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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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선 이 글은 쓰게 된 것은 알라딘을 통해 알게 된 <길가메쉬의 서사시> 서평단의 한 사람으로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예전에 영화 quota관한 이야기를 주위 사람과 하면서 마케팅 힘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책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영향력에 의해 완전히 배제될 수 없겠지만, 좋은 책은 좋은 책으로 많이 팔리기를 기대하면서 먼저 밝힙니다.


 저의 경우, 서평 단에 뽑히지 않았어도 아마 책을 구입하였을 텐데, ‘길가메쉬의 서사시’에 대한 책을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중, 이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처음 ‘길가메쉬의 서사시’에 라는 것을 듣게 된 것은 7년 전이었는데, 그 순간부터 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유는 세계 최초의 신화 서사시라는 수식에서 느낄 수 있는 ‘최초’에 대한 무게 때문이고, 홍수를 비롯하여 몇몇의 내용은 기독교의 창세기 내용과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책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이 책은 양장본인데, 양장본의 장단점은 이미 알려 있듯이 보관을 위해서는 좋은 반면 부피와 무게를 조금이지만 더 하게 되고 그리고 가격도 상승시키는 효과를 갖습니다. 그리고 페이지 당 글자 숫자가 적어 읽기 편한 반면 이 또한 책 가격을 올리는 효과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책에 삽입된 사진들은 매우 마음에 들고 흡족하였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한글을 전혀 모르는 캐나다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사진만을 보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 비극의 전주곡, 죽음의 공포, 4장 황금시대의 전설에서 따로 저자의 해설이 붙인 것은 서사시를 읽을 때 선입견을 주지 않도록 하였고, 문학적 감흥을 생각할 때 좋은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의 언급과 모순 되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서사의 원문에 손상을 가하지 않으려는 의도이겠지만, 서사시 밑에 주석을 길게 달아 놓았습니다. 첫 주석인 63p의 주석은 11줄이고, 65p의 주석은 18줄이나 되는 글인데, 이 정도의 글이라면 차라리 본문으로 쓰여 졌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길가메쉬의 서사시’에 관한 해석이 있은 후 주석에 길게 써진 내용들을 본문을 써서 뒤에 붙였다면 작은 글씨를 읽는 것보다는 편하게 읽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생 시절 때부터 문학과 거리가 멀었던 저는, 서사시에 대해 경험이 거의 없었고, 하물며 학교를 졸업하고 한 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서사시에 대한 문학적 감흥을 기대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Iliad, 오뒤세이아Odysseia가 후대 평가받는 것은 사건의 기록뿐만 아니라 사건과 인물 묘사가 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된 길가메쉬의 서사시를 통해 문학적 감흥을 받기에는 저의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사시를 읽으면서 사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연상되는 것들이 떠올랐고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엔키두와 처음에 맞서다가 연합을 한 것은 정치적 동지를 얻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 본 경우이죠.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형제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역시 길가메쉬의 군君과 엔키두의 신臣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형제관계 또는 친구관계이자 군신관계를 갖는 예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삼형제, 손책과 주유, 그리고 이성계와 퉁두란은 형제이자 군신관계이고 친구이자 군신관계입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황후 민씨는 부부이자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또한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관계은 지도자와 참모의 역할도 보여주는데 훔바바의 처리에 관해서, ‘그러자 길가메쉬는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라는 길가메쉬의 말에 ‘당신은 당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도시로 결코 돌아갈 수 없습니다.(p174)’라고 엔키두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엔키두는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p178)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도자가 어떤 큰일을 결정할 때 지도자는 정신적 갈등을 갖는데, 참모가 지도자의 마음을 다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완용이 을사조약이나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할 때 마음이 유약하여 고민하였고 이 때 이인직은 이완용이 흔들리지 않도록 참모 역할을 하였다고 하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때 최근 얼마 전까지 정치를 한 분이 참모로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난에서도 원경왕후 민씨가 같은 역할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산지기 훔바바를 죽인 것은 아마 산림을 바탕으로 생활하던 부족을 전쟁을 통해 흡수 통합한 것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특히 영웅답지 못한다는 훔바바를 말을 통해 그 당시에 있던 관례나 약속을 어긴 것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정치의 비도덕성을 보여줍니다.  저 개인적인 가치관으로는 국가나 정치는 필요악으로 여기는데,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실례로 여겨집니다.


