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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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애달프게 사랑했던,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생의 한가운데서 좌절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적시는 책!"
 
아사다 지로의 기담집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의 광고문구인데, 이 문구만으로도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는 얼마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살았는지 생각해보자. 또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천재라던가 완벽주의자라던가, 심지어는 신마저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들에 감추어진 결국은 1등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마인드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인간을 딱 잘라 구분지어 버리는 것 같아서 싫다. 1등보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이고, 1등이 되지 못한 인생들은 꼴찌나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 같아서 싫다.
저 문구를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또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살고 있는 것인지. 그래도 우리가 천재가 되고,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굳이 꼭 1등을 해야되는 걸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 갖추었다고 스스로가 자부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은 그야말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해서 첫단편 <인연의 붉은 끈>에서부터 아득한 서글픔이 몰려든다.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어찌나 이렇게 힘들고 쓸쓸한지, 남몰래 이불속으로 스며들어온 처녀귀신의 차가운 손길에도, 그 처녀귀신에게 안긴 아이의 따뜻한 몸에도, 짙은 서글픔의 향취가 풍겨져 나온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온전히 소유할수 없는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고, 남자에게 버림받고, 두고온 아내와 아이를 두고 애국의 가면을 쓴채 죽는가 하면, 더이상 뭘 어찌할수 없어 서서히 세상을 등지게 되는 인생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하나같이 좌절당해 깊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다. 잊지 못하고, 후회하고,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면서, 결코 행복하다고는 말할수 없게 평생을 살았지만, 사람이 있기에 기나긴 아픔의 세월들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찌나 아련하면서도 슬프던지....
한번 맺은 인연을 결코 끊을수 없었던 사람들. 가장 아름다워서 슬픈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허망하게 저마다의 끝을 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비참하게도 서글프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몰락한 후 뒷골목 불량청소년이 되었고, 그리고 소설가로 새인생을 살기까지의 아사다지로의 내력은 아마도 너무나 인간적이라 아름다운 그의 소설들을 만들어내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런 인생 역정을 겪으면서 악인도, 선인도,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이해할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유독 그의 소설에서 좌절한 인생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삶에 걷어차이고 멍투성이가 되어버린 영혼들의 행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아사다 지로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글프지만 아름다운 삶의 온기를 제대로 표현해낼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해와 연민은 아사다 지로 소설의 키포인트다.
 
가을이 되자 정체를 알수 없는 센치함에 빠지고, 또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더더욱 센치해지는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딱 그런 소설이 되었다.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읽는 내내 사는 게 뭐고, 인간은 대체 뭔지-하는 수백번은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절대 나지 않을 고민도 해보았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첫번째 이야기 <인연의 붉은 끈>을 가장 재밌게 읽었는데, 재밌게 읽었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마음이 먹먹해져서, 다 읽고 나서는 이 단편을 한번 더 읽었더니 또 슬프더라.
언젠가 한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다면 꼭 아사다 지로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도 좋으니, 적어도 인간이 된 사람은 되고 죽어야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 아닐까?
감히 평가하자면, 별 다섯개 만점에 애정별을 100개 추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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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08-31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다 지로가 전 세계의 카지노 다니는 책이 있는데요, 아저씨 본인 사진 많이 나와요- 그 책 읽으면, 아사다 지로 책 읽을때의 그런 아련함들에 대한 환상이 왕창 깨져요. ㅋㅋ 뭐, 그렇다고해도 아사다 지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중 하나입니다만.

근데, 이 책 표지 이쁘지 않나요? 전 이 책 가을보다는 겨울에 어울릴꺼라 생각했는데, 빨리 읽고 싶어지네요. ^^

Apple 2008-09-01 00:18   좋아요 0 | URL
분위기는 확실히 가을...재밌어용~^^
 
초보자를 위한 마법
켈리 링크 지음, 이은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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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그런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분명히 책을 모두 읽었는데, 책장을 덮고나서야 내가 사실은 한장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아주 어렵게 다 읽긴 했는데, 내가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마법인 걸까? 훗..
외국에서는 상도 많이 받았고, 기이하고 낯선 이야기인데다가, 어딘지 신비롭고 또 귀엽게 느껴지는 제목에다가 깔끔한 표지에다가, 어딘지 끌리는 책이어서 부랴부랴 주문을 하고 읽어내려갔는데, 어째 단편들이 거듭되어갈수록 점점 더 알수 없는 이야기들이 진행된다.
 
