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이처럼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던 이해 구조와 서술 구조 자체에 대해 추궁한다. 나아가 이처럼 추궁하는 철학적 작업 자체에 대해서도 추궁한다. 이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면서 그 말 자체의 타당성과 근거를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메타 레벨의 물음이다. 철학이 ‘지혜의 지혜‘라고 불리는 까닭이고, 학문의 가능성 자체에서부터 다시 논해 학문의 토대를 마련하는 ‘기초학‘이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 P14
서구에서는 언어가 교양과 사교와 정치의 기초, 즉 사회생활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작업이 ‘신권‘과 ‘왕권‘을 대신해 ‘인간의 이성‘을 시민의 무기로 만들면서 근대라는 시대를 뒷받침해왔다. 철학이 중등교육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그 증거이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한 기초적 능력으로서 ‘철학하는 것‘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 P22
철학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시대의 어려움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하는 지적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적 문제야말로 철학적 양상을 띠게 되어 있다. - P25
철학은 자신에게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를 묻는 것, 같은 것이지만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음미하고 반추하는 작업이다. 철학의 시작점에 있는 작업이 ‘반성‘이라면 이는 철학이란 방법 자체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 P47
그런 시야를 개념으로 열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서 한찬 떨어진 외부에 빛을 발하는 물체를 두고 세계를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고 속에 안주하고 있으면 그런 보조선은 그릴 수 없다.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 최고의 것뿐이다. 사람은 ‘우리‘의 외륜산 너머의 또 그 외부에 시점을 두고, 소위 더 유치한 꿈을 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서 서구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 자신의 시선과 ‘밖‘의 시선을 연결하는 것, ‘밖‘을 자신의 중핵을 이루는 부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기 사고의 근간까지 통째로 변환시키기 위해 시도했다. (...) 지금까지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던 이러한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의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일에 몰두했다. - P99
철학자는 다름 아닌 철학의 외부를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제일 먼저 철학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물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바깥‘이란 대학의 외부나 철학연구자 집단의 외부라는 의미가 아니다. 철학은 늘 ‘메타‘ 차원을 포함한다. 무언가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 자체에 대한 물음을 자기언급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비판은 자기비판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음미가 철학에서는 이론학이고 인식론이고 언어 분석이다. - P111
철학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철학은 가장 실제적인 것, 즉 실천적인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철학은 실천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가 의심의 여지 없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들 것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사고 성과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천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실천이라는 말과 개념이 본래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 분야는 제1차적으로는 ‘이론‘과의 대립에 의해, 또 ‘이론‘의 응용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겠다. - P121
근대 과학의 탄생과 함께 ‘보기‘와 기술이 연계되면서 ‘보기‘는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움직이고 조작하며 보게 됐지만, 관측을 어떤 장치로 행하는지는 제쳐 두고, 이것도 ‘보기‘가 목적인 이상 관상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술의 목적은 ‘보기‘가 아니라 ‘만들기‘에 있다. ‘발견‘도 무언가 새로운 존재를 ‘시야에 받아들여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는 기술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러면 ‘앎‘을 매개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은 ‘보기‘와 ‘만들기‘의 중간에 존재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것, 즉 앞에서 말한 제3의 기술인 ‘사용‘의 기술로서 존재하는 셈이 된다. - P133
살아가는 데는 논리적인 확실함과 정밀함과는 또 다른 확실함과 정밀함이 때때로 필요하다. 논증되지 않은 것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판단 전체에 걸쳐서 ‘철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생활과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관련되어왔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 P140
보편이란 다른 것과 조우하는 우연이 우리의 경험에 갑자기 어떤 미지의 사이클을 열고 그것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변용해가는 부단한 ‘엇갈림‘의 운동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156
진리의 법정에 관해 예로부터 메타 레벨에서 계속 논의되어온 철학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독백일 수 없게 됐다. 철학적인 반성의 장 자체가 ‘초월론적‘인 주관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사회적인 자장이라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반성 자체가 ‘간주관적‘인 장이라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대화나 커뮤니케이션이 생성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59
(...) 서로 이질적인 복수의 지혜를 연결하는 기능이 철학에 요구되고 있다.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사회와 시대를 상공에서 조망하는 고답적인 ‘교양‘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사람의 삶에 진실로 중요한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현실에 다양한 지혜를 배치하고 개선하고 통합해가는 기술로서의 철학이다. - P172
