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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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를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떠나보면 절실하게 알게 되는 듯하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서툰 여정의 시행착오도 모두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듯이.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이 책의 부제다. 여행기이지만 책 이야기가 많고 영화 이야기도 많고 그림 이야기에 철학자까지. 두루두루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포식시켜주는 욕심쟁이 작가의 푸짐한 성찬이 펼쳐져 있다.  

동유럽을 떠올리면 어쩐지 정적이고 고독한 느낌이 드는데, 작가가 거닐었던 곳들은 뜨거운 열정에서 차가운 고요함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어느 곳이든 한 가지 색깔만 가지고 있겠냐만은, 하나의 대륙 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에도 저마다의 고유 빛깔을 천진하게 반짝이는 것이 때로 숨막히게 예뻐보였다. 직접 현장에서 마주 대한 작가와 그녀의 비노 양의 감격과 감탄은 오죽 할까. 그렇지만 이 책속에서 작가는 깨방정 호들갑으로 촌티를 발산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쿨한 척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연기를 한다. 잘 지내는 척, 바쁜 척, 부끄럽지 않은 척, 무관심한 척. 그중의 제일은 뭐니뭐니해도 쿨한 척이다. 먹어치운 밥그릇 개수만큼 노련해진 우리는 있는 그대로 감정을 노출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참혹한 결과를 잘 알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표시한 관심 때문에 망쳐버린 연애. 딱 한 번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했다가 깨져버린 우정 따위. 진심이란 녀석은 땀을 잘 흘린다. 그래서 여차하면 들키기 십상이다. – 40쪽

 
   

사실 이 책을 처음 맞닥뜨린 순간 품게 되는 호감은 '여행기'보다 '독서'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행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딘가를 여행하기 전에 사전 정보 입수차 여행서를 읽게 되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이유가 생기기 전에 마주치는 여행서는 너무도 딴세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지만 당장에 가지 못할 동유럽에 대한 환상으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여행지에서 작가 윤미나가 떠올렸던 책들, 그 속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 떠오르는 감상들이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이미 충분히 만족시켰다. 따로 이 책 속에서 언급된 책과 영화를 갈무리하고 싶을 만큼 호기심도 충천해졌고, 가끔씩 던지는 역사 속 이야기도 지적 만족감을 제대로 건드려 주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투가 때로 너무 가볍게 나가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평소 말투나 글쓰는 스타일을 내가 알 수 없으니 내가 느끼는 불협화음이 작가의 원래 스타일인지 의도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좀 더 진지하게, 차분하게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뭐랄까. 이쯤에선 일부러 어깃장도 놓아주고, 이쯤에선 일부러 생날 것의 표현을 써서 부러 망가지려는 듯한 느낌? 가수로 치면 가창력으로 승부해도 충분히 어필이 가능한데도 대세에 맞추어 섹시댄스를 추고 있는 듯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섹시 댄스도 능력되고 몸매 되니까 추는 것일 테고, 그게 지탄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건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내가 밑줄을 그은 무수한 문장들은 여행기 안에서보다 새 장소에서의 이야기가 출발되기 전 사진과 함께 여백과 같이 출연한 글들이 더 짙은 향기를 뿜으며 나를 자극시켰다.  물론, 여기에는 편집의 힘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곳곳에선 따로 찾아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미하일 브루벨의 그림도 다시 찾아보게끔 만드는 궁금증.  



이 사진은 흑백이어서 더 탁월했다. 저 그림을, 저 장식물을 하나 갖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러시아 공항에서 내가 건져온 지독히 비싼 어느 엽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저 노란 테두리는 다소 별로였지만, 저렇게 화두를 열어가는 스타일은 내 맘에 참 들었고, 문장은 또 얼마나 기막히게 마음을 어루만지던가. 비록 제시된 글은 황인숙의 글이지만, 이런 식으로 작가 윤미나가 내 맘을 들었다가 놨다 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삶에 감탄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둔하고, 삶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은 우울하다. 카프카의 삶은 짧고 국지적이었지만 그 어느 인생보다 강렬했다. 나는 그런 삶을 흠모한다. – 80쪽  
   

번역하는 사람의 감각 덕분인지, 타고난 문재 때문인지, 짧은 문장 안에서 이루는 대구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또 다시 이렇게...... 

   
 

 자코메티는 자신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할 테지만 보스니아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그렇다. 진정한 존중은 '이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해는 '관심'에서 나온다. – 170쪽

 
   

슬로우 라이프에 대한 작가의 생각, 그리고 데려다 키우는 아이에 대한 생각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흡사했다. 덜 생산하여 덜 쓰는 삶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실행 의지는 많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것이 마땅한 진행 방향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더더욱.  

