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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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함께 읽었었던 <악의 심연>과 <검은 선> 두 작품은 각기 나름대로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인지라,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밌게 읽어서 동생에게 빌려주었었다. <악의 심연>을 보고 "내 인생 최고로 재밌었던 소설"이라고 극찬하던 동생은 이상하게도 <검은 선>은 더 읽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너무 잔인하다나. <악의 심연>도 잔인하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상세하게 이미지를 그려볼 수는 없었는데, <검은 선>은 눈앞에서 살인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아서 괴로워서 읽지 못하겠다나. 따져보면, 동생의 말처럼 인체가 절단나는 <악의 심연>만큼이나 그저 무중력상태에서 맨살에 칼집을 내 피를 뽑아내던 <검은 선>이 잔인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선연한 묘사는 <검은 선>이 더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검은 선>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황새>는 그랑제의 데뷔작임에도 몹시 꼼꼼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크게 말하자면 황새를 쫓아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독자는 이 책을 펴는 순간, 이 책이 어떠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또 그 비밀이 소설속의 사건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주인공 루이는 이제 갓 공부를 마친 30대의 남자인데, 그의 과거는 안개속에 있다. 어려서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의 부모는 중앙아프리카에서 불에 탄채 죽었고, 자신만 살아남아 양부모의 손에 키워지게 된다. 부족한 것 없는 인생이기는 하지만, 양부모는 언제나 재정적인 도움을 제외하고는 그를 방치해 놓았었다. 루이에게는 어떠한 나른한 공허함이 언제나 존재한다. 별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서인지 딱히 원하는 바도 없고, 미래도 그다지 상상하지 않으며, 늘 의욕이 없는 젊은이인 것이다.

양부모의 소개로 루이는 막스뵘이라는 스위스 조류학자를 소개받게 되어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황새를 연구하는 막스 뵘은 나이가 들어 더이상은 황새를 따라 연구를 계속할수 없었기 때문에 루이를 자신을 대신해 황새를 연구하게 한다. 황새 연구를 위해 여행을 준비하던 도중, 막스뵘이 황새둥지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평소 심장이 건강하지 못하던 이 늙은이의 죽음은 당연한듯 심장마비사로 처리되었지만, 경찰 뒤마는 이 사인에 의문을 품고 루이에게 수사협조를 요청하게 되어, 루이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황새를 따라다니게 된다.
황새를 따라 막스뵘의 과거를 추적하던 도중, 루이는 이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는 악을 만나게 된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심장을 적출당한 사람들, 그리고 세상 여기저기를 떠도는 황새, 그리고 다이아몬드.
언뜻 매치되지 않을 소재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참 재밌게 엮었다.
거장은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건지, 데뷔작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뛰어난 얼개를 가진 소설이라, 이 소설의 등장부터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스릴러 소설가로써의 능력은 입증되었으리라.
이런 잔인무도한 행위가 실제로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긴 하고, 아무리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라 해도 아들의 심장을 자신에게 이식할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진 아버지가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 또한 들지만, 어차피 이 책은 소설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지 않은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무리 심장이 적출되고, 기이한 시체들이 발견되어도, 역시 주인공 루이의 과거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비밀에 대한 것이었는데, 모든 비밀을 알고나니 더더욱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수가 없다. 뭐니뭐니해도 인간의 악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리라.
잠도 오지 않을 열대야의 밤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스릴러 소설이다.
스릴러소설의 임무를 다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게 하는 그랑제 소설의 힘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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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7-15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그쵸? 그랑제 소설의 힘, 정말 대단해요^^
리뷰를 보니 <황새>의 장면이 막 떠오릅니다ㅋㅋㅋ
(막심 샤탕도 멋진 작가지만, 그랑제보단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해요.
너무 우연적인 설정이 많아서리...)

Apple 2008-07-15 22:54   좋아요 0 | URL
흐흐..재밌었어요.^^쥬베이님 추천받아서 샀었는데..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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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더니스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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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악몽
가엘 노앙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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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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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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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동화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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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된 눈이 다른 것을 본다' 라는 설정을 보고 영화 <디아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츠이치 최초의 장편소설 <암흑동화>는 그보다 조금 더 기발하고, 그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두렵다. 어떤 운명앞에 놓여진 무기력한 소년과 소녀들, 오츠이치의 주인공들을 하나같이 커다란 열망이나 객기나 패기같은 것은 눈씻고 찾아볼래야 없이 몽환적인 암흑으로 물들어있는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그 점이 소설을 무척 즐겁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기이한 악몽속의 주인공들같다.