개인적으로 괜찮게 읽었던 단편이라면, 삐뚤어지고 기이한 잔혹동화를 보는 것 같았던 "고양이 가죽"과 왠지 샤갈의 그림이 떠올랐던 "요정 핸드백"정도랄까. (그나마도 재밌었다기보다는 독특했다는 느낌.) 나머지 이야기들은 도무지 읽고 있는데도 내가 뭘 읽고 있는지 헤매이게 된다. 이게 마법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이라면 또 그런가보다;;;; 모든 단편집이 수록된 모든 이야기가 재밌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결같이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경우도 흔치 않다.
대체 난 뭘 읽은거지?!!!!!
게다가 잘 읽히지 않아서 두번씩 읽은 것들도 있는데, 두번 읽고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걸까? 도무지 알수가 없는 일이다 .가독성을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는 나같이 얄팍한 독자에게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을까 싶다.
 
거의 우주적일 정도로 아스트랄한 책이었다. 그래서 SF상을 수상했나!!
책을 읽으면서 내내 꿈속에나 나올 이야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서도 없고, 이유불문하고 여기갔다 저기갔다 비정상적으로 이동하며,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꿈속에서는 가능하다고 느껴질 법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환상문학인가도 싶지만, 결코 몰입하게 되지는 않았다.
다 읽었는데도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이상의 서평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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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08-2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첫번째 단편만 세번 읽었어요. 그러려고 그런게 아니라, 너무 안 넘어가서 읽다보니;; 근데, 그게 제일 기억에 남네요. 난해하죠- 가끔 이런책도 좋아. 라고 생각합니다. ^^

Apple 2008-08-27 00:11   좋아요 0 | URL
푸헷...^^;; 안읽히는건 둘째치고, 이해할수 없는게 너무 많어서...ㅠ ㅠ

2008-08-2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7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의 주술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참 재밌는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도 올해 초,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악의 주술>이 시간끌지 않고 빨리 나와주었다. 전작 <악의 심연>을 읽고 난생 처음으로 내 동생이 추리소설에 반해버렸고, 이 작품은 그래서 동생이 먼저 읽고 일명 '샤타미스트'라고 칭해지는 막심 샤탕의 팬이 되어버렸다.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매력적이었던 <악의 심연>을 읽고 기대를 해서 그런지, <악의 주술>은 이상하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마도 <악의 심연>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던 끔찍하기 그지 없고 이상야릇하던 살인행각이나 한 단락 단락을 자극적으로 끝내버리는 바람에 뒤가 궁금해 못참게 만드는 스킬이 <악의 주술>에서는 좀 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심 샤탕의 소설을 즐겁게 읽는 사람이라면 또다시 즐겁게 읽을수 있는 책이 <악의 주술>이 아닐까 싶다. 잔재주는 좀 덜하지만, 다 읽고 나니 사건자체의 치밀함은 더 좋아졌다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포틀랜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법의학자가 시체를 해부하던 도중, 시체가 살아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고, 포틀랜드 한 마을에서는 거미와 관련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신혼부부만 노리는 정체불명의 살인마는 남편이 잠든 사이에 새색시를 잡아가버리고, 몇일 후 폭포수에 온몸이 텅텅 빈 상태로 거미줄로 고치를 만들어 보란듯이 전시해놓는다. 미궁에 빠진 이 사건에 당연한 듯이 우리의 주인공 죠수아 브롤린이 끼어들게 되고, 뉴욕에서 브롤린을 만나러 왔던 애너벨 역시 사건과 얽히게 된다.

<악의 주술>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살인마가 등장한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살인마는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살인마의 사연이라면 사연이랄 것은 (적어도 추리소설에서는) 그다지 독특하달 것은 없지만, 그 사람의 마인드자체가 독특하고, 또 소설의 끝 또한 독특하다. (더이상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자제하겠다.)
법의학이라던가 프로파일에 대한 지식은 이전작과 마찬가지로 풍부하게 섞여들어가 있어 막심 샤탕이 이 악의 삼부작을 끝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하고 고심했을지 안봐도 뻔하다. 또, 중반부까지는 다소 심심하게 읽어갔는데, 후반부에 몰아치는 엄청나게 현란한 반전들 또한 책을 놓을수가 없게 만드는 점인지라 이 젊은 작가의 재능을 의심치 않게 만든다. 그리고 글을 이끌어나가는 재주들만 있었더라면 그저 흔한 범죄소설중 하나였을 텐데, 이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뚜렷한 메시지가 있다. 독자는 그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수 있게 된다.
 
