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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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경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인연을 스치고 지나가고, 그중에는 사랑, 또는 짝사랑, 또는 애증에 가까운 무엇을 품었던 상대들도 많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을 언제 해봤냐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해 한 적 있는가.
나는 꽤 많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호감인지, 나 조차도 헷깔린다.
여섯살때 내 볼에 뽀뽀하고 도망치던 꼬마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볼이 발그레 해졌던 것도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아주 어린 나이에 지나갔고, 마음과 몸이 온통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것이 진짜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훨씬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든, 첫사랑의 기억은 움직였던 것 같다.
더 어릴때는 그보다 조금 어릴 때를, 나이가 들어서는 어른이 되기 직전이나 그 직후의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내가 불렀던 그 모든 첫사랑은 기억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그림자였고, 첫사랑의 이지러짐은 일종의 성장통과도 같았던 것 같기도 하다.
첫사랑이라고 부를수 있는 것은 그 후의 사랑도 있었다는 이야기.
과거 나를 스치고 간 누군가는 항상 아련한 그림자로 남게 마련이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면서 내내 그런 아련한 감정을 느꼈다.
책속 누군가의 첫사랑이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첫사랑과도 같았던 것 같다.
물론 지독히 질긴 것으로 치자면 내 첫사랑은 발끝에도 못미치지만...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과정, 단편단편 조각내어져 기억나는 일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이 짠해지는 기억속의 사소한 사건들.... 이 책에서 작가가 표현해놓은 기억의 단편들이 어찌나 현실감 있던지, 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 이야기를 듣는 듯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가 열다섯이 되던 어느 해 만났던 한나라는 여자.
간염에 걸려 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있던 미하엘을 무뚝뚝하게 돌봐주던 손.
뭔가에 홀린 듯, 그 여자의 집으로 걸어가면서 보았던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들, 망설이던 생각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런 것들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 질기도록 평생을 가슴에 품어야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시절, 미하엘의 일상의 전부였던 한나가 어느날 사라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온통 한나의 생각으로 가득차있고, 서서히 그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에 미하엘은 다시 한나를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법정에서. 죄인으로 서있는 그 한나를....

영화를 먼저 보고 봤기 때문에 내용이야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서걱서걱 부서지는 듯한 책속의 말들때문에 가슴이 아련히 아려오더라.
결코 미녀라고 할수 없는 여자, 기분 좋았나 싶은 순간 갑자기 화를 내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아서 그냥 사과하는 수밖에 없는 다루기 힘들고, 알수 없는 이 여자의 매력은 뭐였길래, 미하엘은 평생을 그녀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았던 걸까.
사랑은 사람을 만든다지 않았나. 아마도 그래서이겠지...
한나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람을 배우고,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게된 미하엘에게 한나는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 자신을 대표했던 아이콘이지 않았을까.
한나를 통해 변화된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웠을까.
책장을 거듭하면서 이런 질문은 또다시 떠오른다.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죄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죄까지 다 인정한 한나가 드디어 문맹에서 깨우쳐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게 되었을때, 글을 통해 변화된 그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과연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을까.
그리고, 이 무지한 여인의 죄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용서할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일단은 그걸 죄라고 부를수 있는 걸까.
열다섯살짜리 소년을 사랑한 30대의 여자의 사랑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어떻게 이해할수 있는 것일까.

