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6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을산님께

 지난주에 시간이 없어 편지가 늦었습니다. 이야기가 다국적 기업에 대한 생각의 교류에서 시작하여 정치관을 포함한 가치관과 자아를 포함한 약간의 철학적인 문제를 거쳐, 이번에는 종교적인 문제에 이르렀습니다. (가을산님이 '자아'에 대한 의견은 안 주셨네요.^^)


 좌파, 우파에 대한 저의 견해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정권의 두 사람이 만나도 좌우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 공화당 정치인 두 사람이 만나도 좌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 지구적인 세계적 평균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도 나눌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저도 아래로부터 세워지는 권위를 진정한 권위로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나를 제가 2004년 1월 17일 ‘할머니에 관한 추억’을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많이 야단맞고 자랐습니다. 무슨 일 시키면 ‘예’라는 대답하는 대신 ‘왜요’라고 물어서, 어른한테 따지고 대든다고.


 저는 불가지론자, 다원주의자에게 신앙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저는 신기하게 까지 여겨집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도 어렸을 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교사까지 했음에도 지금은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상상이 안 됩니다. 어떻게 신앙이 없는데 교사를 하지? 신앙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지?


 저의는 고민의 시작은 성경의 문구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캘빈의 예정설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든 어디까지 자유의지로 볼 것이냐. 그런데 이것은 꼭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의 고민은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의 관계는 완전한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고민했던 창조론, 진화론에 대한 고민,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육신의 부활, 영생이라는 고민을 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 외에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의 의미 등등.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2:18-22)]


 제가 군복무 시절 신학대 학생인 군종병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는데, 선악과가 사과냐, 선악과를 하와에게 건네 준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사과가 맞나, 가인과 아벨은 누구와 결혼했냐 등등. 그리고 그 친구에게서 신학적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에 성전temple을 예수님 자신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이 고민하는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경의 단어 의미를 사전적 단어로 해석할 것이냐, 상징적 단어로 해석할 것이냐에 대답을 현 시점에서 누구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mannerist님은 사전적 단어 해석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라고 말씀하였지만, 글쎄요 그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나온 하루 지금의 하루일까요 아니면 비유일까요. 선악과를 준 뱀이 뱀일까요. 수면 중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이 빛을 나중에 창조했다고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소립자 물리학이 발견한 빛보다 수소가 먼저 있었다고 좋아해야 할까요.


 저는 인간의 창조론과 진화론도 깊이 갈등하지 않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영혼을 만드시고 이에 걸 맞는 신체를 주셨다고 쓰여 있지 않고, 또는 신체와 영혼을 동시에 창조하지 않았고, 흙으로 지으신 후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물질의 육체가 있은 후에 정신을 나중에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이 되질 않고 현대 과학으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이 진화했다라고 하면 궤변이 되나요.


 창조에서 수십억년의 광대한 우주를 수천년짜리의 작은 상자에 넣게 된 것은 어느 신학자(이름을 정확히 기억 못함)가 ‘아담의 계보를 쫓아 한 사람의 세대가 얼마이니 세상이 창조된 것이 수천 년이다.’라고 했지만 현대 신학에서는 누구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이 실제로는 손자를 포함한 아들이 아닌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육신의 아들이 아닌 신앙의 계보라는 것이 개신교(아마 가돌릭도 - 신교도 모르지만 구교는 전혀 몰라요.)의 정설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선 무한과 시간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빅뱅에 공간과 같이 태어났는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빅뱅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어떤 과정을 통해 빅뱅이 생겼냐 하는 질문이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지만 지구라는 것으로 유한이듯, 시간이 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예화를 들면 두 친구가 있었는데, 선의경쟁을 한 후 승리를 한 친구를 패배한 친구가 높여주는 의미에서 위(up)에 위치하자고 약속했고 선의경쟁 후에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목마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나중에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선의경쟁을 하고 승패가 갈렸는데, 어디가 위의 방향이죠.


