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기억 속에서도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2주
최근에 본 영화들에서 유독 아버지의 사랑이 눈에 띄었다. 엄마의 사랑과 질적 양적 우위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두드러졌던 영화들을 꼽아 본다.
1. 먼저 요새 제법 좋은 흥행성적을 보이고 있는 '완득이'다.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김윤석과 유아인이라는 믿을 만한 배우들을 주연으로 선택해서 최소 본전 생각은 안 나게 만들 영화라는 확신을 갖고 극장을 찾게 만들었다.
소설 완득이와 거의 흡사하지만, '똥주' 선생의 로맨스라는 새로운 카드가 제시되었고, 그게 또 제법 재밌다. 똥주 선생 파트너와, 완득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다소 미흡했지만, 완득이와 똥주 선생의 캐릭터는 제대로 잘 살려내었다. 무엇보다도 일등 공신은 똥주 선생의 김윤석이다. 수업은 뒷전에 입도 험한 선생이지만, 그 바탕에는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해가 짙게 깔려 있다. 현실에서 저런 선생이 있다면, 사립이라면 잘렸을 것이고, 공립이었다면 절대 승진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학생들이 그 진심을 알아주고 의지해 준다면 좋겠는데, 그게 또 가능할까 물음표가 먼저 떠오른다.
곱추 아버지에 집 나간 어머니는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오셨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가난한 집 아들 완득이! 그래도 삐뚤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준 착한 아이다. 똥주 선생의 지나친 애정(?)으로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얄궂은 녀석이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잘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자 열심으로 도전하는 당찬 녀석이고, 효심도 깊은 좋은 아들이다. 춤추는 남편이 싫어서 집을 나갔다고 말을 하는 어머니의 변명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그 부분은 원작에서도 개연성이 적은 편이었으니 영화의 탓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하고서도 악착같은 생활력을 보여주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는 성실한 사람으로 나온다. 완득이는 속이 상했던 어느 날 가출을 꿈꾸지만, 지방 시장에 돈을 벌러 간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가출하겠다고 남긴 메시지는 본인이 먼저 확인을 하고야 만다. 완득이가 조금 더 독한 녀석이었다면 제시할 '핑계'는 아주 많았겠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완득이가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비록 총각 선생이지만 옆에서 시시콜콜 완득이를 못살게(?) 굴며 보살펴주는 똥주 선생의 마음씀씀이도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마음과 무척 닮아 보인다.
완득이는 연극으로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작 소설, 영화, 연극 중 연극이 가장 좋았다. 며칠 전에 엄마도 이 영화를 재밌게 보고 오셨는데 가족이 함께 보기 좋은 즐거운 영화다.
★★★☆
2. 두번째 영화는 SF영화로 보이지만 뜻밖에도 무척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지닌 영화 '리얼스틸'이다.
2020년이라는 근미래에 로봇 파이터를 꾸리며 근근히 살아가는 전직 복싱 선수 찰리 캔튼(휴 잭맨). 빚은 나날이 늘어가고,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유일한 재산인 로봇마저도 망가져서 앞날이 막막하던 때에 오래 전 헤어진 아내의 부고 소식과 아들의 친권 문제가 그에게 떨어진다. 죽은 아내의 여동생은 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가 친권을 포기하기를 원한다. 척 봐도 돈 좀 있어 보이는 그들 부부에게서 거액을 받아내고 기꺼이 친권을 포기하겠다고 각서를 쓰는 캔튼에게서 부정이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들 맥스 캔튼의 등장부터다. 찰리는 휴가를 간 처제 부부 대신 한동안 맥스를 맡아주기로 했는데, 알고 보니 맥스가 로봇 복싱의 광팬이었던 것이다. 아들과 맞바꾼 돈으로 로봇을 구입해서 재차 재기를 꿈꿔보지만 냉정한 머리 대신 다혈적 기질이 앞서는 찰리는 로봇도 잃고, 돈도 잃고, 아들에게 면박만 받는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게 되는 '아톰'이 등장하는데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위기 속에서 그래도 찰리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님을 알게 되고, 이 육중한 드라마 속에서 소소한 유머와 즐겁게 조우한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로봇'에 대해서 물으면 그 차가운 금속성을 먼저 떠올리며 비인간적인 느낌을 먼저 얘기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물으면 애완용으로 여길 만큼 무척 친근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를 들었더랬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거기에는 데즈카 오사무의 활약도 큰몫을 해내지 않았나 싶다. 영화 속에서 나온 무척 인간미 느껴지는 로봇의 이름이 '아톰'인 것도 그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자신을 돈과 맞바꾼 아빠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맥스와, 그것을 들켜버린 찰리가 쉽게 친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거듭되는 시합과 좌절과 재도전이 겹쳐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지난 시간의 애증을 닦아낼 우정이 쌓이게 된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정과 사과라고 생각한다. 찰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지 않으려고 했다면, 아무리 두 사람 사이에 좋은 추억이 쌓여도 진정한 의미의 가족으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먼저 내려놓고, 지난 시간을 인정하고 나서야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시간이 의미있게 채워졌다. 그 훈훈한 이야기는 영화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를!
마지막 시합에서 심판들이 내린 결말은 참으로 현실을 닮아 있어서 씁쓸했다. 지난 무상급식 주민 투표의 결과에 대해서 홍준표 의원이 내린 결말고 몹시 닮았다고나 할까.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싸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비단 영화 속의 경기뿐 아니라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대입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고 격투기와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지만, 남자들만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가족이 함께 보기 좋은 영화이고 누구라도 좋아할 훈훈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될성 부른 아역 배우를 골라내는 안목이 확실하다!
