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몽유도원도를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을 때, 동행했던 분이 기념품 판매 매장에서 오주석 선생님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셨다. 나 역시 너무 좋았다고, 최근에 나온 책도 한 권 샀다고 하니 이미 돌아가신 책이 어떻게 나오냐고 하셨다. 아,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유작이랍니다...ㅜ.ㅜ 

그렇다. 이 책은 유작이다. 머리말까지도 선생님이 직접 쓰셨지만 출간되는 것은 보지 못하셨다. 무려 4년이나 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머리말은 돌아가신 뒤 선생님의 컴퓨터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랄까...ㅜ.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이후 선생님 작품엔 모두 눈이 반짝 떠졌다. 이 책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 21편과 타 매체에 소개된 원고 6편(그 중 4편은 이미 공개되어 중복된 원고이긴 하다)을 모아 실었다. 200자 원고지 7장을 넘지 않아야 하는 경계 안에서 독자들에게 흥미와 재미와 교양을 같이 전달할 원고를 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선생님은 예의 그 실력을 한껏 발휘해서 맛깔스런 책으로 만나게끔 하셨다.  

감탄과 감동을 전해주는 작품 소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 몇몇 작품만 사진을 찍어 보았다. 



김홍도가 그린 '황묘농접도' 

봄빛깔이 물씬 나는 풀밭 위에서 주화빛 새끼 고양이가 검정빛 큰 제비나비와 고운 주홍색 패랭이꽃, 그리고 수줍은 자주색 제비꽃과 화폭을 장식했다. 고양이와 나비가 함께 노는 그림은 생신 축하 선물이라고 한다. 중국어로 고양이 묘(猫)는 칠십 노인 모, 나비 접은 팔십 노인 질 자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각기 칠팔십 세의 노인을 상징하는 것. 패랭이꽃은 석죽화. 竹은 축하한다는 祝자와 통하니 역시 돌처럼 장수하시기를 빈다는 의미다.  

나비의 날개가 상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기회가 닿으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간송미술관은 김홍도 전을 열어달라!!!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이 그린 '영통동구도'이다. 수년 전, 내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막 읽자마자 우연히 예술의 전당에서 보게 된 강세황 전이 다시금 떠오른다. 루벤스를 보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강세황이 더 빛나고 사랑스러웠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다는 명함 이상의 것을 보여준 멋진 작품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바위들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오주석 선생님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작곡가 그로페의 '그랜드 캐년 조곡' 가운데 '산길에서'라는 악장이 떠오른다고 한다. 대자연의 기이한 경관이 작곡가와 화가에게서 재탄생된 것이니 말이다.  

그림 속 저곳은 황해도 개풍군 오관산 기슭이라고 한다. 그림 속 선비처럼 말 타고 유람하진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 곳을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힘들면 자가용이라도...;;;;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다. 이 시리즈를 신문에 연재할 때 선생님이 첫 회 원고로 찜해 두셨다가 김홍도의 '씨름'에 밀렸던 그림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독자들에게 더 친숙한 그림을 골라 대중성을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이 그림, 보통 전문가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친절한 우리의 선생님은 우리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는 데에 아낌이 없다.  

그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형상화 했거니... 했는데, 이 그림 안에 주역의 태극을 담아냈다고 한다. 정선 자신이 원래 주역의 대가라고 하니 더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른쪽 그림에서 보다시피 번호까지 매겨가며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해 주시는데, 요약하자면 이 그림을 통해서 정선은 겨레의 행복한 미래, 평화로운 이상향의 꿈을 기린 것이라 한다.  

음양의 조화라고 하니 어째 그림이 더 오묘해 보인다. 이 그림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다. 책을 펼치다 보면 리움 소장 작품을 곧잘 만나게 되는데, 아직 가보지 못한 그곳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든다. 입장료도 비싸고, 사주도 맘에 안 들지만, 그래도 그림은 탐나지 않은가..ㅜ.ㅜ 



드디어 김홍도의 씨름도다. ^^ 

문제를 내겠다.  

1. 이 그림의 배경은 어느 계절일까? 절기로 짐작하시오.
2. 어느 지방에서 유행하는 씨름일까?
3. 누가 이길까?
4. 다음 선수는 누굴까?
5. 그리고 의도적인 오류가 있다. 무엇일까? 