 영생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의 개념에서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시간이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개념과 연관됩니다. 닫힌계의 두 사진을 비교하여 시간적 선후관계를 파악하려면 두 사진의 엔트로피를 계산하여 낮은 것이 앞선 시간이고 높은 것이 뒤의 것입니다.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이 <시간의 역사>에 기술하였습니다. ‘우리의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가역적이지 않지만 다른 빅뱅으로 만들어진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도 전혀 모순이 없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긴 국토를 갖고 있습니다. 왜 동서로 긴 국토면 안 되나. 안 될 것 없지요. 그저 그런 국토일 뿐인 것처럼. 우리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지만 다른 우주에 엔트로피가 증가하거나 일정한 우주가 있다면... 어느 알라디너는 영생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관심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시간의 개념도 정확하지 않는데, 게다가 무한의 개념까지. (참조 : 시간의 개념은 과학동아 2004년 1월호에 특집으로 실려 있습니다.) (마립간 페이퍼 2003년 8월 18일자 무한의 신비 리뷰 ‘부모의 무한한 사랑’)


 ‘육신의 부활’도 육신의 사전의 의미와 상징적 의미의 구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신세계의 상대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정신세계도 기독교내에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영, 혼백 이분법과 영, 혼, 백의 삼분법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학생 때에 알고 있던 것이어서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가치판단을 유보했다는 분야가 인지과학이라고 몇 번 말씀드렸으니 여기에 대한 설명은 더 진행을 못 하겠습니다.


 ‘우리의 를 사하시고’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죄의 정의로부터 문제가 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죄를 사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 육신, 악, 사망, 세상, 지옥이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렸고 가을산님이 현재 교회의 장벽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한 친구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 친구고 한 친구는 귀신이 없다고 믿는 친구입니다. 두 친구가 밤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흰 무엇이 앞에 둥둥 떠다니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친구는 그것을 귀신이라 우기고, 한 친구는 하얀 비닐, 천, 또는 외계인일수 있지만 귀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친구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제가 판단할 수 없지만 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아니면 어떤 광선에 의해 두 사람 모두 헛것을 보았다고 해도 비닐과 귀신이 없다는 것이지 광선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도 어렵습니다. 성서 고고학이라는 학문도 있으며 창조 과학회라는 모임도 있지만 과학적 증명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것에 저는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의 판단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요한복음 2:18-22에 의거하여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나오면 그 때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제가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죠?’하고 저보다 깊은 신앙을 갖고 계신 분에게 물으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하고 그분이 되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마 외로우셔서 그렇게 하셨나.’라고 대답하니 그분은 어느 정도는 맞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쓰여 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의 생성원리, 목적, 미래, 결론에 관하여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쓰여 있지요?


 ‘성경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 외에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책은 과학책이 아니므로 성경에서 Theory of everything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부모의 비유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예화로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 여려 편지를 남겼는데 자녀가 초등학교 때 그 중에는 늦게 식사하지 말라는 행동적 교훈도 있고 공부하라는 지침도 있고 네가 아팠을 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심정을 담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아기가 어른이 되고 직장을 갖게 되면 이 부모의 편지는 모두 소용이 없는 걸까요. 늦게 식사하지 말라는 것은 건강을 염려하라는 뜻이고 늦게 음주를 하지 않으면 되고, 학교는 졸업했지만 공부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직장생활 열심하고, 부모님 마음을 생각하고.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순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열심을 하려면 늦게 자야 되는데 건강을 생각하지,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도 마셔야 되는데, 직장생활 잘 하면서 어떻게 절제된 생활을 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이 편지에는 점심에 무슨 식사를 해야 할지 쓰여 있지 않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죠.

 성경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렸고,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약을 통해 알려주셨는데 예수님을 통해 회복이 가능합니다.)


 이교난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가을산님의 표현을 빌자면 저는 난교를 쫓고 있지만 종교적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잘라 말하기 곤란합니다. 경전, 수행,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죠. 이 인격적 관계가 가을산님의 표현으로 하자면 깨달음이 되겠네요. 부모와 자식관계지만 어떤 가족은 부모님께 전화하고 편지하고 찾아뵙고 선물하고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가족은 그렇지 못하고. 그것이 없다면 부모님의 편지는 잔소리죠. 교회나 종교 단체하고 하나님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 집에 방문해서 집 자체나 집에 일하는 분들이 부모가 아닌 것처럼, 혹 형이나 누나가 있더라도 이는 형제이지 부모가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누기도 힘이 드는데 누구를 전도하고 가르치겠습니까? 더욱이 저는 미혼으로 자식 키우는 부모 마음도 모르는데. 가을산님이 화두로 던지신 내용에 대해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글로 적었습니다. 저의 신앙이 기독교의 정통이나 기본이 아닌 것을 이해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추석이 다가오는 가을산님도 바쁘시겠습니다. 저의 집은 할머니 돌아가시고 찾아오는 친척도 없고 동생도 멀리 살아,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줄었지만 어머니도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편지 쓰다가 글도 길어지고 날짜 넘겼네. 다음에는 다른 주제로 글을 쓰겠습니다. 평범한 여대생님^^의 서재에서 몇 권 골라서 읽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좋은 휴일 되십시오.


