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원리

 바람구두님이 소개시켜 준 정치성향 테스트에서 저의 좌파(진보, 어머니의 원리)적 성격과 우파(보수, 아버지의 원리)적 성격을 비교하였습니다. 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1차원적인 측정을 경제와 사회로 나누어 2차원적으로 나누어 측정하였습니다. 한편 다른 면을 본다면...


* 또 다른 측면에서의 진보와 보수


 예전에 목사님에게 설교 말씀 중에 다른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분이 잘못을 했는데, 한편의 사람들은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 다른 한편은 용서와 관용들 베풀자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잘못이면 용서를 하고 큰 잘못이면 처벌을 해야 되지만 구체적 사건, 사실은 이야기를 안 하셨으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의(처벌)와 사랑(용서), 둘 중 하나입니다. 처벌에 대한 반대 의견은 ‘용서야 말로 큰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주장하는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용서를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은 ‘불의를 서로 서로 덮어준다면 어떻게 세상에 공의(정의)를 주장하겠는가? 오히려 세상에 당당하게 서려면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확인하고 그에 해당하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모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은 처벌(이성, 아버지의 원리, 보수)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용서(감성, 어머니의 원리, 진보)편에 서겠습니까? 당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생각하며, 또 요즘 사회에서 논쟁이 되는 과거사 정리에 대한 생각을 하며.


 저의 선택은 ... 굳이 말을 안 해도 저를 아시는 알라딘너 분들이 먼저 아시더라고요.


* 에피소드 - 권위와 자유


 중학교 도덕시간에 자유롭게 질문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친분이 없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인사하는 것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갖고 인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마음에 따라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느냐?


 선생님은 인사를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의 답이 아니고,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형식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쳐 관혼상제 의식에 얽매여 있어 가정의례 준칙이라는 것까지 만든 나라다. 인사의 경우로 돌아가면 인사의 마음은 본인만이 알지만 인사의 형식 즉 인사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었다. 마립간 한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상당히 서구화(즉 자유주의 성향)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경우는 존경하는 선생님에게만 인사를 하고, 일본에서는 학교 내에서는 모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되 학교 밖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에게만 인사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선생님에게 학교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인사를 했었다. (과거형으로 바꿔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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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소드에 대한 딴 소리 ^^
매직식...
학교 내 - 교수님이 라는 걸 내가 알고, 나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아시는 분 모두에게 인사를 드린다.
학교 밖 - 교수님이 라는 걸 내가 알고, 나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아시는 분 모두에게 인사를 드린다.
단, 학교 밖에서는 되도록 인사를 삼간다. 때와 장소를 가려 잘 판단한 후, 인사를 드려도 교수님들 시간에 또는 상황에 방해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만 인사드린다.
 
 전출처 : ▶◀소굼 > [펌]세계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 풀려

세계 7대 수학 난제 중 하나가 풀린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그리고리 페렐만이라는 수학자는 2년전 세계 7대 수학 난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가설(Poincare Conjecture)"을 증명하는 내용을 한 웹사이트에 실었다. 페렐만 박사는 당시 미분방정식, 위상수학, 엔트로피, 등을 총동원해 푸앵카레 가설을 풀어냈다.

푸앵카레가설은 2차원적 계산이 3차원 공간에 대한 문제를 푸는 데도 적용된다는 가설로 150년전 가설을 만든 푸앵카레도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이 증명은 그동안 수학자들 사이에서 검증 여부를 놓고 공방이 펼쳐졌다. 페렐만 박사의 증명은 올초부터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명확한 검증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푸랭카레가설은 증명에 대한 검증만 수년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스탠포드대학의 케이스 데브린 박사가 어제(6일) 영국의 과학페스티발에서 "많은 수학자들이 페렐만의 증명이 맞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혀 학계에서 공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데브린 박사는 "다만, 명확한 결론을 얻을 때까지는 수개월이 더 필요하다"며 "설사 페렐만의 증명이 틀리다고 해도 그가 제시한 내용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클레이수학연구소는 지난 2000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 7개를 푸는 사람에게 상금 백만달러를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페렐만은 자신의 증명이 검증되면 상금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정작 페렐만은 상금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페렐만 박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러시아 아카데미 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에 은둔해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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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empas.com/show.tsp/20040907n01894/

