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 동화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이식된 눈이 다른 것을 본다' 라는 설정을 보고 영화 <디아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츠이치 최초의 장편소설 <암흑동화>는 그보다 조금 더 기발하고, 그보다 조금 더 아름답고 두렵다. 어떤 운명앞에 놓여진 무기력한 소년과 소녀들, 오츠이치의 주인공들을 하나같이 커다란 열망이나 객기나 패기같은 것은 눈씻고 찾아볼래야 없이 몽환적인 암흑으로 물들어있는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그 점이 소설을 무척 즐겁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기이한 악몽속의 주인공들같다.

 
<암흑동화>는 "눈의 기억"이라는 액자동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극장근처에서 태어나 영화보는데 재미를 붙인 한 까마귀는 아무도 몰래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말하는 까마귀는 어느 날, 눈이 없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을 모르고 대화상대가 되어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려서, 꿈에서조차 암흑뿐인 소녀를 위해 눈을 훔치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인간들에게서 빼앗아온 눈동자를 그것이 눈동자인지도 모르고 하나씩 간직하게 된 소녀는 까마귀의 선물을 텅빈 눈구멍에 끼워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훔쳐보게 되고, 그 눈의 기억에 기뻐하는 소녀를 위해 까마귀는 계속 소녀에게 선물할 눈동자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또 한명의 눈을 잃은 소녀 나미가 등장한다. 비가 오는 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무언가를 찾는 소녀가 잃어버린 것은 왼쪽 눈알. 우산을 쓰며 분주히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이 누군가의 우산에 찔려 눈동자를 잃어버리고, 그 충격으로 소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 채, 불과 몇일전 자신의 집이었고 일상이었던 모든 것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눈을 잃은 동시에 기억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 것이다.
나미와 친구처럼 지냈던 어머니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딸에게 섭섭함을 느끼면서 '너'와 '나미'라 자신을 구분지어 말하고, 학교 친구들은 모든 것에 뛰어났던 이전의 나미와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나미를 사사건건 비교하면서, 주위 모든 것이 나미를 부정하고 든다.
왼쪽눈을 이식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날, 달력에 그려진 그네타는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던 나미는 신기하게도 투명한 영상이 비쳐 그네에 앉은 소녀가 움직이고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억은 인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아무때나 찾아와 나미를 곤란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텅빈 기억을 메꾸어주는 아름다운 대리 추억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식받은 왼쪽눈의 기억, 아련히 찾아오는 백일몽속에 '나'는 남자였고, 또 다정한 누나가 있었고, 특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었다. 단지 타인의 눈을 통한 기억으로, 나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부정당하는 현재를 잊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백일몽속의 '나'가 죽게되는 장면까지 보아버리게 된 것이다.
 
<암흑동화>는 책속의 동화 "눈의 기억"과 왼쪽눈으로 타인의 기억을 보는 나미의 이야기, 또 하나 실종당한 열네살짜리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면서 진행되는 소설이다. 몹시도 기이한 환상이라 눈앞에 펼쳐진다면 엽기적이고 잔혹하기 그지 없을 이야기들이 무덤덤하게 진행되는데도 끊임없이 아련하고 몽환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무렇지도 않음'에서 오는 무심함과 악몽에서 따온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오츠이치의 매력이라면 또 매력일수 있겠다. 또 단편들에서 줄곧 보여졌던 이유없는 쓸쓸함의 감성은 <암흑동화>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서, 소설을 보는 내내 어디 갈곳도, 의지할 곳도 없을 것 같은 소녀 나미의 방황에, 마음속으로 숨겨두었던 일상적이 고독한 감정들을 조금씩 건드린다.
<Zoo>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국내에 발간된 오츠이치의 모든 소설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단편에서의 매력이 조금 더 뛰어난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장편이라는 <암흑 동화>가 재미없거나 지루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이야기였다면 더더욱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이유없이' 진행되었다가 끝나는 것이 또 오츠이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기이한 상상력만으로도 오츠이치는 내게 굉장히 마음에 드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앞으로 예정되어있는 다른 소설들도 모두 읽게 될 것 같다. 오츠이치는 내게 엄청나게 마음에 들거나, 또는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는 작가가 되어버린 것같다.
 
참고로, 표지디자인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오츠이치의 소설들중에 이 <암흑 동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소설의 느낌과도 딱 맞고, 잘 모르고 봐도 잔혹한 암흑동화가 이어질 것같은 그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의 제목이 <눈의 기억>이라고 나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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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7-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 서평만으로도 분위기가 느껴져요
소녀를 위해 눈을 훔쳐오는 까마귀의 모습은 감동적이면서,엽기적이에요
까마귀의 심리묘사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요^^
일본소설 특유의 A-B-A-B 구성인듯 합니다. 얼른 읽어봐야겠어요ㅋㅋㅋ

Apple 2008-07-10 22:56   좋아요 0 | URL
ABAB...케케케케^^;;
넵..쥬베이님은 즐겁게 보실수 있을거예요..^^ 전에 나온 Goth가 살짝 더 재밌기는 하지만, 두 작품 다 재밌답니다.^^ Goth는 곧 시중에서 팔지 못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보시려면 빨리 사놓으시는 편이 좋으실듯....=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