 마립간 올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산 2004-09-1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긴 글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족이지만..... '다윈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입니다.)

마립간 2004-09-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합니다. 다원주의로. 틈틈이 실수를 많이 합니다. 다윈주의를 다원주의로 바꾸면 문맥이 이상하나? 문맥이 어색할지 모르겠으나, 불교를 믿기 때문에 기독교가 싫다거나 기독교를 싫어 하지 않지만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개종할 필요가 없다는 다원주의라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전도(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강요로 생각하더라도)하다는 입장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가족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알라디너들(제가 즐겨찾기 한 많은 분들, 제가 즐겨찾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방문하는 서재의 주인장 들)이 마이페이퍼에 영화 카테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카테고리가 없더라도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올려주셨는데.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안 올라오네. 이번 주말에 한 번 볼까하는 영화인데... 재미있을까?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얀마녀 2004-09-1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올려주셨던데요. 한 번 읽어 보시는건 어떨까요.

마립간 2004-09-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서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른 영화평이네요. 가족 영화가 아니라 조폭 영화다. 글샘님이 '가족'을 보자 말자... 라고 하셨네. 이것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얀마녀 2004-09-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안 보려구요. ^^

마냐 2004-09-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물이 너무 날거 같아 안보고 싶은데...
옆자리 후배가 "와이프랑 보러가는데 피곤해서 그냥 자다올려구요"라며 갔다가 "어, 생각보다 꽤 괜찮아서 안 자고 봤어요"라고...^^;;;

비로그인 2004-09-17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습니다. (마립간님 오랜만입니다. 쭈~우욱 함께 하고 있다는거 알아주세요 ^^::)

stella.K 2004-09-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봐서 손해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감이라는 게 생기면 포스터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영화들이 있죠.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도 상당히 괜찮을 것만 같다는...!

마립간 2004-09-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흘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눈물 흘릴만한 영화도 흔치 않는데.
폭스바겐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폭스바겐님의 서재 방문에 뜸한 것이 죄송스럽네요. 자주 인사하고 지내지요.
 
 전출처 : sweetmagic > 영화와 드라마 속의 수학

영화와 드라마 속의 수학


[한국일보공동] 수학으로 세상읽기

 

 
‘영화 속에 무슨 수학?’ 하겠지만 수학이 등장하는 영화는 드물지 않다. ‘굿윌 헌팅(Good Will Hunting)’은 수학적 천재성을 지닌 청소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는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내쉬를 주인공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던 영화 ‘파이(Pi)’는 원주율 파이에서 나온 제목으로, 역시 천재 수학자를 소재로 한다.

영화 ‘큐브1(Cube)’의 속편인 ‘큐브2(Hypercube)’에서도 수학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육면체 모양의 폐쇄된 방, 즉 큐브의 입구에는 번호가 적혀 있는데, 이 번호는 그 방이 함정인지 아닌지를 알려 준다.

이 영화에서는 특별한 수학적 감각을 지닌 리븐이라는 사람이 큐브 번호가 소수(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 떨어지는 수)인지 판별하여, 함정이 있는 방인지 아닌지를 알아낸다.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자문을 한 수학자 프라비카(David W. Pravica)는 자신의 캐나다 주민등록번호(SIN, social insurance number) 476,804,539를 큐브 번호의 하나로 사용하기도 했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은 내용 전개에 수학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드라마에서 로맨티스트인 수학영재 승재(윤계상)는 여자친구 유민(정다빈)에게 방정식을 통해 마음을 전한다. 방정식 17x2-16|x|y + 17y2=225의 그래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하트 모양이 되기 때문에, 이 방정식을 일명 사랑의 방정식이라고 한다.