한형훈 기자 hhhan@edaily.co.kr
//
대단대단....ㅠ_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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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2001년 바야흐로 21세기의 첫 해를 맞이한 인류는 더 이상 '묵시록의 네 천사' - 원래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1916년 이바녜스(Vincente Blasco Ibanez)의 소설에서 흰말은 전쟁, 붉은 말은 학살, 검은 말은 굶주림, 푸르스름한 말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 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리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21세기, 그 첫해가 미처 저물기도 전이었던 9월 11일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에 의해 붕괴되었고,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죄 없이 희생당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21세기가 결코 20세기와 다르지 않으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20세기에 미처 풀지 못했던 산더미 같은 과제들이 누적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이제 그 1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의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1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가 반대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이라크로 확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겠다는 명분 아래 시작된 '걸프전' 그리고 계속되는 미국의 이라크 경제 봉쇄 조치로 이라크에서는 오늘날 6분에 1명 꼴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다. 그 동안 최소 75만 명에서 1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미국의 공습과 영양실조, 의약품 고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라크 정부측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밝힌 수치이다.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비난한다. 물론 모든 근본주의는 인류의 화합에 있어서 가장 나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자행된 인류에 대한 모든 범죄가 갖은 도덕적 명분을 들이대었던 것처럼, 미국이 신세기에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란 것은 결국 미국 근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우리 인간들은 시계가 12시를 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황급히 촌각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은 종이 울린 뒤에 해결하기엔 너무 늦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정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 무엇이 옳고 선한 것인지 판단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는 먼저 윽박지르기에 앞서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항거하는 방법 이외에는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락하지 않은 그들의 오만에 있었음을 깨우쳐야만 한다. - 바람구두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마이클 네이글러(Michael Nagler)

