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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에 사는 가난한 극작가 헬렌 한프가 영국의 헌책방에 편지를 보낸다. 본인이 찾는 희귀 고서적 목록 중에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을 보내달라고.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의 마크스&Co. 서점을 대표해서 프랭크 도엘이 답장을 쓴다. 그녀가 찾는 책들을 적당한 가격에 맞추어서 발송하였다고. 책을 받은 그녀는 답장과 함께 책값을 보낸다. 프랭크는 우편환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헬렌은 줄곧 돈을 봉투에 우송하는 것을 고집했다. 우체국이 멀다나.
프랭크가 보내주는 책들이 대개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만큼 좋았지만 가끔은 원성을 사는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기꺼이 항의를 했고 프랭크는 사과를 했다. 둘 사이에는 책과 돈만 오간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편지가 먼저 도착했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선물들이 대양을 넘어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배급제가 시행되던 즈음이어서 서점의 직원들은 모두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그녀와 편지를 나누었고, 그렇게 그녀의 친구들은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옆집 할머니까지 영역이 넓어진다. 가끔 헬렌의 친구가 런던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방문해서 서점을 휙 보고 가기도 했고, 산타 할아버지라도 된 듯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서점 식구들은 무엇보다 헬렌이 런던을 직접 방문해 주기를 원했고 그녀 역시 그러기를 원했지만, 그들이 서로 편지를 나눈 20년 동안 만남은 성사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치과치료로 돈이 많이 들어가서, 혹은 임대 아파트가 재건축이 들어가 급히 이사하느라 역시 경비를 다 쏟아붓는 등, 뭔가 계획을 잡을라치면 일이 생겨서 그녀의 런던행을 막곤 했다. 그녀는 가난한 작가였고, 쉬이 명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더디어지는 걸음은 핑계가 아니겠건만, 나는 어쩐지 그녀가 런던행을 진심으로 원하면서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랭크가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둘 사이에 우정을 넘은 '연인'의 감정이 솟아서 그런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로서는 보고 싶은 그 마음을 어찌 다스렸을까 답답하긴 하지만...
무려 20년 세월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고 가는 편지와 책, 그리고 선물꾸러미들. 무엇보다 거기에 담겨 있던 사랑과 우정과 인정이라니, 이보다 아름답고 귀한 인연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랭크가 사망하면서 편지로 책을 사는 일은 끝나게 된다. 서점의 대표도, 그리고 프랭크의 아내도 편지를 보내어 그녀에게 소식과 마음을 전한다. 뿐인가. 이미 장성한 프랭크의 딸도 헬렌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후로도 그들 사이에 더 편지가 오갔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이 시점까지의 편지를 책으로 묶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런던에서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렇게 묶인 편지 책이 그녀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름을 떨치고 나서 그녀는 더욱 프랭크를 안타깝게 추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서점과의 인연도...
1969년 4월 11일자 편지는 이 책의 마지막 편지다. 헬렌은 '캐서린'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런던을 가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그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는 헬렌. 왜 아니었겠는가. 그녀가 말한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145쪽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자리에 이 서점은 남아 있지 않다. 영화로, 뮤지컬로... 다양한 버전으로 그들이 나눈 우정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그 진짜 흔적을 찾아볼 서점이 남아 있지 않다니 애석하고 서글픈 일이다. 비록 그 자리를 알려주는 기념 동판이 있다지만...
다시 한 번 책 표지를 들여다 본다.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주소를 단 마크스 서점이 보인다. 아련하다.
이 책을 며칠 전 사랑하는 공장장님 공연을 기다리면서 몇 장을 먼저 읽었다. 친구의 얼굴이 얼핏 스쳐지나가는 까닭은 이 책과 함께 다른 책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아, 에미와 레오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 책의 헬렌과 프랭크도 에미와 레오처럼 지적이면서 유머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에미와 레오보다도 몇 십년 전에 이미 그들은 편지를 통해 서로를 궁금해 하고 아꼈다. 150여 페이지의 짧은 책장 속에서 20년 세월의 깊은 우정이 전달되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넘어서는 진중함 때문일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잊혀지고 소비되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찾기 힘든 느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덕분일까.
폭염주의보가 내리는 한 여름에 어울리는 책이 아니었는데도, 줄어드는 책장을 안타까워하며 즐겁게 읽었다. 그들의 편지 책 구매가 끊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눈물까지 날 정도로. 좋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예쁜 책이다. 헬렌과 프랭크처럼 아날로그는 아니지만, 그들을 닮은 인연과 우정도 내게 있는 듯하다. 고마운 일이다. 좋은 사람들의 얼굴이 두루 스쳐간다. 한 권의 향기나는 책이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다. 채링크로스 84번지.
지식e 두 도시를 오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