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애초에 그 내면의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해보고자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경험에서 어떤 수단과 자원을 선택하고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러한 자원으로 문학을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경제학이나 정치학 또는 여성학 등이 그 자원이 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은 그 사람의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는 주로 철학과 교육학 그리고 신학을 문제해결의 자원으로 사용한다. 자기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언제가 되든지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설명하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선택하든지, 그 공부의 동기와 결과의 자리에 혐오와 배제 등 폭력성이 자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정답인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정답인 것은 아니며, 자기 삶의 올바른 해석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가고 만들어내는 삶의 해석만을 정답으로 여긴다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삶의 해석을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내가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그러한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라면, 내 공부의 동기와 결과에는 단지 사랑이 자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가 살아간 이후에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성실하게 공부하고자 하지만, 나는 배우는 것이 너무나 더딘 사람이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사춘기를 겪어내고,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인생을 잘 모르고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경험해야,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겪어내야, 얼마나 오래 살아봐야 삶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을 다 살아내고 나면 그때는 조금이라도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환갑, 그것이 인생을 한 바퀴 돌았다는 의미라면, 나는 일단 내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고 싶다.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면, 그때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는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조금은 그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