   
 

 혹시라도 살다 살다 이제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진다면, 늙어감에 대한 공포와 권태를 잊게 해줄 뭔가가 절실해진다면, 그때는 태어나버렸지만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 혹은 고모가 되고 싶다. 끈끈한 건 됐고, 말이나 통하면 좋겠다.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225쪽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라는 문장이 또 대구를 이룬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엄마와 딸의 관계도 이 비슷하지 싶다. 아들과는 우정보다 '의리'라고 해줘야 할까? 재미로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표현이 누군가에겐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심각한 표정과 각오로는 좀처럼 행동에 옮기기 어려운 각오가 아닐까 싶다. 구체적으로는 생활능력이 어느 정도는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새 부모와 새 가족이 될 수 있는,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여행기와 독서기 영화 감상기가 모두 어우러져 있는데, 각각의 것들이 독립적으로 독자를 찾아온다고 해도 두 손 들어 환영할 수 있겠다. 아핫, 음악 감상기도 더 포함되어야 하겠구나. 물론 개인적으로는 독서기를 가장 먼저 읽고 싶어하겠지만. 

프라하, 두브로브니크, 슬로베니아의 추억이 매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의 참 마력은 여행자들이 느꼈으니 나로서는 부러움으로 남겨두고, 그녀가 툭툭 내던진 타매체들과의 만남을 더 적극적으로 건져야겠다. 비교적 내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들이니. 

영화 '타인의 삶'을 인생의 영화로 꼽는데도, 울리쉬 뮤흐의 다른 영화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색해 보니 몇 개 더 나오는데 dvd로 구할 수 있는지도 찾아봐야겠다. 괜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이 책은 사진이 많지 않아서 아쉬운데, 그럼에도 들어가있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부터. 재차 말하지만 디자인 참 잘 빠졌다.  

메인 디쉬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허하고, 에피타이저나 디저트라고 하기에는 넘치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요리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쯤 맛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굴라쉬 브런치'라는 신선한 이름도 듣게 되니 좋지 아니한가. 그게 어떤 음식인지는 직접 찾아보기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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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04-13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노아님 저랑 느낌 비슷해요. 저도 이 책 그냥 그랬어요.
나빴다는 뜻은 아니고 말씀대로 좀 어정쩡하다고 해야되나.
문체도 (이유는 살짝 다르지만) 좀 마음에 안들었고 ㅎㅎ 그런 의미에서 추천 날리고 가요~ ^^

마노아 2010-04-13 08:32   좋아요 0 | URL
더 잘 쓸수 있는데 과해서 살짝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작가분이 베스트를 다 발휘하지 못한 듯해서 아쉬웠어요. 참 매력적이었는데 말이에요.^^

다락방 2010-04-13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를 쓴다면 별 네개였을거에요. 글을 참 잘쓰는데 계속 진지하게 썼다면 더 완벽하지 않았을까 하고 내내 아쉬웠거든요. 유머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근사했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번역'하는 여자의 '첫' 글이다 보니 긴장했던 것 같아요. 다음 책에서부터는 좀 더 자유롭게 정말 쓰고싶은대로 써줬으면 좋겠어요.

마노아 2010-04-13 08:33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유머를 넣지 않아도 되는데 재밌고 웃겨야 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증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갖고 있는 역량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할 법했는데 말이에요. 보다 자유롭고 자연스런 두번째 글을 기다려야겠어요.^^

이매지 2010-04-13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보고 <식객> 리뷰인 줄 알았어요 ㅎㅎㅎㅎㅎㅎ

마노아 2010-04-13 11:39   좋아요 0 | URL
아, 식객도 많이 밀렸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네요.^^ㅎㅎㅎ

hnine 2010-04-1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이 가는 책은 바로 이런 책이어요.
아주 좋다, 그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책이요 ^^
좋은 책의 조건은 내공 + 글맛 이 있어야 한다고 어느 분이 말씀하셨는데 둘 중 어느 하나가 모자라거나 또는 지나칠 때 약간 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저도 이 책 꼭 읽어보고 싶어요.

마노아 2010-04-14 20:40   좋아요 0 | URL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는 건 작가분에게도 좋은 일 같아요.
아쉬움이 남지만 매력있었고 또 만나고 싶은 작가분이에요.^^

치니 2010-04-1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노아님의 불만이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게 작가의 표현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마노아님 표 리뷰, 좋네요. :)

마노아 2010-04-14 20:41   좋아요 0 | URL
헤헷, 우아하게 쓸 수 있고, 그게 더 어울릴 법한 사람이 부러 싼티나게 표현하는 것들이 걸렸어요. 일종의 투정같아요. 하핫.^^;;;

gimssim 2010-04-1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이 책 읽고 있는데 여느 여행서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팔랑팔랑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책...

마노아 2010-04-17 00:18   좋아요 0 | URL
좀 남다르지요? 낮에 빕스를 갔는데 굴라쉬가 있더라구요. 기대만큼은 맛있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