  독일의 덴마크 점령통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운동은 잘 조직되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함으로써 점령당국을 심히 곤혹스럽게 하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덴마크인들은 나치의 유태인정책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 정책은 1943년 가을 어느 날 절정에 달하였는데, 독일 함대가 덴마크 거주 유태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코펜하겐 항구로 들어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 모르게 누군가가 지하조직에 이 사실을 알렸고, 밤새 7천2백 명의 유태인들 ― 사실상 덴마크 유태인들의 전부에 해당하는 ― 이 대기중인 함대의 코밑에서 중립국 스웨덴으로 빼돌려졌던 것이다. 고기잡이배들과 온갖 뜰 것들로 구성된 잡다한 소형 선단은 험한 바다 위에서 솟구치고 떠밀리면서도 이튿날 아침까지는 혼잡과 배멀미에 지친 승객들을 스웨덴으로 데려다놓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스웨덴 국왕은 유태인들에게 망명을 허가해주고 싶었지만, 나치의 존재에 겁을 먹고 있었다. 아마도 국왕은 스웨덴의 중립성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때 덴마크의 저명한 물리학자가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들이 처한 딜레마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국왕에게 조용히 자신의 말을 전달하여, 만일 유태인들에게 망명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자신 자진해서 나치의 손에 스스로를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그 저명한 물리학자는 닐스 보어였고, 스웨덴 국왕은 즉각 유태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내가 보어의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여기에서 그의 과학과 그의 인간적인 용기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어는 양자물리학에 있어서 '코펜하겐 해석'의 배후에 있는 천재였다. 아인슈타인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물리학의 성과는 실재의 본질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실재는 지극히 이상스러운 것이다. 새로운 물리학의 우주와 초시간적인 신비체험가의 우주 사이에는 매우 흥미롭고 암시적인 평행관계가 있다.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감각과 물질에 대한 의식의 우월성은 ― 간접적으로 ― 비폭력주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견고한, 덩어리진, 딱딱한, 꿰뚫을 수 없는, 움직이는 입자들"로 구성된 뉴턴의 우주는 필연적으로 지금 우리가 벗어 나오고자 애쓰는 자연과 생물들에 대한 폭력의 세계를 초래한다.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과 매스 미디어의 공식적 과학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물질적 역학의 세계는 ― 물질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를 만족시키는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 희소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폭력을 낳는다.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쳐도 나 자신을 포함한 보다 큰 전체는 해를 입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그 그림이 창조된 세계가 갖고 있는 중심적 모순을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1768년에 조셉 라이트라는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때는 산업시대의 시초로 서구세계에서 땅과 인간의 오래된 연결의 전통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떠돌이 과학교사인데, 그는 한 개의 진공펌프를 홀린 듯한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펌프질을 통해 유리로 된 새장에서 공기를 빼고 있다. 그리고 새장 안에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사람들은 새가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말해 새장 안에 공기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기술의 힘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관객으로서 우리가 달리 받는 인상은 무엇인가?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진정한 극적 흥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펌프와 공기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 남자어른이 작은 새 한마리를 죽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이 드러내는 진짜 이야기는 청중에게 주술을 걸고 있는 과학자와 당혹해하는 아이들 사이의 대조에 있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그들은 '다만 어린애들일 뿐'이며, 그래서 어른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손상을 가할 때 우리들에게 경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민감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가슴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들 ― 라이트의 그림 속의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 ― 을 우리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라이트가 진공펌프의 힘을 과시하는 근대기술의 사제 ― 그럼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내세우는 ― 를 묘사했을 때 시작되었던 호(弧)의 다른 쪽 끝에 서있다. 근대기술 ― 기술주의라고 해도 된다 ― 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 중 일부는 그 결과에 너무나 기막혀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하여 저질러놓은 것은 1768년이나 1968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민감성으로써 생명을 지켜보고, 가장 계몽된 어른들의 지혜로써 생명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과학은 지난 백년 동안 뉴턴의 '원시적 입자들'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왔다.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놀라운 발견을 통하여 물리학은 이제 사물을 물질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의식에 관여하는 에너지의 변화로 본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 대한 관점 ― 뜻밖에도 우리 문화의 가장 이른 신화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 이 오늘날 비폭력주의와 에콜로지의 배후에 있는 상호연관성의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직관을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 보어를 자기의 동포가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를 거부한 인간 보어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근거가 거기에 있음을 느낀다.
  
1938년 여름 스웨덴으로 피신하기 직전 닐스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열린 한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모임에서 연설을 한 바 있다. 이 '양자역학의 할아버지'는 그의 유명한 상보성이론으로 일반청중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이론은 인간이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어서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두가지 상호배제적인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드는 예로서, 빛의 광자 또는 그밖의 다른 양자 실체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자나 파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날 이 국제물리학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개념을 전자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에 적용시켰다.