 길가메쉬는 용맹은 아마 엔키두보다도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사회지수(social quotient)나 지도력 지수(charisma quotient)가 매우 높은 인물일 것입니다. 마치 케사르Caesar가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꾼 것은 정치적 천재의 한 작품이듯 그 때 상황으로 부족을 정복 흡수하여 국가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은 영웅의 탄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저의 관점에서 보면 ‘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정치적 격변기 후 안정을 찾기 위해서 홍위병들이 뒷일을 담당하고 처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영웅 문학이 될지 모르겠으나 길가메쉬라는 인물은 부족에서 부족국가를 형태를 만들고 이 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영웅화 작업으로 비춰집니다.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일 사람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죽게 되는 상황에 대한 합리적 근거로 사람을, 피지배층과 구별되는 신분적 배경을 갖기 위해 신을 혼합한 정치적 논리가 엿보입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죽지 않기 위해 불노초를 찾았던 것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루고 나이가 들어 죽음이 걱정되었던 시점에 신과 인간의 중간이라는 이야기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뱀에 대한 느낌도 서사시에 대한 초반과 후반에서 달라지는데, 인류학자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조차 처음부터 뱀이 부정적인 상징을 갖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처음에 뱀은 허물벗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젊음으로 환생하는 착각을 주었고 영물 또는 신적 존재로 숭앙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에서 유일신을 섬기면서 영물로 여겨지는 뱀은 외양적인 혐오감과 더불어 사탄의 상징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성경의 뱀이 상징적인 것인지, 뱀과 유사한 외양을 갖은 다른 동물인지, 실제 우리가 보는 뱀이지 확신이 없는 듯 합니다. 어째든 이 서사시에서 전반부에는 '둘째는 자궁 같은 뱀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중략) 다섯째는 머리가 잘 생긴 뱀으로 혼을 쏙 빼앗으며(p165)'라고 기술되어 일곱 전사를 수사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후반부에는 ‘뱀 한 마리가 식물의 향기를 맡고 몰래 올라와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p311)’라고 쓰여 있어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종교에 관해서는 어떤 말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가 기독교 성서의 연관성 때문에 이 책을 읽었고, 저자가 히브리족의 창세기 <베레쉬트>를 언급한 이상 이에 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신의 지문>을 읽다 보면 큰 홍수에 관한 것도 성경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전 지구적인 홍수가 있었는지, 국지적인 홍수에 대한 인간의 감흥은 동일하여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홍수에 대한 설화가 있는지 혼동되었습니다.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책을 보면 다윗왕 시대의 국가는 큰 나라가 아니였다고 하며 솔로몬의 궁전도 성경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크고 화려한 궁전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요시아Joshia왕이 자국의 역사와 설화로 성경이라는 근사한 소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에 관해 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이 책에 언급된 것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항상 논란이 되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학설에서는 출애굽(The Exodus from Egypt)한 것 자체가 부정된 학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좋아했던 이집트인들이 유대인 출애굽한 것과 같은 대사건을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과 출애굽하여 방황과 정착한 가나안 땅 조차 애굽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하여 출애굽을 허구로 여기는 고고학 학설도 있습니다. 저자가 은연중 에 내비추고 있는 '길가메쉬의 서사시'가 있다는 것이 성경을 낳은 신화로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원형으로 인정해야 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반부에 죽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단지 사건을 바탕으로 한 서사시뿐만 아니라 철학적 내용을 일부 담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국가가 완성된 이 후 아마 지배계층을 이루는 지식인들의 지적 욕구에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죽음을 앞에 둔 길가메쉬의 요구에 따라 죽음에 관한 이론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많은 내용이 현실감에 있게 다가오는 것은 5천년의 사람이나 현재의 사람이나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인 듯한, 사람으로서의 한계로 해석됩니다. 강자에 의한 정복의 이야기,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몇 가지 작업들, 그리고 모든 것이 안정적일 때 나타나는 허무적 감정들을 위한 철학적 의문들...

 

 ‘길가메쉬 서사시’ 자체가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고 최초의 서사시라는 점과 그 내용이 성서적 창조 신화와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교양인으로서 읽어 볼만한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처음 보고 당연히 번역서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책이 한국 사람에게 쓰여졌다는 것은 매운 반가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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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5-02-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 지문> 상, 하 그레이엄 핸콕 저/이경덕 역/까치글방 출판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애셔 실버먼 저/오성환 역/까치글방 출판
이완용과 이인직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선생님께 들었고, 고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참모(정치인)과의 관계는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단지 한번 이야기 듣고 책 한권에 글이 쓰여진 것만으로 사실로 인정해야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완성 2005-02-11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날카롭게 분석을...앞서 올린 제 글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마립간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추천이어요, 추천. 왜 추천은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걸까요 ㅜ_ㅜ 님도 숙제 끝내신 거 축하드려요 :)

비로그인 2005-02-1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자의 수메르 세계관을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그의 책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도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은 후에야 그 책을 알게되었고, 지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수메르 신화가 과연 그리스와 히브리 신화의 원형일까? 라는 의구심은 사라지겔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저자가 다음에는 무엇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올 지 기대됩니다.