로맨스 소설처럼 시작해, 여러가지 도덕적인 고민까지 안겨주는 소설이지만, 책속의 주인공들의 태도처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은 사랑이야기이고,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떠올랐는데, 지나간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들과 서걱대는 아련한 문장자체의 매력때문에 더 그랬으리라 싶다.
<연인>이 그랬듯,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역시 기나긴 먹먹함과 아련함을 남기는 소설이었다.
영화도 재밌었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은 책이 훨씬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영상으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운 문장들. 조각나는 기억의 단편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수...
카메라에는 담을수 없는 무형의 감정들이 책에는 넘쳐난다.
이래서, 원작만한 영화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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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2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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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이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시간은 없고, 자꾸 다른 일들이 생기고, 영화를 보러가려고 하면 시간표가 맞지 않고....
그러던 중에 그냥 놓쳐버렸는데, 뒤늦게 <시간 여행자의 아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보고 있을 때는, 반짝이던 영화의 트레일러가 생각났는데, 책을 덮을 때는 전혀 다른 감상이 이어졌다.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
우리 사랑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 역시 방해할수 없다는- 다소 낯간지럽지만 로맨틱한 상상을 하면서 이 책을 보았는데, 다 보고 나니 물론 그런 추측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정작 이 책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소설은 시간을 감내한다는 것, 시간의 무력감, 완벽한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 헨리는 시간 여행자이다.
SF 영화처럼 약물의 오용이나, 현대 과학의 승리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타고난 존재이다.
헨리에게 있어 시간 여행이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그냥 내던져 버리는 그런 종류의 "체질"에 가까운 장애이다.
막연하게 생각해보면 꽤 좋을 것 같지 않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실수들을 바로 잡을수도 있고, 미래로 갈수 있다면 면 로또번호라도 알아내거나, 오르는 주식을 미리 사놓을수도 있고, 미래의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훔쳐 볼수 있다.
그러나 시간여행에 이렇게 좋은 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시간 여행을 몇번이고 되풀이 하면서 헨리가 얻게 되는 것은 벌어질 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 벌어지고 만다는 운명의 무력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으로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살아있는 엄마를 바라보고, 사고도 막으려고 하지만, 이미 그는 그 세계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이고, 벌어질 비극은 필연처럼 피해갈 수 없다.
내일, 아니 당장 1분후에 어디로 사라질지도 모르기 떄문에, 어디론가 뿅!하고 사라져버려 알몸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타인들에게 그 모습은 상당히 이상한 모습으로 보일 뿐더러, 잘 모르는 사람 집에라도 떨어지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
때문에 헨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나러 온 성인이 된 또다른 자기자신에게 도둑질하는 법, 자기 몸을 지켜내는 법, 열쇄따는 법 등의 잘못된 것을 배울 수 밖에 없다.
한때 좋아했던 밴드의 공연장에 떨어져도, 언제 죽을 지 뻔히 아는 사람의 공연을 보고있는 것이 마냥 신나지도 않게 되고, 미래에 벌어질 일의 원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아무 시간에나 내던진다는 것이 헨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인생은 부질없고, 노력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을 다치게한 사건은 잊어버릴수도 없게 계속 되돌아 가게 되고....
그 무력감과 허무함때문인지, 헨리는 한때 오염된 인생을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이 찾아오는 건지, 찾아가는건지, 기이한 인연으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여섯살. 그리고 헨리는 서른 중반쯤 되었다.
알몸으로 들판에 내던져진 헨리를 경계하면서도 자꾸 말을 걸어오던 이 소녀는, 미래의 자신의 아내이다.
어린 시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그 소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젊은 시절 만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 여자의 어린 시절로 내던져 지는 것인지, 이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알수 없다.
헨리의 말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몸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뒤죽박죽 엉켜버리기 때문에.
나이든 헨리는 자신이 언제 나타날지를 적은 목록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소녀는 그가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준비해두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현실의 헨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고나서도 헨리가 시간 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클레어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캐릭터일까.
내가 보았던 시간여행자의 아내 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나름 자기 의견과 취향이 확실한 전형적인 요즘 여자같은 이미지인데, 클레어는 현실의 헨리를 만날 때까지 단한번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채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헨리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현실의 헨리가 자꾸 사라져버리는데도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왜 그럴까.