  우리는 진실로 다양한 인간문화들이 서로서로에게 상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문화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조화로운 균형을 대변하며, 그러한 조화를 통해서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발전하여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새로운 삶의 모습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에 독일대표들은 퇴장하였다. 결국, 그 독일인들은 우선적으로 나치당원들이었고, 그 다음 순서로 '과학자들'이었던 셈이다. 보어의 발언이 드러낸 세계관은 나치당원들의 가치에 완전히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불관용(不寬容)이라는 나치의 교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적인 차이들은 우리가 존중해야 할 자연적 계획의 일부이고, 개별 민족과 공동체와 개개인들은 저마다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기의 소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누구라도 하나의 전체 가족으로서 자기실현을 이루려면 서로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디어는 파시스트들에게는 쓰디쓴 독초였다. 모든 유정물이 저 나름의 귀중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파시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치의 유럽점령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을 쓰려는 의지에 결부하여 몇 가지의 불쾌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미지이다. 히틀러는 이 점에 있어서 노골적이었다. 그는 어느 날 윌리엄 쉬러 ― 히틀러와 간디 두 사람 모두를 실제로 잘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 와 점심을 함께 나누며 자기가 거둔 성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사람은 저마다 가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엔 그 가격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 놀라실 겁니다."
  인간존재를 하찮게 보는 데에서 폭력이 나오고, 인간존재를 높이 보는 데에서 비폭력이 나온다. 폭력은 우리를 갈라놓는다. 비폭력은 우리들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신비스러운 통일성 ―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숨겨져 있는 영광이다 ― 에 직접 호소한다.

  나치 과학자들을 쫓아냈던 닐스 보어의 발언은 1938년 당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는 파시스트의 세계관이 '획일성을 통한 분열'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질서개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았다. 파시스트들은 오직 하나의 민족과 정치질서만이 ― 그러니까, 오직 한사람만이 ― 가치있고, 진정하며, 깨끗할 뿐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열등하고 위험한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유일한 올바른 길'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배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대한 해독제는 헤겔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부른 아이디어였다.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스스로 발전하여"라고 한 보어의 표현을 보라. 이 표현은 나중에 또 한사람의 북유럽인인 요한 갈퉁이 이어받아 비폭력주의에 대한 오늘날 잘 알려진 정의가 되었다. 갈퉁에 의하면, 비폭력은 "각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의 실현"을 돕지만, 그와 반대로 폭력은 그러한 실현을 방해하는 힘이다.

  이러한 정신적 맥락에서 달라이 라마는 1993년 유엔 NGO 인권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창조적 잠재성을 사용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기본특성의 하나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 우리 사회의 가장 재능있고, 헌신적이며, 창조적인 구성원들이 인권남용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너무나 흔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은 인권침해를 통해 좌절되는 것입니다.

  나는 느낌과 개념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태초이래 가족과 사회와 행성을 유지시켜온 정신적 깨달음의 깊은 원천인 연민의 마음과 모든 생명을 그 다양성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 개념 사이에는 연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다양성이라는 개념의 합법적 연장으로서 우리는 문화적, 개인적 다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겉보기에 모순적인 이 개념은 비폭력주의와 나란히 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연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 인간의 영혼의 특성을 좀더 분명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들 사이의 너무나 커다란 차이에 우리는 당혹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변별성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목표, 즉 세계의 완전함을 향하여 각자의 고유한 재능에 따라 이바지하는 데에 모두 통일되어 있다"라고 랍비 에이브럼 이삭 쿠크가 말했다.

  인간가족은 50억 개인들을 넘어 점점 커져가고 있다. 각자는 측량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적인 통찰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안락사운동, 사형제도의 부활, 기괴한 인권침해의 만연, 가족의 쇠퇴,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기르는 부양체계의 쇠퇴 ―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삶의 신성함을 손상시키는 것들이다.

  언제나 비폭력을 주창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간디에게도 생명은 신성하고, 무한히 값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명제였다. 모든 생명의 총화가 어떤 점에서는 주어진 개별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일지라도, 또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들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각각의 것은 좋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어우러짐도 매우 좋다."

