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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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다 보면 읽고 있는 책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내 경우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삘도 받지 못했을 때 칼같이 손절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외인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다. 소개팅에 나온 저 시시껄렁한 상대한테서 알 수 없는 태평함과 여유로움이 막 느껴진단 말이지. 어쩐지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좀 아쉬워. 그래서 모른척하고 기회를 줘봤더니 과연 내 직감에 딱 적중했지 뭐겠어. 이런 식으로 리스트업 해둔 작가 중 하나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앞전에 읽은 <한 달 후, 일 년 후>가 라이트한 일본 문학에 가까워서 적잖이 실망했더랬다. 헌데 요상하게 문장 곳곳에 뼈가 있어가지고 이건 또 뭐냐 싶어서 한 권 더 읽어봤더니 결과는 대만족쓰. 이번 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였어.


<한 달 후, 일 년 후>의 재탕이라 해도 될 만큼 설정이 똑같았다. 사교모임을 즐기는 남녀들의 뺏고 뺏기는 사랑 이야기.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면 별 다섯 개는 거뜬히 주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재탕이어서 별 하나 뺐다. 이번에도 비슷한 류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중 나이차가 있는 연상의 애인을 둔 남녀가 사교모임에서 눈이 맞는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인의 공식 애인인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하여 숨 막히는 비밀 연애를 병행하다 결국 커플이 되어 사교계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못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삐걱대기 시작한다. 부자 애인에게 빨대 꽂았던 생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한 달 후, 일 년 후>와 똑같다면서 왜 높은 점수를 줬냐면, 이 책에는 풀이 과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앞전에 읽었던 건 온통 문제하고 답밖에 없었으니까. 프레임이 자꾸만 끊어지던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한 가지 더. 이번에는 딱 주인공 두 사람끼리만 스파크가 일어난다. 곁가지가 좀 있긴 한데 거의 둘만의 내용이라서 전개도 깔끔하고 주제도 명확했다. 비교는 이쯤 해두고, 작품을 논하기 전에 문란한 캐릭터를 즐겨 쓰는 저자의 정신세계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술-담배-약물 중독은 기본이요, 스포츠카 사고에 요트 사고, 카지노 죽순이에 도박으로 재산 탕진 등등, 급이 다른 저자의 비행 앞에 전 국민이 떠들썩했더랬다. 사강은 제 기분을 표출함에 있어 몸 사리질 않았으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굉장히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허황된 환상보다 날것의 고독을 쫓았다는 걸로도 유명하다. 여하튼 그 불안한 사상과 자유가 도덕적 관념을 깨뜨리는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쉬쉬해오던 사회적 금기사항들을 대중화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렇듯 사강이 꺼림직한 문장을 쓰고도 살아남은 건, 독자들의 은밀한 욕망을 어루만져 준 문화충격 반항아였기 때문이지 싶다. 단짠단짠의 아이콘이랄까.


사강의 캐릭터들은 꼭 하루살이 같다. 내일은 생각지 않고 오늘만을 살아간다. 주인공 두 남녀는 자신들의 썸씽이 사교계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를 알았으면서도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다. 갈수록 양심은 희석되고, 서로를 탐하고 소유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두 사람. 그래 그렇지, 남이 끓인 라면은 무조건 맛있는 법이거든. 정작 주변인들은 이들의 불장난을 눈치채고도 그저 방관한다. 자신들의 평판이 바닥난 것을 정녕 모르는 건지, 아님 모른 체 하는 건지. 아무튼 본격적인 서민생활과 함께 멘탈이 털린 이들의 코믹 쇼가 펼쳐진다. 돈에는 욕심 없는 남주와, 돈에만 관심 있는 여주는 몇 번의 시행착오로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겨우 알게 된다. 여주의 속물근성을 보고도 반했던 남주는 이제 와서 일 안 하고 돈만 밝히는 그녀에게 실망한다. 그리고 고생길 훤한대도 가난한 남주를 택했던 여주는 뻔뻔하게 전 애인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다. 그걸 또 받아주는 전 애인도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던 사강 언니, 대체 어떤 삶을 사셨던 검까...


