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 Sunn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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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딸을 둔 나미의 하루는 새벽 6시에 시작된다. 남편과 아이를 위한 건강 음료를 준비하고, 부랴부랴 나가느라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 딸에게 토스트 한쪽이라도 먹이려고 분주하다. 병원에 계신 할머니께 전화 한 통 넣어달라고 하지만 딸은 답이 없고, 남편은 정성을 보여주는 대신 명품 백이라도 사드리라고 현금으로 성의 표시를 한다. 생활은 풍요롭지만 나미의 일상은 꽤 기계적이고 건조하다. 그랬던 일상을 바꾸어 버린 것은 엄마를 찾아간 병원에서다. 영화는 병실의 환자들이 모두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분노하는 장면에서부터 초반 웃음을 끌어낸다. 설마 이 진행은 아니겠지? 하는 식으로 여지 없이 진행되는 드라마를 모두들 욕하면서 열심히 시청한다.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은 빼놓을 수 없는 설정들이다. 대놓고 비웃지만, 대놓고 인정하는 드라마의 법칙들. 

나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옆 병실의 '하춘화'라는 이름이다. 누구라도 잊지 못할 법한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다. 혹여 동명이인일까, 아님 내가 기억하는 그 친구가 맞을까 병실로 들어가보는데 딩동뎅~ 고등학교 때 그 친구가 맞다. 무려 25년 만의 재회이건만, 친구는 암 투병중이었다. 이제 두 달 정도 살까 말까인 친구가 옛 동창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들의 '써니'를...... 

옛 모교를 찾아가던 나미는 어느새 17세 소녀가 되어버렸다. 전라도 벌교에서 막 서울로 전학온 촌뜨기였던 그녀. 학교에서 이래저래 얽힌 친구들은 유명한 불량 써클의 아이들. 거기에 졸지에 끼어서 7공주가 되어버린 나미는 범생이에서 소박한 일탈들을 해보며 새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쌓는다. 물론, 그 중에는 꽤 위험한 추억들도 있었지만... 

 

김영옥 씨가 나미의 할머니로 나오는 순간, 이미 사투리와 욕의 걸죽한 결합은 예상되어 있었다. 첫번째 욕잔치는 대사 외운 티가 나서 좀 어색해지만... 맞짱 뜨기로 된 장소에서 혼자 엉거주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미는, 지나친 공포로 뜻밖의 효과를 내며 싸움을 승리로 끌어낸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7공주의 멤버로 손색이 없다.  라디오에 자신들 친구들 모임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보낸 사연이 채택되었고, 디제이가 멋진 음색으로 골라준 이름은 '써니'였다. 햇빛 찬란한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이다. 마치 그 시절의 그 소녀들처럼.

재밌게도, 어린 시절 배역과 성인이 되었을 때의 배우 얼굴이 몹시 닮아 있다. 유호정과 심은경이 그랬고, 진희경과 강소라도 몹시 닮아 있다. 비장의 무기로 등장하는 수지의 성인 배우도 그 표정에서 닮아 있었다. 대체 누굴 먼저 캐스팅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배역을 맡긴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유호정을 골랐기에 심은경이 나온 것인지, 심은경을 택해서 유호정이 따라온 것인지 말이다.  

 

나미가 처음으로 찾아낸 친구는 장미였다. 모교에 갔다가 선생님께 두고 간 장미의 명함을 건네받은 덕분이었다. 보험왕을 노려보지만 한 달 내내 아무 성과도 없던 장미는 춘화의 병실에서도 보험은 들었냐는 확인부터 날린다. 과한 직업정신인지, 혹은 웃자고 넣은 설정인지, 아무튼 시종일관 참 무리수를 둔다.  

이어서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찾아보려고 애를 쓰나 했더니 너무 쉬운 패를 내민다. 흥신소를 찾아간 일. 물론, 시간이 빠듯하고 돈은 많으니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억지 웃음도 종종 쥐어짜서 다소 불편했다.  

'우연'을 가장한 채 진희와 금옥, 복희를 모두 찾아내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서로 다르다. 학창 시절 욕쟁이였던 진희는 교양있는 척하며 온갖 내숭을 떠는 엄살녀가 되어 있었고, 금옥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 어려운 형편을 끌어가고 있었다. 제일 기가 막혔던 것은 복희였다. 미스코리아가 꿈이었던 꿈많던 소녀가 어머니 사채 빚에 떠밀려 신세가 망가졌고 지금은 딸과도 떨어져 살며 알콜에 찌든 접대부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또 돈많은 싸모님 유호정이 돈으로 그 순간을 모면하는 장면은 참 불편했다.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일진 아이들을 혼내주는 설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 떼로 몰려가 애들을 때린 것도 문제지만, 그네들이 합의금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싸모님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과감하게 학창 시절 껌 좀 씹던 언니 흉내를 낼 수 있었을까.  

