최소한의 삶만을 영위하는 심해어같은.
수면위로 올라오면 수압차이 때문에 터져 죽고 말아버리는 그 심해어같은 사나이가 여기 있다.
이 남자에게는 커다란 야망이라던가, 소박한 꿈이라던가, 내일 당장 누군가를 만나야할 약속이라던가, 또는 가슴깊숙이 차오르는 우울함이라던가, 미칠듯한 행복이라던가, 가고싶은 여행지라던가, 사고싶은 게임이라던가, 보고싶은 영화라던가, 만나고 싶은 이상형이라던가- 개뿔 그런것 하나 없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사람인 것이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똑같은 하루를 똑같이 이어가고-
그저, 그런 안전하고 잔잔한 심해의 생활이 타고나 얻은 본능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깨달았다. 자고, 자고, 자고, 또 자고나니 어느새 서른이 넘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나중 탁구부>를 거쳐 <크레이지 군단>, <그린 힐>,<두더지>, <시가테라>를 거쳐 후루야 미노루는 <심해어>를 내놓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낙오당할대로 낙오당한 폐배자의 인생을 또 이야기하는 것이다.
매번 똑같은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다보면 독자로써는 지루할 만도 한데, 어째 이 폐배자의 이야기들은 좀처럼 지겨워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삶에서 주어지는 욕망이 한없이 0에 가까운 이 남자의 이야기는 <두더지>의 폐부를 시침질로 봉해버리는 듯한 갑갑한 우울함도 아니오, <시가테라>의 씁쓸하고도 헤어나올수 없는 독과도 같은 청춘의 상처도 아니지만, 이 세작품은 "덜큰 남자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몹시 닮아있다.
순간 순간, 선연한 칼날에 베어버리는 듯한 섬뜩한 현실의 우연들, 하루 하루 연명해나가는 것뿐인 삶.
100에 가까워지고 싶지만, 사실은 0에 불과한 초라한 인생.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는 늘 이렇게 독기로 가득차있으며, 그 삶의 폐배감을 토닥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넌 쓰레기야, 그걸 인정해. 라고 냉혹하게 딱 잘라 말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들은 조금도 차갑지가 않다. 오히려 슬프고, 아프고, 끌어안고 싶다는 기분 마저 든다.
왜일까. 작가는 대놓고 주인공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또 그 주인공들에 동화되는 독자를 욕하는데.
아마도 이런 것과 비교해보면 되지 않나 싶다.
욕쟁이 할머니가 몇십년 동안 손님들에게 욕을 하며 음식을 내놓는 음식점 같은 매력.
또는, 나보다 더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보며 은밀한 위안을 받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듯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품게되는 이중적인 마음.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를 읽으면서 늘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다행히도 후루야 미노루의 새로운 작품 <심해어>는 <두더지>처럼 한없이 암흑에 가까운 냉소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마도 <시가테라>에서 한번, 그러한 폐배자 주인공들을 끌어안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비업무를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삶을 안일하게 연명해나가는 한남자가 친구를 찾고, 그 이상한 친구들이 그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차츰 매워가는 과정은 감동적일 정도로 즐겁고 유쾌해서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 이것은 후루야 미노루가 내놓은 또하나의 성장기이다.
즐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또 성장통이 반드시 수반될수 밖에 없는, 유쾌하지만 슬픈 성장기인 것이다.
전작 <시가테라>를 보면서 나는 울었었는데, 어쩌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심해어>의 완결을 보고나면 나는 또다시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슬픈 눈물이 아니라, 감동을 받아 나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말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느껴져도, 사람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숨어버리더라도,
심장이 뛰고, 숨이 쉬어지면 우리는 또다시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겁먹은 발걸음을 한발씩 내딛어 주위를 바라보면, 나와 똑같은 허무함을 가지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수면위로 반짝이는 햇빛도 존재하며, 그 수면위로 올라와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얼토당토 않을지도 모르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주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
한번 더 걷고, 걷는게 익숙해지면 뛰어볼 용기도 조금씩 생기는 것.
<심해어>가 내게 준 소중한 희망.
한없이 0에 가까워도 좋으니, 적어도 50은 꿈꿔봐야지.
현실이 마음같지 않아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행복할지도 모르니까.
 
"좋아하는 만화가가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면 좋아하는 만화는 많은데, 좋아하는 작가는 흔치 않아서 늘 대답할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수 있다. 바로 그 사람이 후루야 미노루라고.
그리고 그는 누가뭐래도 천재이고, 누가 뭐래도 나만의 영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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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2-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일본의 대사상가 후루야 미노루님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시는 분을 만나 너무나 반갑네요. 저는 심해어 리뷰를 쓰고 다른 사람은 누가 썼나해서 둘러 보던 중에 이 작품을 제대로 깊이 있게 감상하시고 글을 쓴 것을 보고 들어와서 보고 갑니다. ^^ 너무나 감동적으로 쓰셨네요. 정말 가슴에 팍팍 와닿네요. 정말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후루야 미노루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