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사용하는 법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7
와시다 기요카즈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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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이처럼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던 이해 구조와 서술 구조 자체에 대해 추궁한다. 나아가 이처럼 추궁하는 철학적 작업 자체에 대해서도 추궁한다. 이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면서 그 말 자체의 타당성과 근거를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메타 레벨의 물음이다. 철학이 ‘지혜의 지혜‘라고 불리는 까닭이고, 학문의 가능성 자체에서부터 다시 논해 학문의 토대를 마련하는 ‘기초학‘이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 P14

서구에서는 언어가 교양과 사교와 정치의 기초, 즉 사회생활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작업이 ‘신권‘과 ‘왕권‘을 대신해 ‘인간의 이성‘을 시민의 무기로 만들면서 근대라는 시대를 뒷받침해왔다. 철학이 중등교육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그 증거이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한 기초적 능력으로서 ‘철학하는 것‘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 P22

철학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시대의 어려움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하는 지적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적 문제야말로 철학적 양상을 띠게 되어 있다. - P25

철학은 자신에게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를 묻는 것, 같은 것이지만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음미하고 반추하는 작업이다. 철학의 시작점에 있는 작업이 ‘반성‘이라면 이는 철학이란 방법 자체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 P47

그런 시야를 개념으로 열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서 한찬 떨어진 외부에 빛을 발하는 물체를 두고 세계를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고 속에 안주하고 있으면 그런 보조선은 그릴 수 없다.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 최고의 것뿐이다. 사람은 ‘우리‘의 외륜산 너머의 또 그 외부에 시점을 두고, 소위 더 유치한 꿈을 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서 서구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 자신의 시선과 ‘밖‘의 시선을 연결하는 것, ‘밖‘을 자신의 중핵을 이루는 부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기 사고의 근간까지 통째로 변환시키기 위해 시도했다. (...) 지금까지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던 이러한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의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일에 몰두했다. - P99

철학자는 다름 아닌 철학의 외부를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제일 먼저 철학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물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바깥‘이란 대학의 외부나 철학연구자 집단의 외부라는 의미가 아니다. 철학은 늘 ‘메타‘ 차원을 포함한다. 무언가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 자체에 대한 물음을 자기언급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비판은 자기비판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음미가 철학에서는 이론학이고 인식론이고 언어 분석이다. - P111

철학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철학은 가장 실제적인 것, 즉 실천적인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철학은 실천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가 의심의 여지 없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들 것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사고 성과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천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실천이라는 말과 개념이 본래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 분야는 제1차적으로는 ‘이론‘과의 대립에 의해, 또 ‘이론‘의 응용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겠다. - P121

근대 과학의 탄생과 함께 ‘보기‘와 기술이 연계되면서 ‘보기‘는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움직이고 조작하며 보게 됐지만, 관측을 어떤 장치로 행하는지는 제쳐 두고, 이것도 ‘보기‘가 목적인 이상 관상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술의 목적은 ‘보기‘가 아니라 ‘만들기‘에 있다. ‘발견‘도 무언가 새로운 존재를 ‘시야에 받아들여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는 기술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러면 ‘앎‘을 매개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은 ‘보기‘와 ‘만들기‘의 중간에 존재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것, 즉 앞에서 말한 제3의 기술인 ‘사용‘의 기술로서 존재하는 셈이 된다. - P133

살아가는 데는 논리적인 확실함과 정밀함과는 또 다른 확실함과 정밀함이 때때로 필요하다. 논증되지 않은 것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판단 전체에 걸쳐서 ‘철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생활과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관련되어왔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 P140

보편이란 다른 것과 조우하는 우연이 우리의 경험에 갑자기 어떤 미지의 사이클을 열고 그것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용해가는 부단한 ‘엇갈림‘의 운동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156

진리의 법정에 관해 예로부터 메타 레벨에서 계속 논의되어온 철학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독백일 수 없게 됐다. 철학적인 반성의 장 자체가 ‘초월론적‘인 주관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사회적인 자장이라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반성 자체가 ‘간주관적‘인 장이라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대화나 커뮤니케이션이 생성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59

(...) 서로 이질적인 복수의 지혜를 연결하는 기능이 철학에 요구되고 있다.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사회와 시대를 상공에서 조망하는 고답적인 ‘교양‘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사람의 삶에 진실로 중요한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현실에 다양한 지혜를 배치하고 개선하고 통합해가는 기술로서의 철학이다. - P172