시간이 뒤엉켜버린 헨리를 만난 덕에, 클레어의 시간 역시 뒤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자꾸 과거로 회기해버리는 헨리를 붙잡으려 해봤자 어쩔수 없는 일임을 알고, 또 그 시간 여행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헨리를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교적 초연한 태도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얼마나 거대한 기다림인지.....
언젠가 찾아올 헨리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기다린다.
그 찰나의 순간을. 또 바보같이 기다리게 된다.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다른 시간을 멤돌게 되는 사람.
그 "의지와는 상관없는"행위의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클레어는 한없이 기다린다.
그래도 그 시간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헨리라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 뿐이니까....
이 변덕스러운 시간과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이 초조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클레어의 그런 현명함과 분명함이 나는 무척 부러웠다.

마냥 핑크빛 로맨스로 점철되어있지 않아서 더 좋았다.
시간이 주는 무력감.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버리는 운명의 속성같은 것은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서늘하게 짠해지는 뭔가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걷고 있을까.
내게 주어진 운명은 무엇일까.
두근두근하면서도 두려운 상상들이 책을 덮고나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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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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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어떤 친구는 사랑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일부러 고통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고, 막연하게나마 동감할 수 밖에 없더라.
고통없이 다정함만이 넘쳐나는 관계가 있다면 그걸로 완벽할까.
자꾸 그 사람이 눈에 밟히고,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과 상처와 상실감이 신경쓰이면서, 타인들 보다 조금 더 마음쓰게 되고, 때로는 그 사람의 상처에 내가 데이고, 그러한 모든 힘겨운 점까지도 끌어안을수 밖에 없는게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냥 편안한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때때로 불편해지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왔던 것 같다.
마냥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에서 정착은 할수 있되, 장기체류는 하기 힘들었었다.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읽으면서, 꼭 이런 기분을 읽어낸 것 같았다. 일상의 어떤 순간, 이전에 했던 사랑을 다시 마주친 그녀의 입으로 비슷한 말을 마주하고서는 그냥 그렇게 인정하게 되어버렸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이 독특하고 미스테리한 제목을 보고 나는 이 제목을 "세계 끝의 여자친구"라고 잘 못 읽기도 했고, 하루키의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리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의 말을 보고 나서야 이 제목이 일본밴드 World's End Girlfriend에서 따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World's End Girlfriend의 노래와 다르면서도 은근히 흡사한 부분들이 있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에서는 그랬다. 현실의 이야기이면서도 어딘지 아스라히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수록된 9개의 단편 모두에서 읽어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아스라한 느낌들은 내가 살아온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뻔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내가 겪었고, 다른 사람이 겪었는데, 그런데도 완전히 내것같지는 않았던 이야기들이어서 낯선 기분과 정체모를 노스텔지아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의 "끝"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느낌을 줄수 있지만, 그 끝에는 또다른 시작이 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시간들과 기억들, 그 속에서 소통하고 때로는 소통하지 못하는 것들과 그 치유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읽어냈다면 제대로 읽어낸 걸까.

온 인생을 완전히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성장은, 성장통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에게서 튕겨져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그 사람을 잃어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오면서 마주하고 스쳐지나갔던 모든 인연들이 나를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게 만든다. 그 모든 변한 모습들이 결국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렇게 이기적인 개개인을 자신 아닌 상태로 변해가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기적이 아닐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만났고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이, 좋건 나쁘건 어떤 형식으로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 커다란 세상에 내가 홀로 남겨져있지만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할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얼기설기 얽혀져있는 이 인연들 속에서도 때로 막막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다.
왜냐면,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닮아있어도 타인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나와 네가 한 몸인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메꿀수 없는 틈같은 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생도 내 인생만큼이나 힘겨웠음을 알고 토닥여주는 연민이 있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수 없는 타인과 타의 틈조차 이해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또 무엇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해하는 척 할 뿐이 아닐까.
여전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들은 남아있겠지만,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기보다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그 자체가 사랑이고 배려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너를 이해한다 생색내는 거짓말보다는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최선"이 훨씬 사랑스럽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충돌같은 사랑과 사랑을 묶어두려던 노력과 이별까지 모두 합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가끔 사는 건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를 버스를 타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는 것같을 때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내 옆으로 사람들이 오고, 또 떠나가고, 나는 막연한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별이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대할 때의 나와 저 사람을 대할 때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결국 그 다른 모습들까지 나였다.
거울에 비춰진 여러가지 모습의 나. 그들이 남기고 간 그 여러가지 모습의 나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것만 같다.