  전통적인 힌두교의 신자로서 간디는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금언의 하나를 즐겨 인용했다. "작은 파편 속에 우주가 있다." 양자물리학자나 신비가들, 그리고 세계의 여러 정신적 전통에서, 또 우리 모두의 좀더 성찰적인 순간에 이러한 비젼은 되풀이하여 다가온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살생을 금하는 명령 이상의 것이다. 그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살생을 해서는 안되는 적극적인 근거를 말해주는 데 있다. 즉, 각각의 개인으로 된 작은 소우주는 전체 세계질서의 씨앗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DNA라는 우스울 정도로 작은 조각에 기초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의 세계를 재생시킬 수 있는 '정보' ― 믿음, 통찰 ― 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민족적, 준민족적 증오심으로 찢겨있는 이때, 이러한 진리는 되풀이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민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타자와 고통을 함께 하고, 느낌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아픈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을 고립, 차단시켜 그 속에서 죽게 하는 것보다는 타자와 고통을 나누면서 인간성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히브리말에서, 연민에 해당하는 말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낱말의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연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급진주의"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비폭력주의는 연민의 과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녹색평론』, 제43호, (1998년 11-12월호)>

필자/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명예교수. 1980년대 초 평화 및 갈등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그 이후 비폭력주의에 관해 강의해왔다. 이 글은 YES!:A Journal of Positive Futures 1998년 가을호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비폭력은 '현실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어쩌다가 한번씩 행하는 말쑥한 습관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과학, 삶의 방식, 세계관 ― 무엇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녹색평론 홈페이지 - http://www.greenreview.co.kr/
<20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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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9-0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의 글을 너무 퍼오는 것 같습니다.

2004-09-04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6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나의 종교관의 변천

- 부제 : 가을산님의 답변을 겸하여


 아주 어렸을 적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2, 3학년)에 저는 기계론적 유물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계론적 용어는 몰랐지만 ‘정신이란 것은 물질의 반응이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가 교회에서 질문을 했는데, ‘하늘에는 하나님은 없고 구름만 있다던데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당연하지. 하나님이라는 것은 개념적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름, 이런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겠는가? 저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선행을 했을 때의 행복감을 느끼면 그것이 천국, 악행을 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면 그것이 지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4년 때 교회에 같이 다니는 친구와 창조와 진화에 대해 논쟁한 경우가 있었는데, 친구는 창조론을 지지하고, 저는 진화론을 지지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기후에 맞춰 피부색이 변한 것’을 예로 들고, 친구는 ‘왜 사람이 모두 팔 2개, 다리 2개냐’. 저는 ‘아직 진화가 팔 3개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등. 그러면서도 교회에 다는 것은 교회에서 나쁜 짓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니 교회 다녀서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계론적 유물론에 확고한 입장이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를 거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위인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 많은 위인들이 유신론(이들은 기독교에 해당하지만 꼭 기독교는 아니라도)적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이벤트 문제에도 있지만 뉴턴, 아인슈타인, 파스칼, 오일러 등이 포함됩니다. 저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왜 유신론의 입장을 갖게 됐을까?


 둘째는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도 정작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신론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신세계가 있다느니 (이 때의 정신은 물질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닌), 창조주는 있다느니 등등. 그들에게 기독교의 신을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지레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전도에 질려 무신론을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모르는 것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신도에게 비유하여 설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웅덩이를 파고 바닷물을 퍼 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 사람은 이 웅덩이에 바닷물을 모두 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하는 말, '어리석다. 어떻게 저 많은 바닷물을 웅덩이에 담을까?'


 이야기의 요점을 아시겠지만 어찌 보면 불가지론일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불가지론이야말로 최대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꺾인 것이 과학지식의 확대와 더불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의 불완전성 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그리고 플랑크로 시작된 양자역학. 저의 페이퍼에 항상 등장하는 과학 이론이지만 이들 이론의 특징은 '인간의 한계'를 긋고 있습니다. 궤변일 수 있지만 신의 존재가 플랑크 상수이내에 존재한다면...