마립간 2005-02-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화예찬님 반갑습니다. 훌륭한 리뷰라고 칭찬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그냥 연상되었던 것들을 적은 것 뿐인데요. 그리고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구입신청을 하였습니다. 좋은 책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화예찬님, 서재를 닫으셨네요(?).
 

 * 바둑이야기 1


 제가 바둑을 알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지만 바둑을 둔다고 할 수 없고, 그저 치중, 장문, 축 정도만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 입학 후 정석 몇 가지를 외고 행마를 알면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대학 선배(제가 재수를 하고 그 선배는 휴학을 하였고 2학년부터 같이 수강을 하여 사실상 친구였습니다.)와 맞수 아닌 맞수로 바둑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저보다 바둑을 조금 잘 두어 2점 접바둑을 (2점을 깔고 두는 것)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훈수를 둘 때 보면 2점도 과하여 제가 분명히 이겨야 되는데, 대개 지고 연속 3번을 진후 3점 접바둑에서 다시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이상하다 분명히 실력으로 보아서는 2점으로 이기고 1점으로 지는 정도의 실력인데 왜 자꾸 지는 걸까?


 얼마 후 조남철님께서 어느 선전 팜플렛에 칼럼을 쓰신 글을 읽었는데, 대략 내용이 이렇습니다.


 “내가 바둑과 인연을 맺은 지도 수십 년이 지났는데, 보면 볼수록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 같다. 한 동안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기도 했지만 어는 순간에는 나이가 먹는 만으로도 바둑이 실력이 늘었다. 이는 탐욕불승貪慾不勝, 공피고아攻彼顧我, 사소대취捨小大取 등의 바둑의 기본이 인생을 통해 수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마치 망치로 저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그때의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제가 실력에 비해 바둑을 자꾸 지는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자마자 저는 그 선배에게 달려가 정선으로 (흑백을 가리지 않고 공제 없이 승부를 가리는 것, 즉 한 점 깔고 두는 것) 바둑을 한판 두자고 했습니다. 선배는 깔깔 웃으며 3점 접바둑도 졌으면서 왜 갑자기 정선 바둑을 두냐고 했지만 그 선배는 바둑에 응했고, 저는 그 바둑을 정선 바둑으로 이겼습니다.


 조남철님은 인생을 배워 바둑을 두셨지만, 저는 바둑을 두어 인생의 단편을 보았습니다.


* 위기십결


 1. 부득탐승 (不得貪勝)

 이기려는 욕심이 너무 크면 그 경기를 이길 수 없다. - 모든 구기 경기는 몸에 힘을 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죠.


 2. 입계의완 (入界誼緩)

 경계를 넘어 들어갈 때는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3. 피고아 (攻彼顧我)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할 때는 먼저 나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


 4. 기자쟁선 (棄子爭先)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5. 사소취대 (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 봉위수기 (逢危須棄)

 위기에 처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자쟁선과 비슷한 말.


 7. 신물경속 (愼勿輕速)

 바둑을 경솔히 빨리 두지 말고 신중히 한수 한수 잘 생각하면서 두라는 말이겠지요.


 8. 동수상응 (動須相應)

 모름지기 이쪽 저쪽이 서로 연관되게, 서로 호응을 하면서 국세를 내 편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도록 그런 방향으로 운석하라는 것이겠죠.


 9. 피강자보 (彼强自保)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내 편의 돌을 잘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10. 세고취화 (勢孤取和)

 상대편 세력 속에서 고립이 되는 경우에는 빨리 안정하는 길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일단 살고 나서야 후일을 도모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피강자보'와 결국은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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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1-3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인터넷 바둑을 두고 있으면 뒤에서 구경하시는 직원 분이 늘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네 돌부터 살피라는 것이지요. 지금도 좀 그렇지만 저는 공격해서 이득보려고 하다가 다 이긴 바둑 대마 잡혀서 지는 경우가 빈번하거든요. 그런데 마립간님 기력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저는 그냥 둘 수있는 정도입니다만^^:

마립간 2005-01-3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 다닐 때 주위 사람과 그냥 두는 정도인데, 그것이 7, 8급이라고 들었고, 요즘 급수에 inflation이 있어 인터넷 바둑에서는 4, 5급 전후가 되지 않을까 하던대요.
 