 
<암흑동화>는 "눈의 기억"이라는 액자동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극장근처에서 태어나 영화보는데 재미를 붙인 한 까마귀는 아무도 몰래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말하는 까마귀는 어느 날, 눈이 없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을 모르고 대화상대가 되어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려서, 꿈에서조차 암흑뿐인 소녀를 위해 눈을 훔치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인간들에게서 빼앗아온 눈동자를 그것이 눈동자인지도 모르고 하나씩 간직하게 된 소녀는 까마귀의 선물을 텅빈 눈구멍에 끼워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훔쳐보게 되고, 그 눈의 기억에 기뻐하는 소녀를 위해 까마귀는 계속 소녀에게 선물할 눈동자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또 한명의 눈을 잃은 소녀 나미가 등장한다. 비가 오는 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무언가를 찾는 소녀가 잃어버린 것은 왼쪽 눈알. 우산을 쓰며 분주히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이 누군가의 우산에 찔려 눈동자를 잃어버리고, 그 충격으로 소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 채, 불과 몇일전 자신의 집이었고 일상이었던 모든 것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눈을 잃은 동시에 기억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 것이다.
나미와 친구처럼 지냈던 어머니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딸에게 섭섭함을 느끼면서 '너'와 '나미'라 자신을 구분지어 말하고, 학교 친구들은 모든 것에 뛰어났던 이전의 나미와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나미를 사사건건 비교하면서, 주위 모든 것이 나미를 부정하고 든다.
왼쪽눈을 이식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날, 달력에 그려진 그네타는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던 나미는 신기하게도 투명한 영상이 비쳐 그네에 앉은 소녀가 움직이고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억은 인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아무때나 찾아와 나미를 곤란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텅빈 기억을 메꾸어주는 아름다운 대리 추억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식받은 왼쪽눈의 기억, 아련히 찾아오는 백일몽속에 '나'는 남자였고, 또 다정한 누나가 있었고, 특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었다. 단지 타인의 눈을 통한 기억으로, 나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부정당하는 현재를 잊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백일몽속의 '나'가 죽게되는 장면까지 보아버리게 된 것이다.
 
<암흑동화>는 책속의 동화 "눈의 기억"과 왼쪽눈으로 타인의 기억을 보는 나미의 이야기, 또 하나 실종당한 열네살짜리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면서 진행되는 소설이다. 몹시도 기이한 환상이라 눈앞에 펼쳐진다면 엽기적이고 잔혹하기 그지 없을 이야기들이 무덤덤하게 진행되는데도 끊임없이 아련하고 몽환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무렇지도 않음'에서 오는 무심함과 악몽에서 따온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오츠이치의 매력이라면 또 매력일수 있겠다. 또 단편들에서 줄곧 보여졌던 이유없는 쓸쓸함의 감성은 <암흑동화>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서, 소설을 보는 내내 어디 갈곳도, 의지할 곳도 없을 것 같은 소녀 나미의 방황에, 마음속으로 숨겨두었던 일상적이 고독한 감정들을 조금씩 건드린다.
<Zoo>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국내에 발간된 오츠이치의 모든 소설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단편에서의 매력이 조금 더 뛰어난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장편이라는 <암흑 동화>가 재미없거나 지루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이야기였다면 더더욱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이유없이' 진행되었다가 끝나는 것이 또 오츠이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기이한 상상력만으로도 오츠이치는 내게 굉장히 마음에 드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앞으로 예정되어있는 다른 소설들도 모두 읽게 될 것 같다. 오츠이치는 내게 엄청나게 마음에 들거나, 또는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는 작가가 되어버린 것같다.
 