 저의 교만과 한계를 보여준 지식이 있는데 무한에 관한 수학적 지식입니다. ‘0부터 1사이에 있는 실수와 마이너스 무한대부터 플러스 무한대의 유리수 수직선을 비교하여 어느 것의 숫자가 더 많은가?’라는 질문에 수학적 지식이 없을 때는 당연히 무한으로 뻗어 있는 유리수 직선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0부터 1사이의 실수 선분이 더 많은 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패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9~12절) - (이 당시의 거울은 구리거울 같은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배중률에 대한 의심입니다. <신이 있다, 신이 없다.> 이 두 문장 중에 하나는 옳고 하는 틀리는데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가는 중에 아이가 넘어져 크게 다칠 뻔 했는데, 아이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이런 사건을 두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는 중이기 때문에 아기가 크게 다치지 않게 햐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다쳤으면, 어떤 논리가 되지?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신의 가호’와 ‘사건’의 관계에 배중률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배중률을 포기함으로 저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갈등도 일단락을 지었습니다.


 다섯째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부터 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일반인도 십계명 정도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1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신에 관한 것,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인간사에 관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5계명이 과연 인간에 관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기독교내의 학설에 따라 1계명부터 4계명까지 신에 관한 것으로 돌리는 학파도 있지만 1계명부터 5계명까지를 신에 대한 것으로 돌리는 학파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지지합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던 영어문제집에 영어지문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로 내용은 대충 이러했습니다. 아버지 말이 ‘너, 집안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 말라.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충분히 너를 위한 유익을 행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선거를 했냐?’


 부모의 효도에 관해 사회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의 확장이라던가. 아니면 경제의 효과로 젊었을 때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장년이 된 자녀가 노년이 된 부모를 봉양하고. 이것이 전부일까요. 가을산님이 앞 편지에서 ‘인간’적이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이 인간적 용어는 참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사회를 이루거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인간적이지만 모성도 인간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성은 하찮은(?) 동물 모두에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이 인간적인 것의 의미는?


 여섯째는 부성父性에 관한 것입니다. 그나마 모성에 관한 것은 설명이 비교적 쉽습니다. 배속에 10달이라는 잉태기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가 보다 더 어머니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마립간 페이퍼 2004년 3월 1일자 남녀차별/부모차별). 만약 유전자 분포만이 남성이 가족을 이루는 것의 목표라면 성관계를 갖은 후 떠나는 것이 더 합리적이죠. 아이는 여성이 키우고 남성은 임신이 가능한 다른 여성을 찾아서. 호랑이는 이와 같은 생활을 하죠. 물론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질문이기 때문에 설명으로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일곱째는 아버지의 원리(보수)입니다. 이것은 부성과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한 아이가 부엌에 있던 칼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위험해서 뺏으려 하니 아이는 충분히 다치지 않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를 말립니다. 왜 말려야 하지요. 다치니까. 반드시 다친다고 할 수 있나요. 설령 다친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어렸을 때는 부모가 자녀의 귀가 시간을 통제할 때 남녀의 차별을 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은 그런 구별은 없었습니다. 저 또한 남녀의 차이가 귀가 시간에 차이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형임.) 그런데, 경우에 따라 (모든 경우가 아니지만) 옳은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딸이 밤늦게 다녀, 강도나 성폭행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귀가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아버지의 원리의 기능을 이해한 후 기계론적 남녀평등 가치관을 포기했습니다. (마립간 페이퍼 2004년 8월 12일자 순결과 정조의 에피소드, 마립간 페이퍼 2004년 2월 18일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 부모 자녀간의 민주주의 원칙도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가족관의 분위기가 엄격하고 수직적이며, 반민주적인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고, 가족에는 민주주의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덟째는 부도덕한 부모님, 부모답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평가를 종교를 통해 유보하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해보험을 타기 위해 (아마 천 만원이었죠.) 자녀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 다방을 경영하면서 딸 셋에게 매춘을 시키는 어머니. 이런 것에 대한 가치평가를 제 스스로 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아홉째는 종교적 체험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불교, 인도 철학 등에서 밝은 빛을 보는 종교적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경우는 이 종교적 체험을 위해 음역을 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기독교이든 비기독교이든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것인 종교적 체험에 관해 이에 대한 속단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저에게 부모의 마음을 예단하지 말라고. 저는 부모의 마음을 예단하지도 추측하지도 않습니다. 그에 비해 부부관계는 어느 정도 (그야 말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합니다.


