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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표류기 - Castaway on the Mo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개봉 전부터 기대를 했던 작품이다. 감독의 전작 천하장사 마돈나가 준 예쁜 감동 덕분이다. 게다가 출연하는 작품마다 실망을 주지 않던 정재영 주연에 아무 것도 꾸미지 않아도 참 예쁜 정려원이 주인공이 아닌가.
김씨가 표류했다길래, 정재영이 김씨인가 보다... 했다. 알고 보니 정려원도 '김씨'다. 이 영화는 '두 명'의 '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켜야 했던, 외롭고 고단했던 인생에 지친 두 사람의 희망 찾기 노래이다.


원금 7,500 만원이 이자 포함해서 2억 천 만원으로 불어버린 신용불량자 이 사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자 한강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내린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아 그는 밤섬에 표류하게 되고, 생태 보존 지구로 지정되어 있어 드나드는 사람 없는 이 '무인도'에서 그는 홀로 살아남게 된다. 언제든 다시 죽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일단 허기도 달래고, 일단 이 지루함도 좀 즐겨보고, 일단 이 심심함마저 만끽하기로 결심한다.
독버섯일 수도 있지만, 죽으면 그것도 대로 나쁘지 않겠다고 여기며 닥치는 대로 버섯으로 연명하던 중, 그는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고기잡이를 위해 애쓰고, 새를 잡으려고 용을 썼다. 그가 밤섬에 표류해서 초반에 살아남기 위해 서바이벌 투쟁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코믹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결코 코믹이 아니다. 또 다른 김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3년째 히키코모리로 살고 있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자신의 방으로 누구도 들이지도 않는다. 온통 에어백으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자고, 컴퓨터 안의 가상 세계에서 자신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를 훔쳐와서 자신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달리는 댓글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그녀가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 소통의 단절에는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다른 사람은 모두 아웃이다. 일년에 두 번. 봄과 가을 민방위 훈련 날에만 천체 망원경으로 거리를 관찰하는 그녀. 늘 달을 찍던 그녀의 카메라에 낯선 생명체가 잡힌다. 그녀는 그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 '변태' 외계인.

카메라, 엄청 좋아보이더라. 무진장 비싸겠지? 달도 찍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무튼, 저 카메라를 통해, 그녀는 컴퓨터가 아닌 바깥 세상의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일 거라는 단정 아래 가능한 일이었지만.
작품 속에서는 대한민국의 정규교과 중 초등과정만 떼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수준의 영어 문장들이 나온다.
Help
Hello
How are you
Thank you
....
A로 물어보면 반드시 B로 대답하곤 하는 우리 주입식 교육의 냉소적인 모습을 감동과 코믹으로 포장해준 감독의 센스에 감탄했다.
게다가,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연출로 짠하게 울리는 씬이 많았다. 영화 ET를 떠올리게 하는 손가락씬이, 그리고 사진 속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하는 그녀의 손동작이 말이다.


자신의 옷을 입혀 놓은 허수아비. 외로운 남자 김씨에게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고 침묵으로 보답해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리고 여자 김씨가 세상으로 한 걸음 나가는 첫번째 발자국이 되어준 옥수수 씨앗.
서로 아무 연관도 없고, 각자의 상처에 대한 치유에 아무 보탬이 되어주지 않았건만, 그들은 서로를 기다리고 또 반가워하며, 조금씩 세상 속으로 향하는 소망의 길을 열어간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그랬다. 동구의 귀여운 댄스로 마감한 마지막 씬에서, 동구가 원하던 성전환 수술을 했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했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했다. 세상은 여전히 그를 호모 새끼라고 부르며 비아냥 거릴 수 있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비딱한 시선에 굴복하지 않을 단단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관객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며 감동과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그러했다. 그가 섬 밖으로 뛰쳐나가도, 그가 신용불량자였던 현실의 더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세상 속으로 노출된 그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에 대한 긍정을 가능하게 해준, 소망을 실어줄 수 있게 용기를 준, 자신을 지켜봐준 그 관심에 그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살아갈 새로운 힘을 만들어줄 것이다.
새삼스럽진 않지만, 두 사람 모두 연기를 잘해 주었다. 워낙에 인정받는 정재영보다, 정려원의 발견이 더 반갑다. 저렇게 폐인 모드로 있어도 그녀에게선 빛이 났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전지현이 맨 얼굴인 척 하며 미모를 자랑했던 것과 비교가 되는 더 멋진 아름다움이었다.
제목과 포스터가 좀 웃기게 보이고, 일견 코믹 영화처럼 느껴지는 광고가 있었지만, 결코 그게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다시 들여다 보시라. 작은 문구 하나에도 영화의 핵심 주제가 들어 있다. 자, 이제 그가 보낸 희망의 메시지를 무언으로 일축하지 말고 열렬히 환영의 신호로 답해 주자. 그가 이름을 묻는다면, 내 이름은 무엇이라고, 당당히... 그리고 따뜻하게 대답해 주자.

ps. 영화의 ost가 무척 좋다. 특히 후반부에서 정려원이 나올 때 깔린 음악들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어떤 음악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금년에 보았던 영화 중에서 단연코 가장 따뜻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