박사 학위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한정된 어떤 전문 분야에서 정교하고 치밀한 연구를 완수한 것에 대해 수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가설을 일정한 과학 연구 방법에 준하여 추론하고 실증함으로써 이후 어떠한 주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정교하고 치밀한 추론과 실증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기량에 대한 인정으로서 수여되는 것이다. - P177

철학에 전문 영역이 없는 것은 철학이 항상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으로, 상호 분단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과학의 지혜를 ‘객관성‘이나 ‘보편성‘과 같은 추상적인 통일 이념으로 간신히 통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진정한 의미로 협동시키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란 그런 의미에서 지혜의 다양한 시점 사이의 대화 내지 조정이기도 하다. - P180

우리는 하나의 시점 혹은 하나의 원리로는 현실의 총체를 다 볼 수 없다. 이때 ‘모든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혜의 전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일 것이다. - P185

교육학의 ‘임상‘이란 당연히 사회의 교육 현장이다. 하지만 학교로 조사하러 가서 교육학 이론에 따라 교육 현장을 평가하는 것이 교육학의 ‘임상‘인 것은 아니다.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 그 현장을 구성하고 있는 제도 및 담론이 종래의 교육학 담론 및 이론과 어떠한 공범 관계 속에서 구축되어왔는가라는 공범성을 분석하여, 현장의 문제 해결이 그대로 교육학 자체의 지각 변동으로 이어지는 활동이야말로 ‘임상 교육학‘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94

철학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현지 조사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데카르트도, 로크도, 칸트도, 헤겔도, 벤담도, 마르크스도, 각자 시대의 사상적 과제에 도전했다. 철학이 스스로 사고 구조의 역사적 맥락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음미하는 것도, 철학이 그때그때 시대 상황 속에서 일단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P196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장소를 철학 내부에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다. 타인이 말하는 그 장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그 장소에서 그 장소를 파고들어 스스로의 장소로 삼고 거기에서부터 말하고자 시도할 필요가 있다. - P199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 주류의 니즈에 휘둘리지 않고, 또 그것에 무턱대고 부응하지도 않으며, 니즈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정으로 중요한 니즈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계기는 의외로 우리 일상의 주변에 있기도 한다. - P235

철학은 글의 양식과 글의 살결에 더 신경 써야 한다. 우선은 문체에. 어떤 문체를 사고의 신경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보이게 되는 세계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에는 거의 장인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표현 스타일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위상이 있다. 이러한 스타일 의식이 사라지면 언어는 늘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정밀한 기술 언어를 사용하면 대개 서술의 흐름에 틈이 생긴다. 동업자에게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P249

대화는 타인과 같은 생각이나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더욱 세밀하게 알게 되는 것이 대화이다. ‘서로 이해할 수 없다‘, ‘내 뜻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당혹과 고통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람은 보다 폭넓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대화 과정에서 다신의 사고도 단련되게 된다. 깊이깊이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말한 타인의 다른 사고와 생각에 귀 기울일 때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게 되기 때문이다. - P268

철학이 만약 스킬로서 이용되는 것이라면 이는 무언가 철학 이론과 그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어떤 복잡한 문제라도 온갖 각도에서 조망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을 해제하고 거기에서 문제를 보다 적절한 형태로 재조직하고 나아가 해결에 이르는 전망을 더듬는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P286

현실 문제 대부분은 중요한 문제일수록 답이 즉시 나오지 않으며, 답이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정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보조선이 보여서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따라서 서둘러 의사적인 답으로 결론짓지 않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라며 집요하게 논리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호흡 상태로 잠수를 계속할 수 있는 사고의 체력이 필요하다. 복잡성의 증대를 참고 견디면서 불확실한 상태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지적 체력이 필요하다. - P303

철학이 우리 세계 이해의 균열과 틈새에 손을 찔러 넣어 그것을 뒤집지는 못할지라도 그 상태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그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기에 가장 불리한 곳에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 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됐지?‘하고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다시금 삶의 중심축이 될 수 있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할 때 그런 형태로 일상의 한복판에서 문득 점프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 옆에서 ‘반주‘하는 것이다. - P309