★★★★
3. 세번째는 오늘 소개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뜨겁고 감동적인 영화 '뮤직 네버 스탑'이다.
기억이 멈춘 아들과 추억이 멈춘 아버지,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 -이라는 영화이 소개 문구부터 벌써 가슴이 뭉클해진다.
영화의 시작은 20년 전 가출했던 아들을 찾았다는 전화 한통으로 출발한다. 노숙자 생활을 하던 아들은 뇌종양에 걸렸고, 수술을 받았지만 15년 전 기억에 멈춰있는 상태이며, 새로운 정보는 받아들여도 금방 잊어버리는 상태에 있었다. 때마침 아버지는 실직을 했고, 엄마가 대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음악을 통해서 아들을 치료해보려는 시도를 하던 와중에, 아버지는 아들과 떨어져 지낸 20년 세월의 간극에 많은 상처가 노출되었음을 알게 된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진심을 전달하지 못했던 시간을 되돌려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아버지의 고군분투가 아주 재밌고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전설적인 노래들은 영화의 가치를 한껏 더 높여주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과 귀가 함께 호강하는 영화다.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된 많은 뮤지션들의 곡이, 그리고 여전히 전설로 남아 함께 호흡하는 그들이 노래가, 그리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도 활동하는 뮤지션들에게는 응원과 감사의 박수가 절로 나오게 한다.
음악을 주요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늘 가슴을 후벼파는 감동을 주던 지난 실적에 한 표를 더 던져주며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동일 소재로 국내에서 이 작품을 재현한다면 어떤 노래와 어떤 뮤지션들이 나올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몹시 벅찬 느낌이다. 역시 음악은 아름다운 언어이며 시이고, 대화다. 결코 끝나지 않는!
★★★★★
4. 마지막 영화는 '트리 오브 라이프'다. 사실 뮤직 네버 스탑을 보던 날 예매했던 영화였는데, 뮤직 네버 스탑이 상영관이 별로 없어서 좀 더 보기 수월한 영화를 한 주 뒤로 미뤘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이라는 큰 상을 받은 영화이니 한 번 더 관심이 가기도 했고, 브래드 피트와 숀팬이 주연을 맡았다고 하니 또 한 번 관심을 끌었다.
얼굴만 보면 숀팬이 아버지 역할일 것 같지만, 브래드 피트가 아버지이고, 숀팬은 그 아들이 자라고 난 뒤의 모습이다. 몹시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모습의 아버지 브래드는 세아들 중 장남에게 유독 더 엄한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에 권위적이고 때로 모순덩어리로 보이는 아버지가 큰아들 잭은 밉기만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닮으면서 자란 것도 큰아들 잭이었다.
영화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목소리로, 동시에 동생을 잃은 큰아들 잭의 목소리로 신에게 문답하는 형식으로 긴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여정을 우주의 창조에 맞물려 생명의 신비를 화면 가득 보여준다. 대사가 많지 않고 압도적인 영상미와 장엄한 음악으로 그 자리를 채워내는 감독의 재주가 놀라웠다. 다만 이런 느낌의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두시간이 넘는 영화의 런닝 타임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위험은 있다.
캐스팅이 참으로 놀라웠는데, 아들 셋이 하나같이 브래드 피트와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특히 막내아들은 브래드 피트 진짜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잭' 역할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경쟁률의 오디션을 보고 그 중 세명이 최종 후보가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세 명이 세 아들 역할을 나눠 맡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탁월한 선택이다.
엄한 아버지와 달리 자애롭고 감싸주기 바쁜 엄마 역은 제시카 차스테인이 맡았다. '언피니시드'에서 이미 얼굴을 익힌 배우인지라 반가웠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니, 세상에 내가 본 영화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헬프'였다!
언피니시드와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의 외관상 이미지가 비슷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헬프에서 맡은 셀리아 푸트 역할은 전혀 다른 이미지여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다양한 색깔을 연기해내는 배우였구나 싶어 괜히 또 반가워지고 말았다.
이런 조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또 그 아버지를 닮은 큰 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는 고구려 3대 임금 대무신왕과 아들 호동왕자가 떠오른다. 물론, 그 세계관은 만화가 김진의 것이긴 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 일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도는 영조와 사도세자도 있고 여러 유형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신에게 묻는 형식으로 줄곧 진행되는데, 그때의 신은 이 영화 속에서는 분명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분명하지만, 영화의 스타일을 보건대 꼭 기독교의 신 하나로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절대적 존재로서 커다란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쉽게 대입이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이 시련을 겪고 나쁜 사람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을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의문을 품고 회의를 갖게 된다. 어린 잭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커다랗고 힘센 사람이었지만, 그 아버지도 직장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좌천을 겪기도 하고 여러 시련 속에서 작아지는 존재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일은 자존심을 떠나서 아버지라는 위상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 속에서 서로를 제대로 응시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영화의 빼어난 영상미는 두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마지막에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진화를 마무리하는 영상에 다가갈수록 그 압도적인 힘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대사를 아끼고도 많은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각자 받아들이는 몫이 다르니 또 무수한 가지 수의 감동이 피어날 터이니 역시 경이롭기 그지 없다.
★★★★☆
네 편의 최신작이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한데 묶어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 영원한 닮은꼴, 넘어서야 하는 존재, 인정받고 싶은 존재, 무엇보다 안기고 싶은 따스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니와 딸, 혹은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도 마찬가지의 구도이긴 하다.) 때로 '애증'의 대상이어서 질투의 상대이기도 하고 결투의 상대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동반자가 되고 형제가 되는 애정의 상대. 그 오래고 질긴 인연은 곧 나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