참고로, 표지디자인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오츠이치의 소설들중에 이 <암흑 동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소설의 느낌과도 딱 맞고, 잘 모르고 봐도 잔혹한 암흑동화가 이어질 것같은 그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의 제목이 <눈의 기억>이라고 나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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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7-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 서평만으로도 분위기가 느껴져요
소녀를 위해 눈을 훔쳐오는 까마귀의 모습은 감동적이면서,엽기적이에요
까마귀의 심리묘사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요^^
일본소설 특유의 A-B-A-B 구성인듯 합니다. 얼른 읽어봐야겠어요ㅋㅋㅋ

Apple 2008-07-10 22:56   좋아요 0 | URL
ABAB...케케케케^^;;
넵..쥬베이님은 즐겁게 보실수 있을거예요..^^ 전에 나온 Goth가 살짝 더 재밌기는 하지만, 두 작품 다 재밌답니다.^^ Goth는 곧 시중에서 팔지 못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보시려면 빨리 사놓으시는 편이 좋으실듯....=_=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미스터리 박스 1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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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일본 공포소설을 읽을 때 어느 작가의 소설이나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건 유럽이나 미국, 우리나라 공포소설에서도 느낄수 없는 느낌으로 뭔가 끈끈한 "귀기"나 "요기"에 가까운 것이 느껴진다. 예전에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 공포소설에서 느껴지는 이런 느낌을 표현하기 쉽지가 않아서 "있잖아, 간단하게 말해서, 귀신은 귀신인데, 섹시한 귀신이란 말이야."라고 말해서 친구가 엄청 웃었던 적이 있는데, 사실 그런 느낌이 많이 든단 말이다.
이상하게도, 일본 공포소설에서는 에로티시즘과 공포가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탐미의식과 관련되어있는 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미녀들의 모습을 보면 묘하게 "움직이지 않을 법한 인형같은(또는 시체같은) 미녀"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이런 약간 서늘한 탐미주의가 일본 소설 전반에 깔려있기는 있나보다.
 
제목부터 아주 특이한 (일단 발음하기부터가 힘들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히라야마 유케아키의 여덟개의 단편을 묶어놓은 단편집으로, 미리 말했듯이 일본 공포소설다운 귀기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이니 읽었지, 영화화 된다면 절대로 보지 않을 법한 소설이기도 하다. (너무 잔인해서.)
일명 에그맨이라 불뤼우는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이야기 <에그맨>을 필두로 저마다 작고 큰 반전을 가지고 있는 단편집으로 한여름,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공포소설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은 분명 만족할 것이다.
 
<C10H14N2(니코틴)과 소년-거지와 노파>는 내용과 상관없이 왠 뜬금없는 니코틴이 들어가나 했더니, 니코틴의 일어발음 니코친과 내용이 관계되어 있더라. 어느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버리는 소년 타로는 한 거지노인을 만나게 되고, 거지 노인의 불쌍함에 이끌렸는지 어느새 쌍안경으로 멀리서 그를 바라보게 된다. 친절해보이는 경찰아저씨가 난데없이 거지노인을 쥐어패는 것을 알게되고, 타로가 쌍안경으로 본 거지 인의 비밀을 언젠가는 물어보기 위해 기회를 노리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린다. 착한 마음과 폭력성이 겹쳐지는 순간, 충격적인 폭력의 본성을 목격하게 되면서도, 전혀 공감할수 없는 것은 아닌데 이유는 왜일지. 이런 생각에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또 왜일지....
 
<Ω의 성찬>에는 오메가라는 400키로그램의 거구인간이 등장한다. 조폭에서 암암리에 이익을 위해 키워지고 있는(?) 오메가가 하는 일이란, 누워서 먹는 것 뿐인데, 이 먹는 것이 문제가 된다. 조폭에서 처리한 시체들을 이 오메가가 먹는 것이다. 서커스에서 건져나왔다는 오메가, 그리고 그를 돌보게 된 한때는 수학도였던 조직 일원인 "나"의 이야기. 인육을 먹는다는 설정, 그리고 사람의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뇌에 들어있는 지식이나 기억 역시 먹게된다는 설정이 몹시 잔혹하기는 하지만, 이 단편집에서 가장 쓸쓸한 단편이었고,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이었다.

<소녀의 기도>에는 연쇄살인범의 자취를 따라다니는 소녀가 등장한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마다 찾아다니면서 만나고 싶다는 글을 쓰고 다니는 소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연쇄살인범과 접촉을 하려는 것일까. 이 단편집의 느낌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 이 단편이 아닐까 싶다. 구원과 잔혹함이 겹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이 단편집의 핵심된 느낌이 아닐까.
 