소설을 마치면서 막심 샤탕의 후기를 읽어보니, 이 작가가 작가치고는 젊은 나이에 이런 소설을 완성시킬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겠더라.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설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이 사람을 더더욱 용감하게, 더더욱 자유롭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자신감과 패기가 몹시 부러웠다.
소설들은 무시무시하지만, 정작 본인은 꽤 유머러스한 사람같은데, 결국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여주인공 애너벨의 사라진 남편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언젠가 다른 소설에서 만나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며 그의 다음 작품들을 기다리게 만든다. (사실 나도 이번 소설에서는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알수 있게 될거라고 예감했건만, 뒤통수를...)
아직 악의 삼부작 1편인 <악의 영혼>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시간나는대로 읽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읽으면서 막심 샤탕의 또다른 소설을 기다려본다.
아무리봐도, 이 작가 참 재밌는 사람이란 말이야...

p.s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은 역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탐정역활의 남녀주인공이 눈이 맞는다는 사실이다;;; 으아...나는 왜 이렇게 그런 것들이 싫던지... 특히나 이번은 시리즈의 마지막권이라 그런지 그런 씬들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아서 좀 견디기 힘들었다.
남녀주인공의 관계도가 비슷해서인지 내가 지금 제프리 디버의 링컨라임 시리즈를 읽고 있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뭔가.... 한걸음 피하는 남자주인공과 찝적대는 여자주인공같은 이미지랄까...;;;;) 또 자신이 만든 주인공들이 얼마나 잘난 인간들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조금 짜증이다;;;
뭐 이런 것도 내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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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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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때 꽤 유행했던 영화가 하나 있었다. 데미무어 주연의 지구 종말에 대한 영화  <세븐사인>이라고.
지금보면 아주 시시한 영화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 내게는 함께 보았던 (역시 당시 유행했던) <사탄의 인형>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던지, 그 영화를 본 날 밤에는 자다 깨어나서 아침이 될 때까지 공포에 떨며 잠들지 못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좀 이상한 아이였던지, 무섭다고 생각되면 피하지 않고 더 확인해보려는 욕망이 컸던 것 같다.
더 깊고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그것이 진실인지, 진실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의 호기심은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그보다 나이가 더 들어서야 이 세상이 삐긋거려 보여도 생각보다 견고하기 때문에 쉽게 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졌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지금에도, 내게 있어 가장 재앙이자 공포라 생각되는 것은 역시 인류의 종말이다. 정확히는 인류가 종말했는데 나 혼자 살아남는 것이다.
나는 그 적막한 재앙을 견뎌낼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에 심취했던 어린 시절에, 하도 그런 것만 생각해서 인지 여러번 악몽을 꾸었었다. 대부분 전쟁이 나는 꿈이거나, 어디선가 조난당해 무언가를 피해다니는 그런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하지만, 나는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잠들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떨었으면서도, 또다시 그런 꿈을 꾸기를 기다렸었다.
무엇이든 끝을 보고싶어했던 욕망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암흑에 취한 아이의 달콤한 악몽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종말을 다룬 문학들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면 그 시절의 섬뜩한 충격이랄지, 알수 없는 호기심은 내가 놓아버리기 어려운 무언가 이기도 한가보다.
 
이 책 <로드>를 보면서 내내 그때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 꿈들이 얼마나 생생했고 두려웠는지.
그리고 그저 책이라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그런 몽상적인 종말론에 덜덜 떠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가혹한 꿈보다도 더더욱 견디기 힘들어서 여러번 억지로 책을 덮어야 했다.
 
