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6월 권장도서 - 김훈의 (남한산성)
-
-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핑크빛 표지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산뜻하니 고왔으며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김훈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면서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을 버리고 청을 받들 것을 거부하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던 인조와 신하들의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얼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굶어죽는 이들도 많았건만, 그 사실을 전하는 김훈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할 따름이다.
화친을 말하는 최명길의 충절이 척화를 말하는 김상헌의 피끓는 외침과 크게 다르지 않고, 배삯을 치뤄주지 않은 임금의 일행을 보낸 뱃사공이 청군을 이어 나르겠다는 그 마음이나 사대부로서 임금을 버리고 도망친 유신들의 마음의 크기가 다르지 않았다. 김훈은 그저 담담히 적을 뿐이고, 그 행간에 감정을 실어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김훈의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굵고 강직한 그 목소리가, 때로 같은 문장을 비틀어서 다시 말하는 수법을 많이 사용해서 말들이 어지럽고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훈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흠뻑 취해서 갖고 싶어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반응이다. 이제 콩깍지가 조금 벗겨져서 약간의 흠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1급 요리도 자꾸 먹다 보면 질리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 해도, 명문장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칸이 보낸 문서라던가, 최명길이 임금을 설득할 때의 목소리는 김훈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배어있는 깊은 울림이었다. 심지어 서날쇠가 김상헌의 쓰라린 양심을 찌르며 되묻는 장면도 백성의 골깊은 한과 진실을 관통해서 보는 총명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인조를 참으로 싫어한다. 현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관점이기도 하겠지만, 광해군을 쫓아낸 그의 명분이 내게 설득력이 있지 않았고, 현군을 몰아내고서 인군이 되지 못한 그의 아둔함에 진저리가 났으며, 훗날 그가 아들에게 보여준 무서운 권력에의 집착이 치를 떨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과오를 같이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판단하기를 늘 유보했으며, 신하들에게 먼저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신하들은 그런 임금에게 '책임'을 떠맡기며 역사의 심판을 같이 안으려 하지 않았다.
싸우자고도 말하지 못하고 화친하자고도 말하지 못하면서 제 몸 사리기에 급급한 김류가 영의정 자리에서 몸보신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에도 비슷한 처세술로 고위공직자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어떤 인간들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작가는 못을 박고 있지만, 실록의 해당구절을 통해서 이 정도로 펼쳐내 보이는 작가의 신들린 솜씨에 독자는 단순히 소설로만 읽혀진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듯하다. 잘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사전을 끼고서 읽어야 했는데, 책의 맨 뒤에 용어 사전이 곁들여져 있다. 미리 살펴보지 못한 나의 탓이다ㅠ.ㅠ
책은 두께에 비해서 가볍고 딱딱한 표지를 쓰지 않아서 끄트머리가 약간씩 해어진다. 김훈의 책들은 대체로 비슷한 질감의 종이를 썼는데 책을 본 흔적이 책에 꼭 남는 것이 한 특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닳아진' 느낌이 나쁘지 않다.
자전거 여행에서 남한산성을 보며 썼던 명문장을 다시 이 책에서 인용할 것인가 궁금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따로 옮겨둔 것이 있으니 그 메모를 다시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