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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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에 관해 문외한인 저는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손주철 지음/효형 출판)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 이 그림은 이런 것이었구나. 그런데 어떤 분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은 사람의 지적 오만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하셨습니다. 시인 조지훈님은 '시를 해석하는 것은 시를 죽이는 어리석인 일이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많은 작품을 통한 풍부한 경험이 있고 그 분야에 대한 지식도 있어 작품을 대할 때, 직관으로 그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의 감상방법인데, 경험과 지식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여기서 미술을 포함한 예술에 관한 (저 개인적인 그리고 철학적으로 오래된 질문인) ‘미’ 즉 ‘아름다움’이 사람과 관계없이 실존하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세계의 교양을 읽다> (최병권, 이정옥 역음/휴머니스트)라는 책에서는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에서 아름다움이라 사람의 인식 즉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의 여러 가지 직 간접 경험을 통해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 사람에게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이견에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현대 미술을 소개하면서 관객이 받는 느낌을 강조하지만 미술에 문외한들이 미술 작품을 보면서 ‘이게 뭐야’라고 한다면, 그것이 작품으로 가치를 갖지 않는 다는 뜻일까.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 작품은 내가 아무렇게 그린 그림과 다른 것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이 책은 ‘도상학Ikonographie’이라는 학문을 소개하면서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이지, 그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 및 사회배경과는 어떻게 관련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저는 그림의 아름다움을 보기 보다는 논리적 추론의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림에 대한 충분한 직관을 갖지 못한 저의 경우 그림의 해설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그림 보기가 아닌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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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5-01-23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선물해 주신 깍두기님과 로드무비님께 감사드립니다. 깍두기님은 그림이 부족하다는 평을 주셨지만 저는 그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서양 미술 도감을 빌려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감흥이 ...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 오히려 동양화는 해석보다 그림 자체를 즐길 수 있었는데, 서양화는 해석이 붙지 않으면 좋은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를 읽으면서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저의 수준에 적절한 책이었습니다.

마태우스 2005-01-2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에 더 동의합니다. 한번 접해본 그림을 전시장에서 보면 굉장히 반갑거든요. 물론 새로운 그림을 저자의 설명을 곁들여 알게 되는 것도 좋지만, 비교를 하자면 전자가 더 좋았어요.
 
 전출처 : 바람구두 > Dum vita est, spes est!

삶은 아무리 더럽고, 치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보다 낫다.

2005년 나의 독서 테마에 대해 올초에 이야기한 바 있는데, "문화"를 읽기로 한 것은 문화비평(문화연구)에 대한 이론서들을 읽을 결심을 했다는 거다. 생각외로 이 방면에 많은 읽을 거리들이 산적해 있음을 최근에야 마음에 새길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읽을 것은 지천인데, 그간 이 방면에 대해 무식했음을 절감하는 거다.
그렇다고 문화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읽어야 할 대상들이 전혀 낯선 인물들은 아니라는 사실에 다소의 안도를 품을 수 있게 된다.

미하일 바흐친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칼 마르크스
프랑크푸르트 학파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이 알튀세르
움베르토 에코
아르놀트 하우저
자끄 라깡
페르디낭드 소쉬르
롤랑 바르트
게오르그 루카치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
안토니오 그람시
레비 스트로스
김현 ... 등

하지만 그 이름을 이렇게 나열해 기술해놓고 보니 마치 눈앞에 히말라야 산맥의 8,000m급 고봉들을 옮겨 놓은 듯 숨이 턱 막힌다. 사람들은 어째서 산에 오를까?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는 왜 저들의 저술을 읽고 싶은 걸까? 글쎄, 그 대답을 위해 나는 그들의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 스스로 자문자답한 적이 있다.


왜 글을 쓰는가?