이름조차 명확하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은, 시대조차 명확하지 않고,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은 종말 후의 세상을 여행한다. 빼싹 마른 몸, 더러운 행색, 그저 지친다는 것이 다일뿐인 표정일 듯한 두 부자. 여행하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담은 카트와 한자루의 권총을 들고, 부숴지고 녹아버리고 깨져버린 세상 어딘가 남아있을 음식을 찾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완벽한 고요의 세계. 보이는 모든 것은 파괴되고, 퇴색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 여행길에서 인간을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구해줄거라는 희망은 애초에 없어서 또다른 생존자를 발견하면 경계하고 숨어버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코맥 매카시가 보여주었던 근거없는 생존 본능은 이 책 <로드>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그들에게는 살아있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자살을 한번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흔하디 흔한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듯, 사랑하는 누군가를 구해내기 위해, 또는 저 멀리 어딘가에 도달하면 거기서는 살수 있다던지- 그런 일말의 희망 또한 없다. 그저 인간이고 살아있는 생명체이니까 살아있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무척 간단명료한 진실이면서도 무섭도록 냉혹하다. 생존하는 것 말고는 더이상의 선택이 없다는 듯 존재하는 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라 딱잘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 걷는다. 무언가를 보기를 바라지도 않은 채, 재만 흩날리는 지옥같은 세상을.
다행히 <로드>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인간과 가장 흡사한 인간이 등장한다. 남자의 아들이라 불뤼우는 소년에게서 우리가 인간에게서 기대할수 있는 슬픔과 기쁨, 연민과 희망을 엿볼수 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아버지와는 달리 이전의 세상을 오래 겪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희미해져 꿈에서나 등장하는 문명세계에 대한 기억들은 아들을 침범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면 그리워하지도 않으리라. 그 그리움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리라.
가장 나약해보이는 존재이면서도 가장 강한 존재-
그래도 하나 남아있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바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간직한 소년이 아닐까 싶다. 절망적일 정도로 냉담한 고요속에서 단하나 빛나는 빛, 새로이 그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세대- 바퀴벌레만큼이나 강한 생명력으로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갈 또다른 세대를 남겨놓고 소설은 마무리 짓는다.
 
완벽한 고요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우리가 외로움을 즐기거나 또는 견디면서 살아갈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집 어딘가에서 가족들이 잠들어 있고, 어떤 동네에서 내 친구가 살고 있고,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세상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생각해보라.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다.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온통 회색빛으로 빛을 잃은 세상만한 지옥이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세상에 내던져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꽤 오래 고심했다.
그 참담하기 짝이 없는 고요의 세상을 그래도 살아가게 될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게 될지. 결국은 자살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버리는 용기마저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담한 재앙이 아닐까. 딱히 살고싶어서가 아니라, 살아가지기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을지...
 
책을 다 읽고 덮고 났을때 창밖에서 들려오던 매미소리에 감동이 밀려오기는 난생 처음이다.
소리가 있다는 것, 색이 있다는 것, 사람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는 것에 이렇게 뭉클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손뻗으면 닿을데 있는 곳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절망과 암흑으로 가득찬 소설속에서 내내 괴로워했으면서도 나는 묘하게도, 거대한 감동은 받았다.
엄청나다 싶을 정도의 광고공세가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니,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이 걷고 싶지 않은 잿빛 길을 무거운 카트를 끌고 주인공들과 함께 걷다가, 나는 왜인지도 모른 채 울었던 것 같다. 그들의 대화 한구절 한구절마다 마음이 저릿저릿했었다.
 
대단한 반전이라던가, 아귀가 맞춰지는 완벽한 플롯이라던가, 이야기자체의 화려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읽지 마시라. 까놓고 말하자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걷는 것이 다인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왜 참담하고도 아름다운지는 얻을수 있는 사람만 얻으시길 바란다.
그저 즐기시길 바란다.
황야처럼 거칠고 아지랑이처럼 아득한 코맥 매카시의 단어와 문장을.
그가 보여주는 이보다 가혹할수 없는 적막한 지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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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9-0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에요.
특히 마지막 문단은 <로드>에 대해 아주 객관적으로 말해 주셨어요^^
저도 <세븐사인>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그 당시엔 왠 종말론이 그리도 많았는지-_-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3 - 나의 식인 룸메이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2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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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표지에 작은 글씨를 주의하라.
이 책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나왔던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그 세번째 책이다.
하긴 제목이 낯설다고 해도 강렬한 제목과 그로테스크한 표지 컨셉덕분인지 본격적인 호러단편집임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겠지만 말이다.
1편부터 3편까지 중복되는 작가들의 이름도 보이고, 또 그 작가들의 발전모습도 엿볼수 있다.
전체적인 감상부터 먼저 말하자면, 전작들보다 "호러"라는 측면에서의 느낌은 많이 줄어든 느낌이지만, 이전작과는 확연히 달라진 면모들이 많이 보이는 책이고,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면에서는 지금까지의 시리즈중에서는 최고이다.
좀 더 다듬어져 매끄러운 문장력, 색다른 소재들, 단지 "여름에 읽는 무서운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서, 이제까지의 작품들에서 느껴졌던 한계를 극복하는 점이 돋보여 읽는데 무척 즐거웠다.
 