 위의 이야기들이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밤낮이 바뀌는 것을 천동설의 근거로, 지동설의 근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진정한 지동설의 근거는 연주시차였습니다. 기독교를 선택한 근거는 역시 없습니다. 진화론을 설명한 책의 머리말에 ‘한 개의 세포는 뉴욕시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을 보고 단순히 진화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의 이야기는 크게 물질에 바탕을 두지 않는 정신세계, 그리고 천국이나 교회의 모형으로 일컬어지는 가족, 몇 가지 과학적 사실들로 나누어지지만 그 어느 것도 남을 설득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전도를 하지 않은 것은 남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일 수도, 다른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도 있지만 제 스스로가 오베르의 정원(선과 속의 경계 - 세상과 기독교의 경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도 부럽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부럽고, 나름대로 진보적 기독교 신앙을 갖은 분도 부럽습니다. 갈등하지 않을 테니까요. 왜 하필, 개신교냐? 개신교를 갖은 상태에서 다른 종교를 갖은 분(대표적으로 불교)과 대화가 안 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개신교의 종교적 체험은 개신교이어야만 하니까요.


 저는 교회에 갈 때, 적자가 아닌 서자처럼 느껴집니다. 왜 저렇게 많은 교인들은 행복해 할까? 나는 그렇지 못한데. 서자도 아들은 아들인 것 맞죠. 왜 나만 힘들지?


 하나님은 교회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며 몰려다니는 사람과도 같지 않습니다. 아마, 아마... 하나님은 능력이 크신 사랑일겁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부모님이라는 거대한 사랑의 성안에서 평안했던 그 때. 그리고 언제가 헤어질 부모님. 어쩌면 부모님의 권위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지만... 한편 부모가 되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그 말처럼, 다른 집에 아이를 맡기기 불안해하는 부모님 마음이 하나님 마음일 수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이유가 있지만 막상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닌 것처럼, 선택이 그 자체로 이유인 것처럼.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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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님에 대해 너무 피상적이 되어버린 요즘 어떻게 해야하나 내심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립간님은 이렇게도 깊이 고민하시고, 사색하시고 얻은 것들이 귀하게 느껴지네요. "너는 왜 신앙을 갖고 있니?"라고 누군가 물어 온다면 전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온탕 속의 개구리는 아닌지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마립간 2004-09-03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 부모님의 사랑이 사색을 통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계시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stella09님이 부럽습니다.

stella.K 2004-09-0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제가 님으로부터 그런 찬사를 들을만한 자격이 있나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 바람구두님의 선물

 가끔 꿈을 꿉니다.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나. 자연 속에 있는 나. 죽림칠현처럼. 작은 초가에서 텃밭을 가꾸며 책도 읽고. 자연의 위대함으로 인해 저의 몸속 깊이 있는 악마성과 죄가 밖으로 나오려는 조금만 준동도 없는, 그런 곳에 사는 나.

 

 바람구두님, 고맙습니다!

 


 

 

* ‘바람 구두’이라는 이름을 듣고...


 저는 기하학적 논리적 사고를 좋아합니다.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람 : 그러나 바람은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달나라에까지 우주선으로 다녀오는 세상이지만 일주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류가 카오스적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의 통제와 예측에 구애받지 않는. 비기학적인 사고는 동양적이 사고와 일맥상통합니다. 멋과 흥이 있는!


구두 : 역시 자유가 연상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용기와 호연지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찰나와 같은 인연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언제가 다시 만나겠지...라는 기대를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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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0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전 왜 님들게 더 좋아보이는지... 못된 만두입니다...

바람구두 2004-09-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에도 길이 있다 - 천상병 시인의 말이죠. 저도 제 나름의 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쉽사리 잡히지 않을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