철학 논의에는 상호 촉발이 있을 뿐 선생도 학생도 없다. 철학은 교실이 아니라 시민들의 ‘광장‘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철학 논의가 만일 시민의 합의를 목표로 한다면 그 활동은 간접적이나마 사회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대화가 추구하는 것은 합의가 아니다. 합의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소재를 찾고 물음을 변경해가는 과정 자체를 공유하는 것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공공적 사용이라고 말했던 것 또한 특정 직무나 사회적 입장에서 벗어나 한 명의 시민이자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대등한 입장에서‘ 문제에 임하는 것이다. - P314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과거 철학자들의 방대한 텍스트가 연구자의 어두침침한 서고가 아닌, 시민의 무기 창고로서 환생한다. 철학자들의 한계까지 논의를 거듭한 사고의 궤적, 철학사 연구는 그러한 궤적을 ‘계보‘처럼 그려내려고 해왔다. 하지만 ‘계보‘란 사상의 계열이란 형태로의 배치이다. 그리고 배치는 그 이름 그대로 별자리이고, 따라서 어떤 모양으로든 그릴 수 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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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란 무엇인가 - 「탐구인」이 되기 위해서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5
이마이 무쓰미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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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과학이나 외국어를 배우고 숙달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잘못된 스키마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을 수정하고, 그와 함께 스키마를 수정해가는 것이다. - P120

우리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지식‘은 단순히 사실을 알고 있다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 절차까지 하나가 된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은 뇌가 학습하고 지식을 포착하기 위한 신경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 P175

가장 유용한 ‘살아 있는 지식‘이란, 지식의 단편적인 요소들이 덕지덕지 붙어 몸집만 잔뜩 키운 것이 아니다. 항상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요소가 더해지는 것에 의해 끊임없이 재편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존재다. - P183

요컨대 세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지식이나 경험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듣는 것, 보는 것은 우리들이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 경로다. 귀로 들어 기억에 입력된 정보, 눈으로 보고 기억에 담겨진 정보가 ‘해석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습득된 지식 역시 ‘객관적 사실‘일 수 없다. - P188

지식은 항상 계속 변화해가는 유동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모습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최종적인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요소들을 계속 늘리며 그와 동반해서 시스템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가는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지식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가기 위해, 직관과 비판적 사고에 의한 숙고라는 양쪽 모두를 두 축으로 움직여갈 필요가 있다. - P204

이런 임기응변적인 대처야말로 숙련을 베이스로 한 창조적 문제 해결 그 자체다. 오랜 세월의 숙련에 의해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서 평소와 동일한 방식이 통용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시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대응방식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창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퍼포먼스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요소를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합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 P230

일류가 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싶은지, 일류 퍼포먼스는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내면에서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퍼포먼스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 P241

어떤 분야라도 최고의 달인들은 향상하기 위한 수단을 항상 모색하고 실천하는 탐구인이다. 탐구인이 되기 위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탐구 인식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지식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사용함으로써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과 함께 점점 변해가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은 그야말로 연구를 부르는 인식론이다. - P245

자녀 양육은 정답이 없는 가장 복잡한 문제 중 하나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돌아보지 않고 세상만 살피며 좋은 양육 방법이란 단 하나일 뿐이고 바람직한 양육의 결과 역시 오로지 하나라고 생각하는 인식론을 가지고 있을 경우와, 아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자녀에게 다가가 함께 무엇이 (Best가 아니라) Better인지를 생각해가고자 하는 인식론을 가지고 있을 경우는, 그 어느 쪽이냐에 따라 양육 방식이 자연히 달라질 것이다. - P246

탐구 인식론을 가지고 계속해서 배워가는 탐구인을 길러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첫 번째로 학교는 ‘지식을 외우는 장소‘가 아니라 지식 사용법을 연습하고 탐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식 사용법 연습‘이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사용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 발견하고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액티브 러닝의 본질이다. - P264

아이가 잘못된 스키마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정확히 판단하여 아이가 자신의 스키마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한다. 그것이 교사나 부모의 역할이지 않을까. (...) 아이들의 발달 단계, 지식의 단계에 맞추어 아이가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상태를 설정한다. 이것은 이론 강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도 교사도 가르치는 일의 숙달자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계속 배우는 탐구인이 되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 - P266

자신에게만 있는 지식이나 스킬, 탐구 인식론이 없다면 협업에 공헌할 수 없다. 타인에게 없는 지식, 스킬, 사고방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민해가면서 자기 혼자 배우는 습관과 배우는 방식을 어린 시절부터 뮴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 P268