박사 학위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한정된 어떤 전문 분야에서 정교하고 치밀한 연구를 완수한 것에 대해 수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가설을 일정한 과학 연구 방법에 준하여 추론하고 실증함으로써 이후 어떠한 주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정교하고 치밀한 추론과 실증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기량에 대한 인정으로서 수여되는 것이다. - P177
철학에 전문 영역이 없는 것은 철학이 항상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으로, 상호 분단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과학의 지혜를 ‘객관성‘이나 ‘보편성‘과 같은 추상적인 통일 이념으로 간신히 통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진정한 의미로 협동시키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란 그런 의미에서 지혜의 다양한 시점 사이의 대화 내지 조정이기도 하다. - P180
우리는 하나의 시점 혹은 하나의 원리로는 현실의 총체를 다 볼 수 없다. 이때 ‘모든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혜의 전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일 것이다. - P185
교육학의 ‘임상‘이란 당연히 사회의 교육 현장이다. 하지만 학교로 조사하러 가서 교육학 이론에 따라 교육 현장을 평가하는 것이 교육학의 ‘임상‘인 것은 아니다.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 그 현장을 구성하고 있는 제도 및 담론이 종래의 교육학 담론 및 이론과 어떠한 공범 관계 속에서 구축되어왔는가라는 공범성을 분석하여, 현장의 문제 해결이 그대로 교육학 자체의 지각 변동으로 이어지는 활동이야말로 ‘임상 교육학‘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94
철학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현지 조사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데카르트도, 로크도, 칸트도, 헤겔도, 벤담도, 마르크스도, 각자 시대의 사상적 과제에 도전했다. 철학이 스스로 사고 구조의 역사적 맥락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음미하는 것도, 철학이 그때그때 시대 상황 속에서 일단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P196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장소를 철학 내부에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다. 타인이 말하는 그 장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그 장소에서 그 장소를 파고들어 스스로의 장소로 삼고 거기에서부터 말하고자 시도할 필요가 있다. - P199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 주류의 니즈에 휘둘리지 않고, 또 그것에 무턱대고 부응하지도 않으며, 니즈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정으로 중요한 니즈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계기는 의외로 우리 일상의 주변에 있기도 한다. - P235
철학은 글의 양식과 글의 살결에 더 신경 써야 한다. 우선은 문체에. 어떤 문체를 사고의 신경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보이게 되는 세계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에는 거의 장인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표현 스타일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위상이 있다. 이러한 스타일 의식이 사라지면 언어는 늘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정밀한 기술 언어를 사용하면 대개 서술의 흐름에 틈이 생긴다. 동업자에게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P249
대화는 타인과 같은 생각이나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더욱 세밀하게 알게 되는 것이 대화이다. ‘서로 이해할 수 없다‘, ‘내 뜻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당혹과 고통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람은 보다 폭넓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대화 과정에서 다신의 사고도 단련되게 된다. 깊이깊이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말한 타인의 다른 사고와 생각에 귀 기울일 때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게 되기 때문이다. - P268
철학이 만약 스킬로서 이용되는 것이라면 이는 무언가 철학 이론과 그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어떤 복잡한 문제라도 온갖 각도에서 조망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을 해제하고 거기에서 문제를 보다 적절한 형태로 재조직하고 나아가 해결에 이르는 전망을 더듬는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P286
현실 문제 대부분은 중요한 문제일수록 답이 즉시 나오지 않으며, 답이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정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보조선이 보여서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따라서 서둘러 의사적인 답으로 결론짓지 않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라며 집요하게 논리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호흡 상태로 잠수를 계속할 수 있는 사고의 체력이 필요하다. 복잡성의 증대를 참고 견디면서 불확실한 상태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지적 체력이 필요하다. - P303
철학이 우리 세계 이해의 균열과 틈새에 손을 찔러 넣어 그것을 뒤집지는 못할지라도 그 상태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그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기에 가장 불리한 곳에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 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됐지?‘하고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다시금 삶의 중심축이 될 수 있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할 때 그런 형태로 일상의 한복판에서 문득 점프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 옆에서 ‘반주‘하는 것이다. - P309
철학 논의에는 상호 촉발이 있을 뿐 선생도 학생도 없다. 철학은 교실이 아니라 시민들의 ‘광장‘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철학 논의가 만일 시민의 합의를 목표로 한다면 그 활동은 간접적이나마 사회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대화가 추구하는 것은 합의가 아니다. 합의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소재를 찾고 물음을 변경해가는 과정 자체를 공유하는 것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공공적 사용이라고 말했던 것 또한 특정 직무나 사회적 입장에서 벗어나 한 명의 시민이자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대등한 입장에서‘ 문제에 임하는 것이다. - P314
바로 그럴 때 비로소 과거 철학자들의 방대한 텍스트가 연구자의 어두침침한 서고가 아닌, 시민의 무기 창고로서 환생한다. 철학자들의 한계까지 논의를 거듭한 사고의 궤적, 철학사 연구는 그러한 궤적을 ‘계보‘처럼 그려내려고 해왔다. 하지만 ‘계보‘란 사상의 계열이란 형태로의 배치이다. 그리고 배치는 그 이름 그대로 별자리이고, 따라서 어떤 모양으로든 그릴 수 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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