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출근'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니까 재택 근무 대신 '학교'에.

하고 있던 일이 너무 지지부진했고, 그 지지부진하는 동안 페이가 안 나오는 사실에 경악을 했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교육청 홈피에 구직 글 올리고 울린 첫 번째 전화에서 오케이.

누군가가 아파야만 그 자리에 들어가 앉게 되는 게 쓰라리지만, 불러주는 데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

2. 전화주신 여선생님은 병가를 낼 건데, 진단서 끊기 전에는 2주인지 4주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저는 '4주'가 좋아요! 했더니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신다.

호곡, 2주는 시간 강사고 4주는 기간제 계약인데, 급여 차이가 많이 납네다.

선생님은 4주 끊어왔다고 알려주셨다.

이 자리 선생님은 갑상선 암이었다. 8년 전에 수술했는데 재발한 모양이다. 서울대 병원에 예약 대기로 몇 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갑자기 자리가 비어서 급히 수술일정 잡고 후다닥 강사샘을 모집했던 것.

3. 그래서 어제, 학교 가서 교장샘을 만났다. 출신 대학 이름을 가지고 3류 개그를 날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선생님은 여기 오래 있고 싶으시겠지만 저는 우리 선생님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거참, 곡해해서 들으면 내가 아프라고 물 떠놓고 비는 것 같겠구만. 같은 말도 저렇게 사람 맘 상하게 하실까.
알고 보니 우리 윗동네 사신다. 좁아터진 서울 같으니!

4.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한달 예상하고 필요한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을 나섰다.

그러니까 실내용 슬리퍼도 필요하고 머그컵이랑 차수저, 가글컵이랑 칫솔, 치약, 분필, 수건, 로션 등등.

그러니까 빗속을 뚫고 가져온 내 생활용품들.

어제 와봤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오방 헤맬 뻔 했다. 그나저나 비와서 신은 높다란 굽이 작나? 왜 이렇게 발이 아프누!

5. 학교들은 대개 너무 넓고, 그래서 조명을 아껴 켜두곤 한다. 너무 어두운 바깥과, 그만큼 어두운 복도가 기막히게 어울렸다.

낯선 곳에서 온통 낯선 사람들 속에서 어두운 조명이 불만이었다. 칙칙해!!!

이 칙칙한 학교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상큼함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종소리!

1교시가 시작됐습니다~라고 어린 아이 목소리가 시간을 안내해 준다.

점심시간 끝나기 5분 전엔 '모두 준비됐나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이렇게 알려준다. 정말 신선하구나!

6. 내 뒷자리로 커피 자판기가 있다. 100원 넣고 쓰는 체제다. 제기랄, 잔돈은 달랑 60원 있구나. 지폐는 안 받아주는데...

없으니까 더 고프다. 커피!

이 글 쓰고 나서 교감샘이 커피 마시길래 무심코 '맛있나요?'했다가 한 잔 얻어먹었다. 호곡,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7. 여기는 아리수 음수대를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리수는 수돗물인데, 교무실에서 정수기 안 쓰고 수돗물 쓴다고 선생님들 원성이 자자한가 보다. 메신저에 그 내용이 두 개나 들어 있다. 냄새가 난다나 어쩐다나.

체, 학생들은 옛날부터 아리수 물 먹었구만.  예민한 사람은 소독약 냄새를 느낄 지도 모르겠는데 내 보기엔 괜찮았다. 본인이 수돗물은 절대 믿을 수 없어!라는 명령을 뇌로 보내는 게 아닐까???

8. 아쉬운대로 녹차라도 마시려고 했는데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버튼을 이것저것 다 눌러보았는데도 소식이 없다. 앞자리 샘께 물어보니,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눌러야 한다고 했다. 어렵구나! 이 선생님은 우리집 한 정거장 아래 사신다. 좁아터진 서울 같으니...2

9. 담당과목이 2학년 사회인데 일반사회 영역이다. 지금 진도는 법규범인데 내 전공이 아니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할 만하다. 사실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긴 하다.