한편 승재는 유민에게 “내 마음의 변수 를 찾아보면...”이라고 말하면서, 변수 가 결국 유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연인 사이에서는 파트너가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것은 함수에서 독립변수의 영향을 받아 종속변수가 결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드라마는 좋아하는 마음이 무한히 이어지면서 좋은 일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등장시킨다.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Möbius)가 처음 생각해 낸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 모양의 긴 띠를 한 번 꼬아 양 끝을 연결하여 고리 모양이 되도록 한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한바퀴 돌면서 선을 긋고 가위로 오려보면 두 조각이 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하나의 얇고 커다란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뫼비우스 띠의 성질은 두 마음이 합치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은유할 수 있다.

또한 뫼비우스의 띠의 한 점에서 시작해 고리를 따라 원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선을 그어보면 안과 밖을 모두 돌아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보통의 고리는 안쪽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면 안에만, 바깥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면 바깥에만 그려지지만, 뫼비우스의 띠는 안팎의 구분이 없는 독특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안과 밖에 모두 선이 그려진다. 드라마의 두 사람을 각각 안과 밖이라고 보았을 때 안팎이 구별되지 않는 이런 성질 역시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하는 적절한 은유가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조세희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첫 번째 제목으로도 유명한데, 이 소설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중층적 의미를 드러낸다.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에서는 무미건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학이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수학의 본질적인 내용을 드라마에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수학 그래프나 수학 개념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연결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일반인들이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  kparkmath@netia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NGO의 세계화

 - 마냐님의 <세계화와 싸운다> 리뷰의 댓글에서 바람구두님이 질문하신 것과 마냐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 부제 : '세계화를 반대하기 위한 NGO의 세계화, 내재적 모순'

 

 저의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rhetoric 모순이 그대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생각의 단초로 중세시대에서 근세시대로 오는 상황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지방 분권이 중세 즉 당시의 지배 계급의 꼭대기에는 물론 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지배력을 가졌던 것은 지방 영주였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왕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져 있던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타당 하느냐'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둘 다 부도덕하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사람에 권력이 집중되는 근세 제국주의 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중세가 그보다는 더 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까? 아마 근세 국가 형태의 지배를 위해서는 장원이라고 하는 것의 연합보다 왕권이라는 것이 국가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힘을 발휘하기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지배구조보다는 근세 국가의 지배구조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느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로마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NGO는 왜 세계적 연대를 갖으려고 할까? NGO의 상대, 즉 국가(대개의 선진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NGO가 세계적 연합이라는 형태를 갖고 그 목적을 성취했다면 세계적 연합을 풀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NGO의 상대는 지속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대로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의 확대를 다시 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NGO도 지속적인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NGO가 힘을 갖게 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도덕성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기대하지 못 하겠습니다. 어떤 강대국이 또는 독재적인 지도자가 철인적 도덕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죠.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할 때는 자본가가 사회개혁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 계급은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신분제도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된 이후 그들 즉 자본가들은 다시 지배계급으로 올라섰습니다.


 제가 가을산님이 세계 보건 포럼에 참석하러 떠나실 때 했던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NGO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구가 비대해지거나 영향력이 생기면서 권력화하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이런 이야기 아세요. '천사가 악마를 이기기 위해 한참을 싸우고, 다 이긴 후에 자신을 돌아 보았더니 자신이 악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추어를 지향하던 올림픽도 과연 아마추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초심을 잃기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냐님이 이야기하셨듯이 NGO의 세계화는 영미 거대 기업과 금융의 다를 수 있습니다. 출발 선상에 있을 때는, 아니면 힘을 없을 때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죠. 힘(경제적, 정치적 힘)을 갖게 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났을 때에 처음의 순수함이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국가내의 인권문제도 처음에는 순수한 인간적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내정 간섭의 한 가지 도구로 사용됩니다.


 NGO의 영향력 역시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도 문제인데,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는 있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계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죠. 그러나 지구상에 이라크 전쟁 이외에는 전쟁이 없기 때문에 제가 다른 전쟁을 모른 것일까요. 아미 그곳에 NGO의 적절한 상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제가 이야기한 ‘NGO의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세계화가 강대국 또는 다국적 기업이 힘을 추구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NGO 역시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힘을 반대하기 위한 또 다른 힘 이것을 저는 내재적 모순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저는 어렸을 때 (1970년대)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 억지를 위한 군사력.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냐 2004-09-1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직이 커지고 힘이 생기면 권력화한다..맞는 말입니다. 실제 얘기안되는 조직 이야기도 가끔 전해듣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며칠전 라디오에서 월 80만원 주는 단체에서 언론운동 하시는 분 얘기를 들었슴다. 힘이 없을 때는 순수해도 힘이 생기면 저들과 닮아갈게 뻔하다..고 해서 그들의 현 시점에서의 노력들을 지레 검열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세계화. 그거 폐해 많습니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혹은 보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견제하기 위해..뭔가라도 하는 건 그들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들이 '연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싸움의 상대방과 자본력이나 정치력이나 힘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일단 눈앞의 전선이 분명한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본질적으론 비슷한거 아니냐,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초심을 잃지 말라구 비판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지만 말임다. ^^;;;