<세상의 끝 여자친구>에 수록된 아홉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상의 균열들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을 아주 약간씩 바꾸어나가듯이, 사랑이라는 충돌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끝이지만, 절망하지는 말기를. 애썼다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작가가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다소 쿨해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운, 그리고 어쩔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는 초연함 같은 것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했다.
어떤 때에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내 기억속 어떤 순간들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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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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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폐쇄와 구조조정으로 여러모로 분위기가 흉흉한 탄광촌 마을에서 꿈이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환상이며 도저히 용납못할 사치이다.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없는 돈을 쪼개고 쪼개 아들을 권투학원에 보낸다.
지지않는 사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남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워낙 없는 살림이다보니,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들에 대한 반감은 자라나고, 그 안에서 피해의식이 자라나는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폐배의식에 찌들어 승리에 쌍심지를 치켜뜬 아들들을 길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 재키는 어린 아들 빌리 엘리어트를 걱정한다.
승리에 관심도 없고, 권투에도 관심없어 보이는 어리고 나약한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연민과 한심함을 오가면서 어머니도 없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단지 꿈을 꾸고 싶을 따름인데, 마주보고 어디를 때릴까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하늘을 날로 싶을 따름인데, 발레리노가 되고싶은 빌리 엘리어트의 꿈은 이 가난하고 여유없는 탄광촌 마을에서는 코웃음 칠만한 사치가 되어버린다.

영화로 미리보았던 <빌리 엘리어트>를 원작소설로 보니 영화를 보았던 때의 나이와 소설을 보았을 때의 나이가 차이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소설에서 더 극대화 되었기 때문인지, 빌리의 시선으로 보았던 영화와는 달리, 소설은 빌리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의 감정을 더 절실하게 느낄수가 있었다.
아들이 재능이 있다는데, 도무지 뒷받침해줄만한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아버지는 끝내 죽은 아내의 피아노를 장작처럼 쪼개서, 마지막 땔감으로 쓰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더이상 자식들에게 해줄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무형의 마음에서 온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좀더 물질적인데에서 온다.
씁쓸한 얘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래왔던 것 같다.
그래서 좀더 마음을 써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해줄 만한게 없을 때, 암담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울음을 터트린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이 찡했던 부분은 빌리가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도 아니었고, 구박하고 부려먹기만 하던 형이 빌리를 위해 나선 것도 아닌, 그저 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다중일인칭이라는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화자가 되어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조금 얄미워보였던 빌리의 형도 충분히 이해받을만하게 되어있다.
그냥 소설일 뿐인데, 요즘은 이런 소설을 읽으면 자신을 소진해가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들이 자꾸만 걱정된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그러할 테지만, 또 자식을 키워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삶의 기쁨이 되는지도 알지만, 부모가 아들의 꿈을 찾아주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소설속의 아버지가 빌리를 로열 왕립 발레학교를 보내놓고 나서 얼마나 많은 석탄을 캤을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짠해졌다.