 
신지수:나의 식인 룸메이트
표제작인 "나의 식인 룸메이트"는 잡지사 기자인 주인공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니 식인 괴물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어, 그 괴물에게 3일에 한번씩 먹이감을 제공하기로 계약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단편이다.
소재의 강렬함 덕분에 "공포소설"이라는 느낌은 톡톡히 받을수 있는 작품이지만, 강렬한 소재를 다소 평이하게 풀이해 나간것 같아서 아쉽다. 마지막 임팩트가 더 강했으면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단편이다.
 
장은호:노랗게 물든 기억
어린 시절 질투가 났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항상 질투가 났었던 그 아이의 예쁜 엄마는 아이가 죽고난 후에 매일 주인공을 엘레베이터에서 기다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어간다.
이 단편은 어쩌면 아주 뻔해질수 있는 이야기이다. 아파트 괴담같은 것은 질리도록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무척 유치해질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딱 좋은 호흡과 서서히 첨예하게 파고들어가는 심리묘사가 무척 잘되어있어 유치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던 작품이다. 오히려 한밤중에 읽으니 초조해지면서 살짝 무섭기도 했다.
 
신진오-공포인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공포가 극대화 되는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감기처럼 찾아와 개인을, 가정을, 사회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포비아에 시달리느라 본분의 생활을 잊는 사람들-그리고 주인공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그 공포전염병에 물들어간다.
우리나라 공포소설에서는 볼수 없는 소재를 가진 소설로, 묵시록적인 느낌이 강한 소설이다. 어찌보면 SF 공포소설이라고도 할수 있지 않을까. 안정적인 묘사와 무리하지 않는 전개가 마음에 들었고, 이 단편은 장편으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명희-담쟁이 집
언니와 함께 담쟁이집에 가게된 주인공은 그 집에 가게된 이후로 이상하게 변해버린 언니를 보게된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갖춰져 있을 것 같은 담쟁이 집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원하는 게임이나 인형은 다 가지고 올수 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변해버린 언니가 무서워 그 집에 가지 않기로 하는데, 자꾸만 주인공을 담쟁이집으로 데려가려는 언니.
이유는 무엇일까.
신비스러운 느낌과 어딘지 알수 없는 불안함이 멋지게 표현된 단편으로, 마지막 반전에서 슬퍼지는 단편이었다. 지난번 단편집에서 "들개"라는 강렬한 단편을 실었던 우명희 작가의 다소 유한 단편이었는데, 이런 느낌도 무척 좋다.
 
엄성용-스트레스 해소법
우유부단한 성격탓에 여러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는 남자. 마치 짜기라도 한듯, 현실은 그의 목을 점점 죄여온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을 죽이라고.
내가 뽑은 이 단편집 베스트 오브 베스트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단편이다.
매끄러운 진행과 주인공이 광기에 시달리게 되는 충분한 이유를 적제적소에 꼽아넣는 센스, 그리고 주인공과 함께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호흡도 몹시 좋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돌만하다. 현실적으로 가장 와닿는 이야기였다.
 
김준영-붉은 비
어느날 붉은 비가 내리고, 그 비를 맞고 짐승들이 죽는다. 슬픈 마음을 뒤로한 채 애완동물을 묻어야 하는 사람들, 거리에 무더기로 죽어있는 비둘기와 개, 고양이들...
이런 이상현상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하기위해 집을 나선 주인공은 버스안에서 거리에서 죽은 동물들을 치우고 있던 환경미화원들이 다시 살아난 죽은 동물들에게 습격받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동물들과의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스티븐킹의 몇몇 소설들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기현상으로 인해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들과의 싸움을 다루고 있어서일까. 그러나 이런 작품이라면 스티븐 킹도 두렵지 않다. 역시 내가 뽑은 이 단편집 베스트 오브 베스트! 그리고 이 작품도 장편으로 본대도 재밌을 것 같다.
 