<오퍼런트의 초상>은 <에그맨>과 마찬가지로 SF공포소설이다. 예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알게된 미래의 어느 사회에서, 예술을 "타술"이라 지칭하며 타술을 사랑하는 타술자들은 처단이 된다. 그리고 타술자였던 어머니를, 그리고 타술자를 잡아들이는 유능한 오퍼런트였던 아버지를 가진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자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게된 순간, 자신도 오퍼런트인 동시에 타술자가 되게 되는데...
다소 식상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끔찍한 열대>라는 작품이다.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것들이 모두 등장한달까. 원시적이거나, 원초적인 것들에 대해서 나는 무척 공포심을 느끼는데, (예를 들어,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킹콩>에서 주인공들이 도달한 섬의 이미지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단편이 그랬다. 함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도우면 시체 한구당 천엔을 주겠다던 아버지를 따라 마닐라로 가게된 주인공이 맞딱뜨리게 된 이(異)세계. 아, 이런 것이 자연의 공포랄까. 뭐라 말할수 없이 끔찍하고 잔혹하다.
 
표제작인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그야 말로 지도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횡메르카토르는 지도 편집방식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단어이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아무튼 횡메르카토르 지도가 모시는 주인님은 택시 운전사인데, 연쇄살인범이다. 지도는 주인에게 깍듯한 예의바른 지도이므로, 주인님이 시체를 은닉할 장소라던가, 도주할 길 같은 것을 나름 연구하는 자세도 가지고 있는 착한(?) 물건이다. 사고로 주인이 죽고, 지도는 주인의 아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아들 역시 아버지를 이어 연쇄살인을 계속 한다. 그리고 주인이 어디선가 가지고 온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인피 지도는 사사건건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충정을 비웃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가장 귀엽다는 느낌이 드는 단편이었다. 횡메르카토르 지도와 편도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그리고 네비게이션이야 말로 흉측한 물건이라는 지도의 말도...)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그로테스크 하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고문기술자인 주인공 엠시(MC)와 자기 발로 죽여달라고 찾아온 여자 코코. 여기저기 꼬맨 자국이 가득한 기괴한 코코의 얼굴, 죽여달라고 찾아왔으면서 이 고문기술자를 자극하는 말을 멈추지 않는 코코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를 찾아오게 되었을까. 섬뜩한 묘사와 예상치 못했던 드라마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단편이다.
 
어딘지 강박증적이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을 갖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박증과 귀신같은 인간들의 모습이 초조하게 공포심을 자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잔혹하기도 하지만...) 단지 잔인하다고 치부할수만은 없는 소설이고, 일본소설에서 느껴질수 있는 귀기와 함께 악몽같은 몽환적인 느낌도 드는 소설이니, 불쾌한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설이 될 것이다. (언뜻, 일본에 가서 20년쯤 살다가 소설을 쓴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같다는 생각도 든다.)
자, 이런 사람들이 보면 되겠다.
이제 오츠이치의 소설은 귀엽게 느껴지고, 기리노 나쓰오도 나름 상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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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7-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집어내시네요.
맞아요, 일본소설엔 뭔가 "귀기"나 "요기"가 서려있죠ㅋㅋㅋ
일본공포영화도 그렇고요. 상당히 강렬한 작품 같습니다.

Apple 2008-07-10 22:55   좋아요 0 | URL
네. 전형적인 일본 추리소설이다..싶으면서도 묘하게 그렇지 않아보이는 부분들도 보이고...재밌는 단편집이었어요.^^

비로그인 2008-07-23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오츠이치와 기리노나쓰오가 슬슬 귀여워지기 시작한 참이였는데 댓글보고 이 책 확 사버렸습니다 ㅋㅋ 그래도 오츠이치와 기리노나쓰오 너무 좋아요! 내스타일! ㅋ
이 책 기대해볼께요~ 얼릉 읽어보고싶네요 서평 잘 읽고갑니다^-^

Apple 2008-07-23 04:49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합니다..^^ 이책 꽤 강도가 쎄요.

하이드 2008-08-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오츠이치가 귀엽게 느껴지고, 기리노 나쓰오가 상큼하게 느껴지는 ^^
<고쓰> 읽고 봐서인지, 오츠 이치의 책이 떠올랐는데 말입니다. 책이니깐 봤지, 저도 영화로 볼 수 있는 공포수위는 한없이 낮은지라, 절대절대 못 봐요. 암요.

