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2001년 바야흐로 21세기의 첫 해를 맞이한 인류는 더 이상 '묵시록의 네 천사' - 원래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1916년 이바녜스(Vincente Blasco Ibanez)의 소설에서 흰말은 전쟁, 붉은 말은 학살, 검은 말은 굶주림, 푸르스름한 말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 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리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21세기, 그 첫해가 미처 저물기도 전이었던 9월 11일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에 의해 붕괴되었고,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죄 없이 희생당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21세기가 결코 20세기와 다르지 않으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20세기에 미처 풀지 못했던 산더미 같은 과제들이 누적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이제 그 1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의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1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가 반대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이라크로 확대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겠다는 명분 아래 시작된 '걸프전' 그리고 계속되는 미국의 이라크 경제 봉쇄 조치로 이라크에서는 오늘날 6분에 1명 꼴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다. 그 동안 최소 75만 명에서 1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미국의 공습과 영양실조, 의약품 고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라크 정부측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밝힌 수치이다.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비난한다. 물론 모든 근본주의는 인류의 화합에 있어서 가장 나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자행된 인류에 대한 모든 범죄가 갖은 도덕적 명분을 들이대었던 것처럼, 미국이 신세기에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란 것은 결국 미국 근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우리 인간들은 시계가 12시를 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황급히 촌각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은 종이 울린 뒤에 해결하기엔 너무 늦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정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 무엇이 옳고 선한 것인지 판단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는 먼저 윽박지르기에 앞서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항거하는 방법 이외에는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락하지 않은 그들의 오만에 있었음을 깨우쳐야만 한다. - 바람구두

비폭력주의 ― 연민의 과학

마이클 네이글러(Michael Nagler)

  독일의 덴마크 점령통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운동은 잘 조직되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함으로써 점령당국을 심히 곤혹스럽게 하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덴마크인들은 나치의 유태인정책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 정책은 1943년 가을 어느 날 절정에 달하였는데, 독일 함대가 덴마크 거주 유태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코펜하겐 항구로 들어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 모르게 누군가가 지하조직에 이 사실을 알렸고, 밤새 7천2백 명의 유태인들 ― 사실상 덴마크 유태인들의 전부에 해당하는 ― 이 대기중인 함대의 코밑에서 중립국 스웨덴으로 빼돌려졌던 것이다. 고기잡이배들과 온갖 뜰 것들로 구성된 잡다한 소형 선단은 험한 바다 위에서 솟구치고 떠밀리면서도 이튿날 아침까지는 혼잡과 배멀미에 지친 승객들을 스웨덴으로 데려다놓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스웨덴 국왕은 유태인들에게 망명을 허가해주고 싶었지만, 나치의 존재에 겁을 먹고 있었다. 아마도 국왕은 스웨덴의 중립성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때 덴마크의 저명한 물리학자가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들이 처한 딜레마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국왕에게 조용히 자신의 말을 전달하여, 만일 유태인들에게 망명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자신 자진해서 나치의 손에 스스로를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그 저명한 물리학자는 닐스 보어였고, 스웨덴 국왕은 즉각 유태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내가 보어의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여기에서 그의 과학과 그의 인간적인 용기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어는 양자물리학에 있어서 '코펜하겐 해석'의 배후에 있는 천재였다. 아인슈타인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물리학의 성과는 실재의 본질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실재는 지극히 이상스러운 것이다. 새로운 물리학의 우주와 초시간적인 신비체험가의 우주 사이에는 매우 흥미롭고 암시적인 평행관계가 있다.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감각과 물질에 대한 의식의 우월성은 ― 간접적으로 ― 비폭력주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견고한, 덩어리진, 딱딱한, 꿰뚫을 수 없는, 움직이는 입자들"로 구성된 뉴턴의 우주는 필연적으로 지금 우리가 벗어 나오고자 애쓰는 자연과 생물들에 대한 폭력의 세계를 초래한다.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과 매스 미디어의 공식적 과학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물질적 역학의 세계는 ― 물질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를 만족시키는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 희소성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폭력을 낳는다.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쳐도 나 자신을 포함한 보다 큰 전체는 해를 입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그 그림이 창조된 세계가 갖고 있는 중심적 모순을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은 1768년에 조셉 라이트라는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때는 산업시대의 시초로 서구세계에서 땅과 인간의 오래된 연결의 전통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떠돌이 과학교사인데, 그는 한 개의 진공펌프를 홀린 듯한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펌프질을 통해 유리로 된 새장에서 공기를 빼고 있다. 그리고 새장 안에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사람들은 새가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말해 새장 안에 공기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기술의 힘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관객으로서 우리가 달리 받는 인상은 무엇인가?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진정한 극적 흥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펌프와 공기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 남자어른이 작은 새 한마리를 죽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이 드러내는 진짜 이야기는 청중에게 주술을 걸고 있는 과학자와 당혹해하는 아이들 사이의 대조에 있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그들은 '다만 어린애들일 뿐'이며, 그래서 어른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손상을 가할 때 우리들에게 경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민감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우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가슴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들 ― 라이트의 그림 속의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 ― 을 우리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라이트가 진공펌프의 힘을 과시하는 근대기술의 사제 ― 그럼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내세우는 ― 를 묘사했을 때 시작되었던 호(弧)의 다른 쪽 끝에 서있다. 근대기술 ― 기술주의라고 해도 된다 ― 은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 중 일부는 그 결과에 너무나 기막혀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하여 저질러놓은 것은 1768년이나 1968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민감성으로써 생명을 지켜보고, 가장 계몽된 어른들의 지혜로써 생명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과학은 지난 백년 동안 뉴턴의 '원시적 입자들'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왔다.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놀라운 발견을 통하여 물리학은 이제 사물을 물질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의식에 관여하는 에너지의 변화로 본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 대한 관점 ― 뜻밖에도 우리 문화의 가장 이른 신화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 이 오늘날 비폭력주의와 에콜로지의 배후에 있는 상호연관성의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직관을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 보어를 자기의 동포가 위험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기를 거부한 인간 보어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근거가 거기에 있음을 느낀다.
  