초일류 달인들의 공통점은 학습을 스스로 생각해낸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약한 점, 극복해야 할 과제를 깨달으며, 그에 적합한 배움을 스스로 고민한다. 그런 자율적인 배움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학교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도자는 자신의 배움을 심화시켜가지 않으면 안 된다. - P270

지식은 단편적인 사실을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다. 아이들은 어휘라는 거대한 지식 시스템을, 그 구조를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창출해낸다. 지식은 항상 역동적으로 변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성장하며,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간다. 모국어를 습득할 때 누구나 이런 ‘살아 있는 지식의 배움‘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 구축·창조의 모습이야말로 ‘주체적 배움‘이 가진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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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잘 쓰는 법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
시미즈 이쿠타로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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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품이 없으면 기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애당초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없다면 어떤 부속품을 만들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부속품이라도 좋으니 많은 부속품을 서로 연결시키기만 한다고 기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나 같은 단문주의자라도 단문이 긴 글의 전제라고 말할 때 다른 의미에서 긴 글이 단문의 전제라는 진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부속품과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서로 전제가 되며 서로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 P22

긍정도 부정도 주어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주어가 명료하다는 것과, 긍정과 부정이 명료하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주어가 확실한, 혹은 긍정과 부정이 확실한 문장을 쓴다는 것은 쓰는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글은 난처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다소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작업에 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45

애당초 논문이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도 통용될 수 있도록 폭넓고 동시에 강한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상대방이 있어도 그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얼버무릴 요량이라면 훌륭한 논문은 쓸 수 없다. 그렇게 폭넓고 강한 설득력을 갖춘 상태에서 특정 상대를 고려하는 것이 순서다. 읽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겠지만 글은 사고방식의 차이를 돌파해갈 정도의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힘은 그저 강렬한 형용사 따위를 사용한다 해도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조용한, 그러나 누구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증명일 것이다. - P72

저자를 대신하여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스터한 서적이나 논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상대방에게 깊이 들어가면 분명 불만스러운 부분도 나올 것이다. 또한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발언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 부분에 관해 자신 있는 발언이 가능할 정도로 공부해야 한다. (...)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을 고를 때도 자신과 사고가 전혀 다른 저자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저자 쪽이 좋을 것이다. - P73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기하학 공부의 출발점에 서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오차라도 그것으로 끝장이다. 쓰기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수식을 조립하는, 수식을 푸는 듯한 태도가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P83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의 혼돈스러운 공간적 병존 상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이 질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 질서에 의해 자연적 상태를 다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 질서가 로고스에 적합한 것일 때 이 질서는 현실 그 자체가 몰래 바라고 있던 질서로서 나타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현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시간적 과정 속으로 던져지고 새로운 인위적 질서를 부여받았을 때 거기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진실이라 불러도 좋다. 그저 새로울 뿐 아니라 이것이 진정한 현실, 진정한 진실이다. 유의미한 현실, 유의미한 진실이다. 진정한 현실이나 진실은 인간의 작용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인간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한다. - P108

하나의 단어는 글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구성된 현실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글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글이리는 건축물을 완성시켜가는 것은 결국 현실이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글이 작성되기 전에 존재하는 현실은 오히려 인간이 유의미한 현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 P112

이러한 대립관계니 정도의 차이도 이쪽에서 문제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나온다. 즉 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글은 입체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것이 멋지게 시간적 과정으로 변환되고 거기서 새롭게 입체화된다. 그러나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우리들의 정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정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태어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실은 현실 그 자체가 정신을 향해 몰래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내부에서 바라고 있었던 것이지 정신이 외부로부터 폭력적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대립관계나 정도의 차이가 튀어나올 때까지 깊이 들어가야 한다. - P114

본론이 큰 건축물, 서론은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 결론 역시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이라는 식으로 쓰는 편이 좋다. 환언하면 서론을 쓰고 있는 동안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을 쓰고 있는 동안 결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론을 써버린 후 서론 및 결론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작은 건축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 P117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유 및 서술의 어떤 습관이 고정된다는 말이다. 습관이 고정되면 이전에는 의식과 노력에 의해 마침내 달성되었던 일들이 무의식중에 노력 없이 달성되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집에 있는 계단을 오를 때도 의식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장하면서 그 습관이 고정되면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른바 기계적으로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계딘 중간에서 자신의 동작을 의식해버리면 자칫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스타일이라는 습관이 완성되면 어느 정도까지 기계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집 계단은 기계적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성인이라도 이웃집 계단은 한 걸음씩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내려가야 한다. 요컨대 새로운 경험을 만나 습관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 즉 완성된 스타일은 편리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 P118