마립간 2004-09-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일하는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순수성을 잃더라도 순수함을 갖고 일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치관은 공功과 과過가 서로 상쇠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잘못의 가능성을 갖고 (없을 수도 있는데) 폄하한다는 것은 더욱 더 말이 안 되죠. 저는 내재적 모순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가을산님도 힘의 차이에 대해 같은 평을 주셨습니다. 전쟁의 억지를 위한 군사력도 반드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속에 내재적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비판의 눈길 - 얼마전 '맹목적 추종이 아닌 무정한 압박'에 대한 설명을 가을산님에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을 향해 나가고자는 마음이겠죠. NGO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박노해 -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여성해방’시로 평가받는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는 부부가 같이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담당해온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절절히 읊고 있다. 이 시는 ‘당시 남성으로서는’ 선진적이었지만, 시의 주된 내용은 “앞으로는 내가 이불을 꿰매겠다”가 아니라 “나를 깨우쳐준 아내에게 감사한다”이다. 시의 화자는 ‘주인’과 ‘노예’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체의 성찰과 각성을 위해 타자의 ‘훌륭함’을 동원하고 찬양한다. 이미 많은 남녀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적 성별 관계의 특징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기대라는 남성의 이중 시선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처럼 이 시는, 여성을 착취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여성에게 의존적인 한국 남성 무의식의 ‘80년대 진보 버전’이다.

얼마 전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한국 남성들은 현모양처형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현모양처에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여성을 배우자로 원한다. 아마 한국 남성의 여성 팬터지가 가장 잘 재현된 티브이 드라마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다모>일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밥 잘하고 정숙하면 됐지만,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밥만 잘해서는 어림도 없다. 밥 잘하면서 돈도 잘 벌고, 정숙하면서도 섹시해야 하며(물론, 섹시해야 되지만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 예쁘면서도 지적이고, 똑똑하면서도 겸손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앞에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 드라마 <다모>의 여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며, 게다가 무술까지 잘한다.

성별 분업은 여성의 경험을 드러낼 언어가 없어서 서구·남성의 언어인 실증주의를 빌린 표현이다. 성별 분업은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계급 문제로 인한 남성 집단 내부의 차이로 인해, 생계 부양이라는 성역할을 모든 남성이 잘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공적 영역의 임금노동을 못하는 남성은 많지만, 가사노동에서 제외된 여성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두 영역에서 이중노동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리도 억압 세력의 이해 관계에서 구성된다. 앞의 시에서처럼, 타자의 고통은 주체를 위해서 제기될 때만 받아들여진다. 여성의 노동권은 생존권 차원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력 활용 차원에서 주장되거나(활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제일 먼저 해고된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는 여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패 정치를 청소하기 위해, 동성애 커플의 결혼 합법화는 동성애자의 당연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이성애 결혼 제도의 다양성을 위해 옹호된다. 타자화의 내용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때만큼은, 피해자 여성은 억압자 남성을 위한 구원 투수가 되어 ‘좋은’ 타자가 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장식하는 컬러 물감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초현실주의에서 좌파로 돌아선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미래의 시>의 한 구절,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낯설지 않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전히 주인공은 남자다. 여성은 설명하는 주체가 아니라 설명 대상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 문명의 선후에 있을 뿐, 현재를 사는 같은 시민이 아니다. 남성에 대한 기대는 격려를 동반하지만, 여성에 대한 기대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여성이 인류의 미래이고 대안이라는 높은 도덕적 기대가 아니라 동시대에서 차별 받지 않는 것이다. 정말 여자가 남자의 미래라면, 지금 모든 권력을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에게 이양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남자의 인생은 남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남자의 미래는 남자의 과거다. 피해자에게 해결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말라.

출처 : 한겨레 2004-05-26 17:36


바람구두의 중언부언 ------ 이 사람 멋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9-16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6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