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동네에는 손님이 많지 않은 구립 극장이 하나 있다. 늘 적자를 면치 못하던 극장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제대로 된 영화를 올리자...라는 갸륵한 생각을 한 것인지 독립영화 전용관을 만들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하나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을 더 올라가서 복도를 건너고, 다시 한층 내려갔다가 다시 한층을 올라가야 나오는 복잡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처음엔 버스 타고 지나면서 포스터만 보고는 비호감이라 무심코 지나쳤다. 작은 글씨 문구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나중에서야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를 접하고 부끄러웠다. 내가 비호감이라고 느꼈던 저 포스터는 신부님이 항암치료 중이신지라 얼굴이 많이 상했을 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 이태석 신부는 가난한 10남매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바느질로 10남매를 키워내셨다. 장학금 한 번 타지 못하고 의대 6년 공부 뒷바라지를 맡겨야 했으니 신부님의 미안함도 꽤 크셨을 것이다. 그리 고생해서 의대를 마친 아들, 당연히 넉넉한 삶을 보상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신부가 되고자 했다. 이미 형과 누님이 신부와 수녀의 길을 걷고 있던 때였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잡지 못했다. 신학 대학을 마치기 전 다녀왔던 수단에서의 봉사가,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지독히 가난한 나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에서, 그렇게 그는 꽃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 태양 집열판을 설치해서 냉장고를 가동시킨다. 백신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의 병동에는 하루 300명의 환자가 들어온다. 어떤 날은 한밤중에도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있다. 그는 문을 두번 두드릴 동안 만큼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환자를 받았다. 그렇게 도착한 이들은 이틀 삼일 길을 100km 이상 걸어왔거나 총상을 입은 응급 환자들이다. 뿐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낡은 자체 앰뷸런스를 몰고 여러 마을을 돌면서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들을 찾아갔다. 말라리아와 결핵 환자가 많았는데, 결핵 환자는 영양 공급도 중요하므로 따로 만든 병동에 입원을 시킨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가족들은 노숙을 불사하며 그 곁을 지킨다. 가족의 건강을 염원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과 이태석 신부를 향한 그들의 고마움의 크기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그가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것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John Lee. 그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쫄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음악적 재능도 탁월했다. 배우지 않고도 풍금을 연주했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수단에서 그는 학교를 세워 수단 아이들에게 초,중,고 교육을 시켰다. 케냐에서 자격증을 가진 선생님을 모셔오고, 그 자신이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기가 귀한 곳이었지만 기숙사 아이들이 밤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게 불을 밝혔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기 위해서 음악을 도입했다. 35인조 브라스 밴드가 그것이다. 그 수많은 악기들을 이미 다 익혔던 것이 아닐 텐데도, 그는 사용 설명서를 보며 연주법을 익혔고, 그것을 다시 아이들에게 전수했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들의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렇게 그는 향기로운 꽃이 되었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많은 계획들을 세웠다.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의료 혜택도, 교육도, 문화적 감성 그 무엇으로부터 배제된 그들의 삶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일으켜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깨닫는다.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해주는 것이라는 것. 그들을 위로해 주는 것. 친구가 되어주는 것. 그리고 그는 마땅히 그렇게 했다. 그의 향기는 너무 곱고 따뜻해서 톤즈의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평생을 우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온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그는 2008년에 한국으로 휴가를 나왔다. 지인의 권유로 건강검진을 받았고, 충격적인 결과를 듣게 된다. 수많은 암세포가 그의 내장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던 것. 그 와중에도 이태석 신부는 수단의 친구들을, 그의 가족들을 걱정했다. 파다가 와버린 우물을 걱정했고, 병원의 환자들을 걱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두 번 다시 그의 제2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가지 못한 그는, 남겨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다. 음악회를 열어 후원금을 모집했고, 책을 집필했다.
2010년 1월, 마침내 그는 열심히 달려온 48년 인생을 끝내고 그가 섬겨온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 할 일이 많았던 그였는데, 그에게서 안식을 찾을 사람이 더 많았는데 신은 그를 너무 일찍 불러들였다. 이제 그만 쉬라는 뜻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또 다른 사람을 향기로운 꽃으로 만들 것이다. 이미 그 싹은 자라고 있고 더 많은 양분을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수년 전부터 현지 인터뷰와 촬영 장면, 그리고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가는 모습 등을 담아서 이금희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진행시켰다. 톤즈의 아이들은 신부님의 죽음을 마음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음악을 가르쳐 줄 분도 없고, 치료해줄 분도 없고, 말없이 등록금을 대신 내주던 손길도 모두 사라졌다. 신부님의 사진을 받아든 아이들은 울먹이며 마지막 고별을 준비했다. 1년 반 가까이 묵혀둔 밴드의 옷을 챙겨 입고, 신부님의 환한 얼굴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사랑해 당신을'이다. 먼저 연주를 하고, 이어서 우리 말로 노래했다. 저 익숙한 노래 가락이 관객을 얼마나 울리던지...
영화의 예고편에는 신부님이 직접 작사 작곡 노래한 곡이 흘러나온다. 노래마저도 참 잘하신다.
9월 개봉이었는데 이제 상영관이 거의 없을 것 같다. 더 많은 사람이 보아야 할 영화인데 애석하다.
짧은 예고편으로라도 그 흔적을 나누고 싶다.
'울지마 톤즈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