글에는 공격하는 면과 지키는 면이 있다. 글을 쓸 때 우리들은 공격과 수비라는 두 가지 활동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공격이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을 주장하는 측면이다. 자신만이 사회를 향해 행하는 것이며 자신만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글을 쓴다는 긴장감도 있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는 자신의 관념이 글로 대폭발을 거두기 위해서 사전의 소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에 비해 수비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이 학설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단단히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혹은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자신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격하는 쪽이 개인적인 측면이라면 수비하는 쪽은 사회적인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는 친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책에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술 그 자체로는 이 측면이 배경에 물러서고 문자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P130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후에 굵은 뼈대가 남는다. 아니, 굵은 뼈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굵은 뼈대가 완성되면 공부했던 성과가 이번에는 가는 뼈대나 자잘한 가시로서 도움을 준다. 그것이 행해지기 전까지는 무엇이 굵은 뼈대인지 무엇이 잔가시인지 애매하다. 쓰는 본인은 명확하다고 생각해도 어쨌든 권위 있는 인용구라는 잔가시가 중심에 놓인다. 견고한 굵은 뼈대가 없는 글은 좋지 않다. 공부 끝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굵은 뼈대만 남겼을 때 사방에서 잔가시들이 도와주러 와주는 것이다. - P138

‘문체란 바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사상에 부여한 질서 및 운동을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논해왔던 것도 ‘글을 쓴다는 것은 사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 P139

변화란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하는 무브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변화다. 굵직한 논리적 굴곡이 중요하며 자잘한 변화는 피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커다란 굴곡에 따라 써 내려가면 쓸 수 없는 사항, 담아낼 수 없는 논점이 반드시 생겨버린다. 물론 처음에는 쓸 작정으로 생각하거나 조사해두었던 논점이지만 자연스럽고 커다란 논리적 굴곡 그대로 서술이 나아가면 아무래도 이 논점을 버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주‘로 다는 방법도 있지만 ‘주‘로 처리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크고 버리기에도 너무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히 버려야 한다. 그것도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한 무브망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버리는 쪽이 산뜻하다. 그때는 일단 버리고 다른 기회에 그 논점을 한가운데 고정시킨 또 다른 논문을 써야 한다. 미련이 있으면 힘차고 굴곡 있는 논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 P141

관념은 경험의 흐름으로 녹여져야 하는 동시에 경험의 흐름은 관념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방향이 어떻든 일방통행은 안 된다. 왕복 교통이어야만 한다. 왕복 교통에 의해 우선 경험은 추상적 관념의 도움을 빌려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고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이나 관념 시스템이 경험의 테스트를 거쳐 풍요로워지고 성장할 수 있다. - P160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리나 사실은 인간의 활동이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되는 법이다. 이를 망각하고 진리나 사실이 스스로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며 논문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저 진리를 쓰면 되고 사실을 기술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많은 논문들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 요컨대 독자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관료학자에 의해 쓰여왔다는 것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 P189

글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단계, 즉 유력한 경쟁자에게 둘러싸여지는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는 그 어려움이 한층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글이 가벼운 몸이 되어 그 본질로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추상적 언어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타인의 내부에 전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의 본질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 아니다. 영상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사람들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이 본질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97

문장 공부는 문장이라는 형식적인 것의 공부로는 가당찮은 것이며 철학의 문제든 정치의 문제든 경제의 문제든, 어쨌든 그러한 내용 공부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을 만드는 것은 사상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고 있다. ‘문체의 개선이란 사상의 개선을 말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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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리커버)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결국 문과에 속하게 되었지만, 사실 나의 첫 장래희망은 천문학자였다. 그 어린시절에 이렇게 천문학자의 생활을 현실적으로 알려주는 사람이 내게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꿈을 이루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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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01 0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2022년 건강하게 행복하게!!
 \│ /

.*˝ ☆˝*.