1938년 여름 스웨덴으로 피신하기 직전 닐스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열린 한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모임에서 연설을 한 바 있다. 이 '양자역학의 할아버지'는 그의 유명한 상보성이론으로 일반청중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이론은 인간이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어서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두가지 상호배제적인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드는 예로서, 빛의 광자 또는 그밖의 다른 양자 실체는 입자도 파동도 아니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자나 파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날 이 국제물리학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개념을 전자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에 적용시켰다.

  우리는 진실로 다양한 인간문화들이 서로서로에게 상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문화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조화로운 균형을 대변하며, 그러한 조화를 통해서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발전하여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새로운 삶의 모습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에 독일대표들은 퇴장하였다. 결국, 그 독일인들은 우선적으로 나치당원들이었고, 그 다음 순서로 '과학자들'이었던 셈이다. 보어의 발언이 드러낸 세계관은 나치당원들의 가치에 완전히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불관용(不寬容)이라는 나치의 교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적인 차이들은 우리가 존중해야 할 자연적 계획의 일부이고, 개별 민족과 공동체와 개개인들은 저마다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기의 소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누구라도 하나의 전체 가족으로서 자기실현을 이루려면 서로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디어는 파시스트들에게는 쓰디쓴 독초였다. 모든 유정물이 저 나름의 귀중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파시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치의 유럽점령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을 쓰려는 의지에 결부하여 몇 가지의 불쾌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미지이다. 히틀러는 이 점에 있어서 노골적이었다. 그는 어느 날 윌리엄 쉬러 ― 히틀러와 간디 두 사람 모두를 실제로 잘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 와 점심을 함께 나누며 자기가 거둔 성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사람은 저마다 가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엔 그 가격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 놀라실 겁니다."
  인간존재를 하찮게 보는 데에서 폭력이 나오고, 인간존재를 높이 보는 데에서 비폭력이 나온다. 폭력은 우리를 갈라놓는다. 비폭력은 우리들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신비스러운 통일성 ―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숨겨져 있는 영광이다 ― 에 직접 호소한다.