영화만큼이나 재밌는 소설이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종종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아서, 두개를 함께 보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먼저보고 소설을 보니, 상상력에 한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날아오르게 될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 이상의 상상보다는 그저 영화에 충실한 이미지로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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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는 언제까지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
가와카미 겐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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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팔청춘시절을 떠올려본다. 또 내 스무살 시절도 떠올려본다.
더 어릴 때는 인생이 시트콤처럼 이어질거라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매일 같이 다른 이벤트가 있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고, 즐거운 친구들이 곁에 있을 거라고-그렇게 상상해보곤 했다.
그때는 세상이 좀더 재밌어질테고, 좀더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와서 떠올려보니 모든 것이 환상이지 않았나 싶다. 내 다섯살시절이나 열다섯시절이나 스무살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게 하루하루가 별 일 없이 이어졌고, 일상은 늘 똑같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다를바가 없었고, 자고 일어나면 또 별다른 다음 날이 오는 것은 똑같아서 어느 순간인가 특별한 일상이 이어질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사춘기 시절에 행복한 시절이 있었던가. 물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고 우울했던 시절은 더 많았던 것 같다.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도,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불행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사춘기 시절은 그런 감정을 갖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삐뚤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감정은 불완전한 시기 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수많은 사소한 사건들 중에는 웃음이 나게 만드는 사건들보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화가 나고, 우울해졌던 사건들은 더 많았고, 어린 시절에는 이해할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과 나의 부조화때문에 분노한 적이 사실 아주 많았기 때문에, 세상은 독처럼 느껴졌었고, 나는 가끔씩 그 세상이 싫어 세상에서 도망가곤 했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아무도 없고, 내가 나이기만 하면 되었던 곳으로.
딱히 행복하지도 않았지만 불행할 것도 없었던 하루하루, 다소 어둡고 격앙되어있었고, 불만에 가득차 있었지만, 그런 유년들이 내게 독이 되는 것 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하나씩 세상을 알아가는 단계가 아니었을까.
 
사춘기가 무엇일까, 이 책을 떠올리며 생각해보았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 어린 시절과 작별을 고하고, 상실감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세상을 알아가게 되는 시절이 사춘기가 아닐까. 그런 과정에서 슬픔이나 우울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뇌할수 있는 것 역시 청춘의 권리니까.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다. 내가 지나온 사춘기의 내 모습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고, 빛나기는 커녕 감정의 혼란이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던 그런 시절이 이 소설에서는 너무도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이기 때문에. 어떤 청춘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처럼 아름답고 용기와 패기가 넘치기만 하는지 궁금하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과장된 만화주인공처럼, 매일매일이 즐겁기만 하고, 어른들의 세상에 쌓였던 분노를 꺼리낌 없이 표출하고, 쉽게 쉽게도 친구가 된다. 청춘의 극히 일부분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너무 잘나 왕따 당한 여자아이는 전학와 자신을 숨기면서 살게되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세상속으로 쉽게도 뛰어든다.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피아니스트처럼 피아노를 치고, 같은 반 남자아이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데도 별 꺼리낌도 없어보이며, 책에나 나올 법한 멋들어진 문장들을 잘도 읊어댄다. 겨우 열네살의 여자아이가. 상처도, 쑥쓰러움이나 미숙함도 없는 아이들, 감정이입이 조금도 되지 않는 과한 행동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읽으면서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은 이런 비현실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이 세상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이 너무도 쉽고 간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발 이렇게 흘러가지만은 말아다오'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순간 딱 그대로 소설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동창회만은 하지 말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동창회에서 옛추억을 되씹으며 끝이 난다. 아...이 책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였다는 생각은 왜드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초현실적인 환타지소설에 가까운 소설이었던 것 같다.
상처없는 청춘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 완전무결한 청춘 역시 비현실적이기 그지 없다.
야구와 비틀즈, 바다와 캠핑, 청춘과 풋사랑-어디선가 수백번은 봤을 법한 이미지들이 조금도 특별할 것없이 차곡차곡 이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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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6-2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한개짜리다!!ㅋㅋㅋ
그래도 이상하게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성장소설 좋아하거든요^^

Apple 2008-06-22 00:21   좋아요 0 | URL
저도 성장소설은 좋아하는데, 뭐랄까..조금 오버가..^^;;켁...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