( + 福 + )
˝*****˝ 복 마뉘!^^

라파엘 2022-01-01 00:38   좋아요 2 | URL
항상 감사합니다!! 스콧님도 늘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러블리땡 2022-01-01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파엘 2022-01-01 08:45   좋아요 1 | URL
정말 감사합니다!! 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겨울호랑이 2022-01-01 0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소망합니다! ^^:)

라파엘 2022-01-01 09:41   좋아요 2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han22598 2022-01-01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이과문과 구별같은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 같아요 ㅎㅎ 라파엘님 2022에는 우리 하늘 많이 바라보면 살아요 ^^

라파엘 2022-01-01 15:16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학교교육은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으로 운영된답니다 ㅎㅎ 한님 말씀대로 우리 하늘을 보며 살아가는 평안한 2022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han22598 2022-01-03 14:11   좋아요 1 | URL
앗. 바뀌었나보네요 ㅎㅎㅎ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애초에 그 내면의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해보고자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경험에서 어떤 수단과 자원을 선택하고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러한 자원으로 문학을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경제학이나 정치학 또는 여성학 등이 그 자원이 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은 그 사람의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는 주로 철학과 교육학 그리고 신학을 문제해결의 자원으로 사용한다. 자기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언제가 되든지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설명하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선택하든지, 그 공부의 동기와 결과의 자리에 혐오와 배제 등 폭력성이 자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정답인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정답인 것은 아니며, 자기 삶의 올바른 해석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가고 만들어내는 삶의 해석만을 정답으로 여긴다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삶의 해석을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내가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그러한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라면, 내 공부의 동기와 결과에는 단지 사랑이 자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가 살아간 이후에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성실하게 공부하고자 하지만, 나는 배우는 것이 너무나 더딘 사람이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사춘기를 겪어내고,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인생을 잘 모르고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경험해야,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겪어내야, 얼마나 오래 살아봐야 삶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을 다 살아내고 나면 그때는 조금이라도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환갑, 그것이 인생을 한 바퀴 돌았다는 의미라면, 나는 일단 내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고 싶다.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면, 그때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는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조금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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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2-28 12:2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인생을 한 바퀴 돌아도 아니 70, 80살이 되어도 삶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아요.
여든이 넘은 친정어머니도 이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아마 죽는 순간에도 우리는 삶에 대해 잘 모른 채 눈을 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깨닫고 알아 갈 뿐... ^^
그래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별표 다섯개...) ㅋㅋ

라파엘 2021-12-28 17:56   좋아요 7 | URL
페크님 말씀대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배우는 마음으로 평생 살아가야겠지요. 다만 한해가 지날수록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한해를 더 살아보는 만큼, 그만큼씩 더 선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ㅎㅎ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해요~ ^^

scott 2021-12-28 12: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 코로나 시대에 이보다 더 절실하게 마스크 없는 세상 더 나은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었나 싶었을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기 인것 같습니다
라파엘님의 이 페이퍼 며칠동안 읽으면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

라파엘 2021-12-28 18:02   좋아요 4 | URL
한번 읽고 지나가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시 읽히는 글이 되다니,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평소에 스콧님 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

mini74 2021-12-28 18: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의 공부의 동기와 결과에 사랑 공감이 있길 바란다는 글, 참 좋아요. ㅠㅠ 저 또한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 라파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라파엘 2021-12-28 18:07   좋아요 4 | URL
미니님은 이미 삶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ㅎㅎ 종종 올려주시는 북튜브도 잘 보고 있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공쟝쟝 2021-12-31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학이 그 자원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무척 놀랍습니다. 앞으로 읽고 쓰며 공부하실 것들을 만약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제가 볼수 있다면, 매우 눈 반짝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태생이 무교로서, 그래서 더 신학을 읽는다는게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공부의 결과에 사랑이 닿는다면 좋겠지만 그 사랑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랑. 너무 오염된 말 같아서 이제 쓰기도 싫어진 그것. 사랑~ 찾아가보줘. 일단은 인생 한바퀴 돌 때까지의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더듬더듬 ^^

라파엘 2021-12-31 18:25   좋아요 2 | URL
신학도 인간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만든 제도로 오염되었고, 사랑도 인간이 잘못된 지점에 가져다 붙이면서 오염된 것 같습니다. 쟝님 말씀대로, 둘 다 본래 어떤 모습인지 알기 어려울 만큼 오염되고 오해되기 쉬운 상황인 듯 해요. 여러모로 모든 좋은 것들은 꼭 인간들이 손대서 망쳐놓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인간들 안에서 또 희망을 찾아야겠지요. 저도 결국 인간이니까요 ㅎㅎ 우리가 더듬더듬 잘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