제일 가관이었던 것은 마지막 엔딩이었다. 그렇게 돈을 뿌리며 한 순간에 인생 역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네들의 우정은 빛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네들은 옛 추억을 다시 행복하게 되새기며 자신에게도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  

무려 자살기도까지 한 친구의 소식을 묻지도 듣지도 않은 채 25년이나 떨어져 지낼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소식을 접해보려고 애를 썼어야 하지 않을까? 준호를 찾았다면 그를 통해서 수지의 소식까지 물어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장면장면이 꽤 웃기고, 음악도 신나고, 추억을 흠씬 불러올 수 있는 좋은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몹시 불편했다. 전작 '과속 스캔들'의 유쾌한 감동과 캐릭터의 성장을 써니에서는 만나기 어려웠다. 캐릭터의 각성은 찾아볼 수 있지만, 여러모로 약했다. 돈으로 웬만한 것은 해결되고 마는 우리 사회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영화로까지 확인하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마무리는 상당히 아쉬웠지만 추억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는 몹시 반가웠다. 80년대 교복자율화 세대와 데모 행렬,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교사의 등장 등은 적절히 코믹과 살벌함을 섞어서 표현했다.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인데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갔는지, 혹은 제자리인지 잠시 생각하게도 만들었다.  

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첫사랑 그 놈은 배우 김시후였다. 친절한 금자씨에도 출연했지만, 내게 더 인상을 남긴 것은 이승환의 '심장병' 뮤직비디오에서였다.(그때는 드림팩토리 소속 배우였다.) 이 아이가 자란 다음에는 어떤 배우가 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인물로 본다면 김원준이 출연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았는데 내 예상을 뒤엎고 다른 배우가 등장했다. 한때는 미중년의 대명사였건만, 어쩐지 망가진 옛 꽃미남이 된 것 같아서 좀 씁쓸했다. 오래 전에 전하지 못한 선물을 내밀고 그냥 사라져버린 나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대우를 받은 것 같아서 이 부분도 배려가 부족해 보여 아쉬웠다. 누구라도 침착하기는 힘들 상황일 테지만... 

요새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 서교수로 나온 배우가 유호정의 남편으로 등장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재밌다고 해야 할까.   

영화 포스터에는 7공주가 모두 나오지 않는다. 김선경의 왼쪽에는 나름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한쪽 팔만 나왔다. 그 사람, 참 분위기 있더라.  

엄마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혼자 보게 되었다. 엄마의 나이대보다는 80년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면 더 관심이 갈 영화다. 이제 강형철 감독은 또 어떤 추억과 노래를 갖고서 관객을 웃게 만들까? 전작에 비해 만족도는 떨어졌지만 다음 작품은 여전히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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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5-2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를 보니 중학생역 배우들은 7명인데 성인 배우는 6명이네요?? 한명은 찾지 못한건가요^^

마노아 2011-05-24 2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이에요. 안 읽은 티가 팍팍 남..ㅎㅎㅎ
하핫, 마지막 한 명도 끝내 찾아냅니다. 나름 그게 영화의 별미였거든요.^^

카스피 2011-05-25 18:09   좋아요 0 | URL
ㅎㅎ 얼굴만 보면 중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었네요^^

마노아 2011-05-26 00:06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도 중딩으로 오해받곤 해요.^^

웽스북스 2011-05-24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카이스트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 두번이나 봤는데 또 보고싶어요. 써니는 진짜 많이 아쉽죠. 돈많고 명짧은 친구.... 텐아시아에 강명석이 쓴 글이 있는데, 완전 공감돋아요 ㅋㅋ

마노아 2011-05-24 23:47   좋아요 0 | URL
토렌트 파일이에요. asf라서 화질이 안 좋긴 한데 이동하면서 mp3로 보기 좋아요.
이거 관심 없었는데 웬디님 때문에 보게 되었어요.ㅎㅎㅎ
강명석 씨 글 봐야겠어요. 안 봤는데 벌써 공감이 돋고 있어요.ㅋㅋㅋ

hanalei 2011-05-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보니 엠의 써니랑 연결이 있나요?

마노아 2011-05-25 06:51   좋아요 0 | URL
영화 중간에 노래가 몇 번 나와요. 엔딩에 멋진 춤에 쓰이고요~

프레이야 2011-06-10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리뷰 당선 축하해요~~~
공감해요. 결국 경제적가치로 위안 받는 해피엔딩이 과장되고 허무맹랑하면서도 씁쓸했어요.
욕설이 난무한 거도 그렇고 시위대 속에서의 난투도 너무 희화적이라 맘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게 호감 여배우 유호정의 재발견이었어요. 그걸로도 좋았어요.
빗방울 떨어지는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 배캠에서 보니엠의 써니 나오대요.ㅎㅎ

마노아 2011-06-10 23:1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사해요.^^
마무리까지 돈으로 도배를 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웃고 감동도 받고 끝났을 것 같은데 끝까지 저리 가버리니,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나 생각은 무엇일까 싶어 영 개운치가 않았어요.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지요. 게다가 어쩜 그렇게 닮은 배우들을 고를 수 있었을까요. 신기했답니다.
영화 속 써니 노래 참 좋았어요.^^

루쉰P 2011-06-1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2관왕 당선 왕 축하드려용!! 대단하심!!

마노아 2011-06-10 23:19   좋아요 0 | URL
하핫,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