전건우-선잠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은 사람이 불면증에 걸려버린다. 계속되는 선잠속에 혼자만 살아남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병원에 찾아가 불면증을 호소하던 중, 의사의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사고당시 그는 혼자였고, 그에게 죽은 여자친구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고...
한국공포문학 단편선에서 이전에는 받을수 없었던 느낌을 받았던 단편이다. "어라..."하고 어느 순간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선잠속에 꾸는 꿈처럼 몽롱한 느낌이 가득찼던 단편. 불가사의하게 진행되던 이야기의 풀이도 좋았고, 호흡도 좋다.
역시 내가 뽑은 이 단편집 베스트 오브 베스트!
 
이종호-은혜
치매에 걸린 어머니,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 남동생에 여동생까지 딸려있는 이런집에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오게된다.
은혜라는 이름처럼 예쁘고 착한 이여자는 맏형의 애인으로 갑자기 집에 등장하더니,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아내가 된다. 군소리 한마디 없이 시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모잘라, 일요일에는 봉사까지 가는 이 도가 지나치게 착한 여자- 그런데 어째서인지 정이 가기는 커녕 의혹만 깊어져간다. 이번이 네번째 결혼이라는 불가사의한 과거와 함께.
매끄러운 전개와 안정적인 느낌이 편안하게 읽을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는 하지만, 결말이 평이하다는 느낌은 어쩔수가 없다. 사실 읽으면서 나는 구미호같은걸 상상했다나 뭐라나...
 
황희-얼음 폭풍
미국 이민가정의 이야기이다. 가진 돈을 모두 카지노에서 잃어버린 남편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때마침 불어닥친 눈폭풍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다. 게다가 학교갔던 딸아이는 돌아오지 않는 갑갑한 상황. 주인공은 딸아이를 찾으러 눈속을 내달린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정체가 작품에 너무 많이 반영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꼭, 남의 일기를 읽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캐릭터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작가가 놓쳐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불편한 생각으로 이 단편을 보았던 것 같다.
지난번 책에 넣었던 "벽곰팡이"나 이 작품이나, 둘다 미국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역시 미국에서 이민중이라는 작가의 내력을 함께 읽어서인지 작가가 지나치게 주위에서 소재를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더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두 단편에서 거의 비슷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니, 어쩐지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종일-불
주인공이 조회시간에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죽이는 장난을 치고 있던 도중,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한 소년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 어딘지 무덤덤한 것이 알수 없는 불안감을 주는 녀석. 그 녀석에게는 불을 일으키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저 나름대로는 호의인지, 주인공을 괴롭히려던 남자를 불로 태워버리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데,마치 친한 친구처럼 들러붙어 하는 말이, 이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면 네 부모고 누나고 다 태워버리겠다는데..
안정적인 느낌의 단편인데 딱히 재미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재밌는 것도 아니었다. 김종일 작가라면 조금 더 강렬한 소재를 써주길 바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단편은 무척 평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단편집을 다 읽으면서 확연하게 느낀 것은, 거의 모든 작품들의 완성도가 무척 높아졌다는 점과 읽기가 훨씬 편해졌다는 점이다. 1편은 강렬한데 비해, 완성도면에서는 조금 아쉬웠고, 2편은 안정적인데 비해 소재는 아쉬웠었는데, 1,2편의 장점을 적절히 살려서 단편을 읽는 즐거움을 한껏 주는 단편집이다. 거의 모든 작품들이 재밌었고, 소재들이나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딱 적당하다.
찌르고 죽이는 장면 자체가 공포인 것만은 아니다. 공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물질적인 잔혹성 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심을 극대화 시키는 긴장감이 아닐까 싶은데, 이 단편집의 거의 모든 단편들이 그런 긴장감을 충실히 주고 있어서, 아주 후련하고 즐겁게 읽을수 있다.
(말 그대로 "신나게 읽어내려갔다.")
내년에도 나올 단편집을 기대해본다. 해가 갈수록 좋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내년에도 굳게 기대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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