 
GOTH 고스 - 리스트 컷 사건
오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명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100명이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
오츠이치의 Goth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모리노와 '나'는 그중에서도 무척 소수에 속할 취향을 가진 소년소녀이다.
창백한 피부에 늘 검은 옷을 입고 무표정으로 세상을 일관하면서, 고딕취향을 선호할 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죽음을 경배한다. 언제라도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기이한 욕망을 가진 범죄자들을 끌어들이는 서늘한 미소녀 모리노, 그리고 이 책의 탐정역활을 하면서도, 범죄자를 잡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일으킨 범죄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잠정적인 범죄자 타입인 "나". 이렇듯 죽음에 가까운 두 소년소녀는 근처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에 시체에 파리가 꼬이듯 본능적으로 끌어들어가게 된다.
 
장편이라기보다는 같은 주인공을 가진 연작소설 Goth는 여섯개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항상 오츠이치의 소설을 볼 때면, 이것이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상심리라기보다는, 어디엔가 이런 이상심리와 기이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이 존재할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Goth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꼭 그랬다.우리 동네 내가 잘 모르는(또는 잘아는) 어느 집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현실감.
오츠이치가 그런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츠이치의 소설이 심리묘사가 섬세하다거나, 뚜렷한 직관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괴이하다고까지 할만한 욕망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듯이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망에는 불우한 어린 시절도, 별다른 이유도 없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욕망을 어느새 가지고 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욕망은 마음속 깊은 늪에 누워 도화선이 될만한 아주 작은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듯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이유없는 이상욕망들이 소설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것이 정답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유도 없이, 삐뚤어진 구석들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살아가면서 만났던 사람들중에는 일반적으로 "좋다" "향기롭다"라고 느껴지지 않을 법한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휘발유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 매연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지하실의 눅룩한 곰팡이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목을 졸라 질식사 직전까지 가는데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소녀, 책상 서랍속에 감춰두었던 칼이 피를 부르고 있다고 상상하는 소년, 시체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을 즐기는 쌍둥이, 손이 너무 좋아 인형에서, 동물에서, 그리고 사람에서 손을 잘라내어 냉장고에 간직하는 사람, 언제부터인가 흙속에 사람을 파뭍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사람, 타인의 공포심을 즐기는 사람....
책속에는 언뜻 보기에도 비정상적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런 간단한 취향에 비견될 만큼 개인적인 취향은 되지 못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어느새인가 그런 것이 좋아 멈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딱히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욕망을 실현하는 도중 살해된다-가 정확한 느낌일듯.) 그렇다고 굳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이유없이 무기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츠이치는 천재라기보다는 이재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완벽한 소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오츠이치의 소설을 읽을때마다,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며 대단히 기이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국내에 발간된 오츠이치의 거의 모든 소설을 읽어보았는데, "아, 역시 오츠이치!" 할만한 소설이 바로 이 Goth가 아닐까 싶다. 기이한 욕망의 불편함-에도가와 란포의 불쾌한 변태적 욕망과도 다르고, 기리노 나쓰오의 절개해놓은 진실의 불편함과도 또 다르다. 또 캐릭터들도 매혹적이라, 이대로 소설이 몇권 더 이어져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츠이치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 것.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소수의 Goth 매니아들 역시 놓치지 말 것.
자, 이제 암흑동화로 넘어가보자. 오츠이치가 또 어떤 암흑의 이야기를 들려줄런지.
 
p.s 개인적으로는 책속의 두 주인공, 모리노와 "나"가 참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전형적인 고쓰족이면서, 의외로 눈치는 없고, 죽음을 불러들이는 오오라를 가진 소녀 모리노,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면서, 사회에 섞여 살아가기 위해 겉으로 엄청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며 평범함을 가장하고 살아가는 소년 ":나". 누가 죽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지 살인의 현장을 문화 답사하듯 꼭 둘러봐야만 하는 이상항 취향을 가진 사이코패스 두 소년소녀는 어딘지 귀엽기마저 하달까.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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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6-2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산문화사?? 이거 만화아니죠??-_-
시즈님이 절대 놓치지 말라니, 기대해야지ㅋㅋㅋ 잘 보고 갑니다.

Apple 2008-06-2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만화 아니예요.^^ 학산에서 책도 내기로 했나봅니다. 책 뒤에 보니까 오츠이치 소설이 학산에서만 3권 더 나오려나봐요. 쥬베이님도 꼭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