  나치 과학자들을 쫓아냈던 닐스 보어의 발언은 1938년 당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는 파시스트의 세계관이 '획일성을 통한 분열'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질서개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았다. 파시스트들은 오직 하나의 민족과 정치질서만이 ― 그러니까, 오직 한사람만이 ― 가치있고, 진정하며, 깨끗할 뿐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열등하고 위험한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유일한 올바른 길'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배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대한 해독제는 헤겔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부른 아이디어였다. "인간 삶의 내재적 가능성이 스스로 발전하여"라고 한 보어의 표현을 보라. 이 표현은 나중에 또 한사람의 북유럽인인 요한 갈퉁이 이어받아 비폭력주의에 대한 오늘날 잘 알려진 정의가 되었다. 갈퉁에 의하면, 비폭력은 "각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의 실현"을 돕지만, 그와 반대로 폭력은 그러한 실현을 방해하는 힘이다.

  이러한 정신적 맥락에서 달라이 라마는 1993년 유엔 NGO 인권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창조적 잠재성을 사용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기본특성의 하나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 우리 사회의 가장 재능있고, 헌신적이며, 창조적인 구성원들이 인권남용의 희생자가 되는 일이 너무나 흔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은 인권침해를 통해 좌절되는 것입니다.

  나는 느낌과 개념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태초이래 가족과 사회와 행성을 유지시켜온 정신적 깨달음의 깊은 원천인 연민의 마음과 모든 생명을 그 다양성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 개념 사이에는 연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다양성이라는 개념의 합법적 연장으로서 우리는 문화적, 개인적 다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겉보기에 모순적인 이 개념은 비폭력주의와 나란히 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연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 인간의 영혼의 특성을 좀더 분명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들 사이의 너무나 커다란 차이에 우리는 당혹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변별성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목표, 즉 세계의 완전함을 향하여 각자의 고유한 재능에 따라 이바지하는 데에 모두 통일되어 있다"라고 랍비 에이브럼 이삭 쿠크가 말했다.

  인간가족은 50억 개인들을 넘어 점점 커져가고 있다. 각자는 측량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적인 통찰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안락사운동, 사형제도의 부활, 기괴한 인권침해의 만연, 가족의 쇠퇴,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기르는 부양체계의 쇠퇴 ― 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삶의 신성함을 손상시키는 것들이다.

  언제나 비폭력을 주창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간디에게도 생명은 신성하고, 무한히 값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명제였다. 모든 생명의 총화가 어떤 점에서는 주어진 개별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일지라도, 또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들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각각의 것은 좋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어우러짐도 매우 좋다."

  전통적인 힌두교의 신자로서 간디는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금언의 하나를 즐겨 인용했다. "작은 파편 속에 우주가 있다." 양자물리학자나 신비가들, 그리고 세계의 여러 정신적 전통에서, 또 우리 모두의 좀더 성찰적인 순간에 이러한 비젼은 되풀이하여 다가온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살생을 금하는 명령 이상의 것이다. 그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살생을 해서는 안되는 적극적인 근거를 말해주는 데 있다. 즉, 각각의 개인으로 된 작은 소우주는 전체 세계질서의 씨앗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DNA라는 우스울 정도로 작은 조각에 기초하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의 세계를 재생시킬 수 있는 '정보' ― 믿음, 통찰 ― 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민족적, 준민족적 증오심으로 찢겨있는 이때, 이러한 진리는 되풀이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민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타자와 고통을 함께 하고, 느낌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아픈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을 고립, 차단시켜 그 속에서 죽게 하는 것보다는 타자와 고통을 나누면서 인간성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히브리말에서, 연민에 해당하는 말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낱말의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연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급진주의"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비폭력주의는 연민의 과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녹색평론』, 제43호, (1998년 11-12월호)>

필자/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명예교수. 1980년대 초 평화 및 갈등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그 이후 비폭력주의에 관해 강의해왔다. 이 글은 YES!:A Journal of Positive Futures 1998년 가을호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비폭력은 '현실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어쩌다가 한번씩 행하는 말쑥한 습관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과학, 삶의 방식, 세계관 ― 무엇보다도 하나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녹색평론 홈페이지 - http://www.greenreview.co.kr/
<20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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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9-0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의 글을 너무 퍼오는 것 같습니다.

2004-09-04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6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