어떤 질문은 너무 쉽고, 어떤 질문은 당최 알 수 없기도 하다. 책에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다. 호랑이의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꼬리에서도 굵직한 힘이 느껴진다. 저 가느다란 털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수한 붓질이 한지 위를 스쳤을 것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이 그림에선 여백의 분할이 아주 과학적이고 섬세하다. 호랑이 다리 근처 오른쪽부터 1.2.3으로 점차 여백이 커져 가고, 위쪽 소나무 가지의 여백도 4.5.6 순서로 공간이 커진다. 꼬리로 나윈 여백의 7.8도 마찬가지. 한 가운데 9가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해서 시야를 툭 터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너무 꽉 차서 답답하지 않고, 적절한 순서로 공간이 나뉘어 있어 그림을 과학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앞 부분만 보았는데 거기서 김홍도 역을 맡은 박신양이 몰래 호랑이 그림을 그리느라 숨어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특이한 안경을 슨 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도 김홍도 작품이다. 제목은 '마상청앵도' 

말 위에서 꾀꼬리의 갖은 소리 굴림을 듣는다는 의미.  

동양의 그림은 세로 읽기가 기본이고,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비스듬히 경사지게 시선이 오는 게 일반적이다. 이 그림은 인물과 나뭇 가지 뿐 아니라, 상단의 싯 귀까지 모두 그 경사도를 지키고 있다. 더군다나 의도적으로 굵게 쓴 글씨마저도 그 배열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꾀꼬리를 바라보는 선비의 표정이 그윽하기 짝이 없다. 신비롭고 만족스럽고 설레는 듯한 느낌. 고요한 봄날의 정적이 그림 밖으로 스며나와 독자에게까지 전달된다. 쩌릿하다! 

선생님의 칼럼 마지막 연재 그림은 '일월오봉병'이었다. 임금님 용상 뒤에 펼쳤던 해와 달이 있는 그 병풍말이다. 여기에 몰랐던 정보가 담겨 있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병풍 앞에 앉는다.
멀리 행차를 할 때도, 죽어서 관 속에 누워도, 심지어 초상화 뒤에도 '일월오봉병'이 놓인다.

궁을 나가서도, 죽어 관에 누워서도, 초상화 뒤에까지 이 병풍이 놓이는 줄은 몰랐다. 언제나 음양의 조화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지존하신 임금. 부담스런 영광이란 생각도 든다.  

처음 나를 열광시켰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만큼 입에 착착 붙는 재미는 확실히 덜 하다. 그 책이 강연의 내용을 글로 옮긴 거라면 이 책은 칼럼을 그대로 엮은 것이기 때문에 현장의 느낌이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책을 볼 수 있다면 뭔들 불만이 되겠냐마는...... 

김홍도를 유독 사랑했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 덕분에, 이제는 김홍도 그림을 보면 자연스레 선생님 생각이 같이 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도 늘 같이 갖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또 다른 소개되지 않은 원고가, 아직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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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1-0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주석선생님 책은 정말 쉽고 재미있어요. 이 책은 아직 못봤는데 저도 한번 봐야겠어요.^^

마노아 2009-11-01 23:4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비교적 짧아서 더 빨리 보게 될 거예요. 재주 많은 선생님이 일찍 가셔서 참 안타까워요..ㅜ.ㅜ

Kitty 2009-11-02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움이 한남동에 있는거 맞죠?
제 친구 신랑이 그 근처 패션인가 하는 카페 점장이라서 가끔 가는데 갈 때마다 이건 뭥미 했더니 친구가 리움이라고;
근데 입장료 비싼가요? ㄷㄷㄷ

마노아 2009-11-02 08:17   좋아요 0 | URL
한남동 맞아요. 방금 홈페이지 들어가봤어요.^^
전에 어떤 분 페이퍼에서 입장료가 2만원이라고 했는데 지금 가보니 상설전시관은 1만원이네요. 그땐 아마 특별 전시였나봐요. 상설전시치고는 좀 세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덜하네요.
6호선 한강진 역이 가깝던데 금년 안에 갔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추운 날은 꼼짝도 하기 싫지만요.^^;;;
이 책 읽으면서 키티님 생각 잔뜩했어요. ㅎㅎㅎ