- 바람구두

어줍잖게 글을 쓴다는 힘든 일에 매달리기 전에 나는 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스스로가 막장(漠場)이라고 이름 붙인 연립 주택 지하 골방에 60촉 백열등을 하나 매달아 놓고는, 낮에는 내내 자다가 밤에만 깨어 일어나 소주 마시고, 커피 마시고, 책 읽고, 갓 배운 담배 연기에 취해 글쓰고, 찾아온 모든 손님들을 즐겁게 맞으며 객쩍게 시간을 때우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가담했던 운동 단체가 산산조각이 나서 지하 생활자로 변해 있을 무렵이었다. 나에게 세상은 온통 사기였으며 불가능한 이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며 한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기만에 질려 그 생활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후 나는 공장 생활자로 변했고 손에 못이 박힌 노동자들과 그들의 선량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사물이나 인생, 세상이 무엇이냐고 알려고 대들기보다 우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했다. 그만큼 나는 살아가는 것, 생존 자체의 문제가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세상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제약들 장남, 종손, 부모가 없는 아이, 삼촌 셋에 고모 셋, 그리고 가엾은 누이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사랑을 애써 가장했지만 처치 곤란한 사고무친의 남매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모두 제 코가 석자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안락한 삶의 방식은 모범생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범생으로서의 삶을 일탈함으로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안락하고 편안한 삶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며 영악한 아이로 기억되던 내가 영악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아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TV에서 해주었던 "엄마 찾아 삼만리"란 만화영화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난다. 소년 마르코가 어머니를 찾아 먼길을 여행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만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는데, 나는 그 만화를 보며 우리 어머니도 먼 곳에서 날 그리며 돈을 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덧없는 희망이 정말 덧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을 때, 나는 세상엔 슬픈 일이 기쁜 일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진심으로 세상을 깨닫게 되었다.

   바흐친의 말처럼 지식과 논리는 권력의 도구가 되어 잔인한 희생을 부른다.

  이에 반해 사랑은 논리가 설 수 없는 모순의 장이다. 그러기에 사물의 이치는 지식보다 사랑을 통해 파악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글쓰기의 출발이 결코 사랑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매우 절실한 욕구에 의해 시작한 일은 후회가 없는 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일에서 그토록 절실했었을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살았다는 묵계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존재하고 있다. TV의 CF에나 나올 듯한 가정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잘난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열등의식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고 감추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사는 일이 쓰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세계라는 거대한 변기 속에서 줄만 당기면 사라져야 하는 분뇨 같은 존재가 되기 싫어서,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무력하게 침몰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싶다. 글쓰고 있지 않는 시간은 나에게 굶주린 공복 상태처럼 스스로를 괴롭히고, 계속해서 자학의 상태에 빠뜨린다. 글쓰기는 나의 유일한 자기 구제의 방도이며, 나의 구원 사업이다. 이 진구렁보다 질척하고 암울한 습기가 자본주의라는 가습기로부터 뿜어 나오는 세계로부터.... 그러나 갈대의 뿌리를 손쉽게 캘 수 있다고 생각한 착각이 지하의 세계에 감금된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면, 인간의 사유의 뿌리를 더듬어 보겠다는 나의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을 측량해 보고 싶다는 나의 거친 야심은 한낱 부질없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세상의 익명성(匿名性)에 도전하고 싶다. 더러운 허위 의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을 욕보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희망을 지키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 때로는 희망이 사람을 망친다.

"삶은 아무리 더럽고, 치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보다 낫다."는 결론을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려놓고 있었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롤랑 바르트와 같은 괘락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몸이 텍스트의 관념을 쫓아가는 바로 그 순간에 텍스트의 즐거움이 일어난다"고 말하던...

* 알라딘에서 2005년 마이리스트를 올리면 그중 20명을 뽑아 10만원 상당의 책을 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관함의 책들 가운데 50권을 옮겨놓고 보니 또 책이 그만큼 남는다. 그러고나니 문득 보관함에 남아있는 내 책들이, 아니 내 불쌍한 욕망들이 가엾어진다. "10만원의 책을 얻고 싶어서 나는 이렇게 열심이구나"란 생각이 무심결에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든 거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흔들어 생각해보니 이렇다.
"삶은 아무리 더럽고, 치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보다 낫다"는 나의 결론.... "살아남으면.... 살아남으면 부끄럼도 알게 되겠지"라는...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무척 유쾌해졌다. 역시 난 쾌락주의자...Dum vita est, spes est. 생명이 있는한 희망은 있다. 역시 모든 거창하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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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상 까치글방 150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구판절판


그런데 언어에 대해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쉬운 반면에, 수에 대한 진술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는 전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실 재귀준거적인 진술의 착상을 수론과 결부시키는 것만으로도 천재적 발상이다.-p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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