선생님들은 이 학교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고 공부를 지나치게 못한다고 걱정을 섞지만, 일단 애들이 억세지 않고 수더분해 보인다. 그거면 됐다. 내가 다녀본 학교 중에서 공부 잘했던 학교는 달랑 하나였다. 그것도 하루 근무한 학교지만..;;;;

그 학교가 이 학교에서 한구역 뒤에 있다. 도봉구와 노원구의 차이란...;;;;

10.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 아,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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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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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1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나 2008-10-3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커휘 고프시겠당 날씨도 비릿비릿한데 ~ 오늘 수유역 근처 선배집에 놀러가요 ~ 좁아터진 서울같으니....3? ㅋㅋㅋ

마노아 2008-10-31 20:08   좋아요 0 | URL
수유역 지나서 집에 돌아왔어요. 좁디좁은 서울같으니라공^^ㅎㅎㅎ
교감샘 커피 드실 때 침흘리다가 한 잔 얻어먹었어요. 첫날부터 이럼 안 되는데 말이지요.ㅜ.ㅜ

무스탕 2008-10-3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핸펀 안 갖고 가셨다니 문자폭탄이나 투하할까부다.. ^^*
열공! 이 아니고 열근! 하시와요~ :)

마노아 2008-10-31 20:09   좋아요 0 | URL
문자는 몇 개 와 있었는데 다 알림 문자였구요, 전화는 한 통화도 없었어요.
크흑...외로버요!

가시장미 2008-10-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소리 정말 특이한 학교네요. ^^ 첫 출근 하신 날,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교장선생님은.. 참..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되네요. 좀 센스가 부족하신 것 같네요. 그쵸?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구요.. 그 곳에 계신 동안 학생들과 즐거운 수업하시길~!! 화이팅~ ^^*

마노아 2008-10-31 20:10   좋아요 0 | URL
교장샘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 나중에 만나서 실수하면 안되는데 말이지요.
무심한 저다운 일이랄까요...;;;;
학생들과의 수업은 무척 좋았어요. 첫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앞으로 쭈욱 그랬으면 좋겠어요.
뭐, 아무렴 신혼을 즐기는 새댁의 기쁨에 비할까마는^^ㅎㅎㅎ

2008-10-31 1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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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10-3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 아, 궁금해...!



아 궁금해, 에서 완전 웃었어요. 어쩐지 초절정 공감모드랄까요. ㅋㅋ

마노아 2008-10-31 20:10   좋아요 0 | URL
아무도 나를 안 찾았다는 사실에 급 좌절이었어요. 흐흑...ㅜ.ㅜ

다락방 2008-11-01 11:29   좋아요 0 | URL
앗. 또 그 급좌절도 완전 이해해요. 역시 우리는 이제 연애를 해야....쿨럭.

마노아 2008-11-01 11:55   좋아요 0 | URL
그치요? 답은 아는데 풀이 과정을 모르네요. 이러언...;;;

바람돌이 2008-10-3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커피 한잔 얻어먹은거 가지고... 또 새로운 곳이네요. 늘 새로운 곳이면 스릴은 좀 있겠지만 다시 적응하는게 힘드시겠어요. 커피 많이 드시고 힘내세요. ^^

마노아 2008-11-01 00:05   좋아요 0 | URL
자리가 기획 업무라는 게 심히 부담스러운데, 부장님 붙잡고 어케 해결해야죠. 비온 것 빼고는 첫날의 느낌 좋았어요. 점심도 아주 맛났답니다.ㅎㅎㅎ
오늘 커피 작은 거 한 상자 샀어요. 자판기 커피보다 1.4배 비싸더군요^^

순오기 2008-11-0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샘은 학교생활이 적성에 잘 맞는듯해요.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즐거워하고~~
학교에서 커피는 안 주시나~ 개인이 사놓고 마시나보죠?
나는 잘 안 마시지만 1년에 한번은 100개나 180개들이 사다 줘요.
교무보조샘이 아주 친절해서 그냥 사주는거예요. 괜히 무게잡고 떽떽거리는 사람한텐 절대 안 사줘요.
두 학교가 완전 비교되는 스타일이라~~

마노아 2008-11-01 17:13   좋아요 0 | URL
어제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학교에 다시 가게 되어서 그런가봐요. 수업도 너무 즐거웠어요. 선생님들은 좀 서먹하지만요^^;;;;
학교에 따라서 교무보조샘이 '권력'이 되는 곳도 있더라구요^^ㅎㅎㅎ 하지만 진짜 실세는 언제나 '행정실'이라는 거...;;;;
커피 사주는 순오기샘은 진짜 센스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