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가 어리다는 것, 나이가 들었다는 것.
고작 한살차이라도 아직 아이같은 사람과 이제는 어른이 된 사람은 분명 차이가 난다.
인간이 가질수 있는 감정중에 어른이 되면 조금씩 사그라들 감정,
그래서 신체적 나이가 아닌 경험적, 정신적 성숙의 나이를 구분짓는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선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언젠가 한번쯤은 누군가를 부러워해보고 동경해보았던 경험은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나는 조금 더 타인을 부러워했던 사람인 것 같다.
인생 전반에 걸쳐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던 나는 (조금 게을러 보일지는 몰라도) 항상 여유가 흘러넘치던 친구들을 동경했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잠을 잘 여유를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도무지 해결방법이 없을 때 차라리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나약한 의지조차도, 나는 가끔씩 부러워하곤 했다. 누군가는 불성실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해도, 내게 조금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라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타인의 그런 점을 동경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런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동경이 사라진 후에 나는 그 모든 것이 한때의 추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동경이 내게 아무런 결과를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종종 그런 동경의 추억은 꽤 쌉쌀하고 그리운 색채를 띄고 마음속을 부유한다. 나는 더이상 누군가를 부러워 하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자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씩은 내 안의 많은 날카로웠던 감정들이 살면서 무뎌지거나 죽어버렸다고 느낀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조금 더 컸음을 느꼈다.
꽤나 두툼한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읽으면서 책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였던 20대 초반의 감정들을 떠올리며 이 책을 보게 되었고, 책장을 다 덮었을때 쯤에는 알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내가 잃어버린 것과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열악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부모님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이 무작정 대학으로 진학한 캘리포니아 청년 리차드는 부모님의 온갖 눈치를 받으면서도 대학을 포기하지 못한다. 남들 다 가는 대학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학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도 그저 그렇고, 그렇다고 딱히 열정을 바칠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드는 학문을 찾지도 못해 방황하던 중, 리처드는 다소 폐쇄적이고 고풍스러운 햄든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평소 유럽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던 그에게 고풍스러움이 넘쳐나는 햄든 대학은 천국같은 곳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조금 할줄 아는 것이 그리스어였는데, 그리스어 고전학과에는 이상하게도 학생수가 얼마되지 않는데도 더이상 학생을 받지 않고,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리처드는 결국 그리스어 고전학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학과 굉장히 이상하다.
학생수는 고작 여섯명, 무슨 과외도 아닌 것이 이 학과에 들어가면 학교의 다른 수업은 받을수가 없게 되어있고 모든 수업과정은 교수 줄리언 모로에게 이수받게 되어있다.
자신만 제외하고는 모두들 경제적 여유가 넘쳐나는 학생들 뿐.
그들이 학교에서 유난히 독특해보이고 고립되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소위 있는 집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묘하게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풍겨나오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그들의 이런 점을 동경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여유로움과 귀족적인 취향을.
그들은 가끔 혼자 영화를 보러가고, TV도 보며, 잡지도 읽는 리처드를 새로운 인종을 보는 냥 신기하게만 바라보고, 다소 소외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여섯명의 그리스어 고전학과 학생들은 친구가 되어간다.

그리고 우발적인 한번의 살인.
리처드가 알게된 다섯명의 친구들의 비밀에 리처드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살인에 대한 실질적인 공포보다는 비밀을 서로 공유하는 쾌감이 아니었을까.
늘 동경하던 세계에서 드디어 자신이 끼어들게 되었다는 묘한 성취감과 소속감, 혹은 우월감이
결국 리처드를 돌아올수 없는 강으로 이끌어버린다.
그리고 또 한번의 계획된 살인.
이제는 더이상 발을 뺄수조차 없다.
방관자이던 그가 드디어 공모자가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동경했던 세계의 허상이 산산히 부수어지기 시작한다.
 
 
장르소설과 순문학에 걸쳐있는 <비밀의 계절>은 읽는 내내,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아직도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을 만큼 재밌는 소설이었다.
플롯 자체의 참신함 보다는 두번의 살인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는 과정이라던가, 20대 초반 학생들에게 있을 법한 타인에 대한 선망과 동경, 하나씩 잃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진지한 문체에 실려 몹시 매력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어떤 때에는 리처드였고, 또 어떤 때는 헨리 였던 나 자신의 20대 초반을 떠올리면서 입속에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심지어는 그게 살인일일지라도) 친구들과 나누어가지는 모의의 쾌감, 그로인해 자신들의 오만이 자신들을 추락시키는지도 모른 채, 때로는 냉담하고 때로는 다정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도 한가지 사건이 불러온 충격적인 죄의식으로 불안에 휩쌓이게 되는 과정들은 비단 이 친구들뿐만이 느껴본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가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는 데도 전체적으로 어떤 긴장감이 맴돌고 있어서인지 (나는 그걸 가난한 대학생과 부유한 대학생, 그들의 신분 자체에서 오는 불안정한 긴장감이라 생각한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도나 타트는 8년간 이 소설을 구상해서 써냈다고 하던데, 천재작가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데뷔작이다.
(깐깐하고 차가워보이는 작가의 외모와 책이 무척 잘 어울리지 않았나.)
 
그들은 사람을 죽였고, 그 두번의 살인은 그들에게 동질감과 고립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상상하기 조차 두려운 살인의 순간,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알게된 것은
후에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살인을 확인했을 때였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란다.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도 흥미로워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에게만 집중하느라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수 있었을 법한 이성적 판단보다 그까짓 자신들만의 비밀이 그다지도 중요했던 것일까.
아무리 잘난 척해도, 아무리 지적인 척 해도, 결국 그들이 아직까지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의 행동이 그저 청춘의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들의 오만을 깨닫고 나서야 알게된다.
그 순간 그들의 청춘은 바람앞의 촛불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죽어버리고,
서로가 꽁꽁 감춰둔 비밀을 나누던 청춘의 계절은 끝나버린다.
한낱, 아름다워서 무서웠던 꿈인듯이.
 
영미문학다운 수려한 문장력뒤에 매혹적인 비밀을 가직한 이 소설에는 지나가는 청춘의 쓸쓸함이 담겨져있다.
미스테리와 성장 이야기가 조분조분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책을 덮으면서 마음이 몹시도 먹먹했다.

p.s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번역 부분이었다.
번역의 잘되고 못됨을 떠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대화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노티나는 대화체가 거슬리기가 한두번이 아닌데다가,
아무리 고풍적인 느낌이 풍기는 소설이라 하더라도,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들을 난발하는 점이 상당히 거슬렸다.
세상의 20대 초반의 어떤 여자아이도, 안경쓴 사람을 비아냥 대며 "안경잽이"라고 하지 않고
"목사(目四)"라는 말로 지칭하지 않으리라 나는 장담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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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2-2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요. 살까말까 계속 망설이고 있는데....
시즈님의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아직도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을 만큼 재밌는 소설이었다." 요 문장!! 눈동자 크기가 급 변했습니다ㅋㅋㅋ

Apple 2008-02-22 16:59   좋아요 0 | URL
망설이지 않아도 될만큼 재밌으니 지르세요!!!^^흐흐...
저는 나오자마자 읽고 싶었는데, 당분간 가난한지라 책살 돈이 없어서 이제서야 읽었습니다.-_ㅠ

물만두 2008-02-2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Apple 2008-02-22 16:59   좋아요 0 | URL
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