섬사이 2009-11-0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주문배송중이에요. ^^
오주석 님의 <그림 속에 노닐다>도 사두기만하고 읽지를 못했는데,,,,
아유,, 언제 다 읽죠? ㅠ.ㅠ

마노아 2009-11-02 11:11   좋아요 0 | URL
아악, 저도 그 책 샀는데, 어디 꽂혀있는지도 기억이...ㅜ.ㅜ
다시 마음 속에 죄책감 한 움큼이에요..;;;;

소나무집 2009-11-0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년전 간송에서 열린 김홍도전 보고 왔지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행복해요.
삼성은 반성해야 합니다.
리움 같은 곳은 입장료를 무료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자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미국에 가보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티 센터와 그리니치 천문대 같은 곳,
개인 거지만 모두 입장료 무료였어요.
그런 사람들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평등이 가능한 사회.
그런 힘이 바로 미국이 싫으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이유 같더라구요.

마노아 2009-11-02 11:13   좋아요 0 | URL
제 옆자리 샘이 리움 다녀왔을 때의 환희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이런 걸 보게 해줘서 고마웠단 얘기를 했어요.
소나무님과의 생각과 정반대죠? 어느 쪽만 옳다고 손들을 수 없는 건데도, 이런 양극화 현상이 좀 화가 나요.
그들이 마치 시혜라도 베푸는 양 과시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그럼에도 그렇지 않고는 볼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고, 성질 나는 거죠.
미국도 유럽과 비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과시하는 것 같지만 그마저도 부러운 우리네 현실이에요. 어휴...ㅜ.ㅜ

바람돌이 2009-11-0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에 리움에서 정선 특별전 하고 있었거든요.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가 한꺼번에 나와 있었어요. (이런 일 드문거 아시죠? 소장품이라고 늘 전시되는건 아니랍니다.자기들 나름대로 바꿔주더라구요)
지금도 특별전이 하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보시고 가보세요. 입장료의 가치는 충분히 하고도 남습니다. ^^ (아 저는 개인적으로 금강전도보다 인왕제색도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ㅎㅎ)

마노아 2009-11-02 11:14   좋아요 0 | URL
제 옆에 분이 인왕제색도에 눈물 날 정도로 감동이었다고 하네요. 겸재 정선 상설 전시회 문구는 봤는데 날짜는 딱히 안 적혀 있어요. 그림 내려갈까 봐 빨리 가고 싶은데 가면 볼거리도 많은 것을 4시 퇴근해서 5시 입장까지 어케 가냐구요..ㅜ.ㅜ 가도 한 시간만 보고 오긴 너무 아쉽구요. 방학 후에도 전시가 이어지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어요.^^

순오기 2009-11-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한국의 미 특강보다는 글밥이 적어서 읽기는 더 수월하지요.
오주석 선생님 덕분에 우리 그림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갖게 됐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나도 이거 리뷰 써야 하는데...^^

마노아 2009-11-02 12:37   좋아요 0 | URL
리뷰 쓰기 전에 다른 책을 읽어버리면 리뷰 쓰려고 할 때 잘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ㅠ.ㅠ
바로바로 리뷰를 써야 하는데 어쩌다 보면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카스피 2009-11-0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 책이네요^^
이런 좋은 그림을 책속의 그림으로 밖에 볼 기회가 없다니 좀 안따갑군요.

마노아 2009-11-02 12:3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진품을 실물로 본다는 건 대단한 기회예요.^^

2009-11-02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11-0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그림에 관한 책이라니 급관심 가는걸요.
거기다 저 위에 질문에 5번 밖에 아는게 없으니 책이 더욱 궁금해요.ㅎㅎㅎ

마노아 2009-11-03 20:25   좋아요 0 | URL
오주석 선생님 책은 모두 강추지요. 김홍도의 씨름도는 한국의 미 특강에도 자세히 나와요.
어제 무슨 퀴즈 프로그램에서 김홍도의 씨름도에 상투 튼 사람이 몇 명 나오냐는 질문이 있더라구요.
호곡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