그렇게 여주는 전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별 후에야 비로소 자신한테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단조로운 일상 말고 속물대로 살 때라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본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거짓된 삶을 연기하다 튕겨져 나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저자도 이런 생각으로 자기 파괴적인 마인드를 고집했으리라. 사강을 보고 있으면 1급수에서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느껴진다. 근데 또 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가 더 맛있긴 하거든. 그 맛을 잘 아니까 독자들이 계속 사강을 읽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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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오오.. 여기요, 150원.

물감 2023-05-29 10:39   좋아요 0 | URL
으잉? 다락방님 사강 책 다 읽으신 줄ㅋㅋㅋ 이책 강추합니다. 재밌어요😎

다락방 2023-05-29 11:02   좋아요 1 | URL
아뇨 저는 한두권 읽고 저 쪽에 밀어둔 작가입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9 11:15   좋아요 1 | URL
저는 아니 에르노보다 사강에게 한 표 던집니다 ㅋㅋㅋ
(이래놓고 또 실망하면 안되는 데....)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1 | URL
사강은 알라딘 책덕후분들 사이에서 꾸준히 다시 듣게 되는 존함입니다만
아직 저는 이름 들어본 작가의 영역으로만 남기고 있어 죄송하네요

에스프레소 강도라니!^^ 물감님의 평을, 혹 이 책 올해 안에 읽게 된다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물감 2023-05-29 18:03   좋아요 1 | URL
왜 저는 사강 보다 에르노를 더 많이 본 것 같죠? 상 타서 그런건가ㅋㅋㅋ 여튼 적당히 자극적이고 좋습니당.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3-05-29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천원 이었나요? 😑 그래도 별 넷이라니 다행입니다~!!
전 아니에르노 보다 사강입니다~!!

물감 2023-05-29 16: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삼세번의 기회를 주는 작가가 있고 곧바로 손절하는 작가가 있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사강은 재밌는 작가였어요! 여기도 후에 전작을 읽어볼까 해요 ㅋㅋ
새파랑 님도 아니 여사 보다 사강 언니파!!!!!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2 | URL
글쵸! 사강하면 새파랑님 자동 떠오릅니다요!

물감 2023-05-29 18:00   좋아요 2 | URL
오 새파랑 님이 그정도였나요? 저한테도 연상되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네요ㅎㅎㅎ

새파랑 2023-05-29 18:10   좋아요 1 | URL
앗 ㅋ제가 사강 책을 많이 읽기는 하긴 했는데 그정도는 아닌거 같습니다 ㅡㅡ

coolcat329 2023-05-2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에게 사강이 이런 작가였군요. 모든 리뷰가 재미나지만 이번 글 참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읽었네요.
사강 책은 브람스...만 읽어봤는데 저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책은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물감 2023-05-29 16:41   좋아요 2 | URL
전 절대 나쁜 여자 취향이 아닌데 이상하게 끌리는 거 있죠?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ㅋㅋㅋ 저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인생에 굴곡이 좀 있고 그래야 보는 맛이 있으니깐요. 이 책 강추합니다ㅋㅋ

잠자냥 2023-05-29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은 읽다보면 질려서(도돌이표 같은 ㅋㅋ) 이제 그만 읽자, 하고 녹생광선에서 나온 책 중 유일하게 안 읽은 게 이 작품인데(심지어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렸다가 2번 다 그냥 반납) 이 작품까지는 언젠가 읽어야겠군요….

물감 2023-05-29 23:40   좋아요 1 | URL
앗 도돌이표라! 그렇담 연달아 읽는 건 피해야겠네요ㅋㅋㅋ여튼 즐건 독서였습니다😀😀😀

잠자냥 2023-06-08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달의 당선작까지 되었어!

물감 2023-06-08 12:39   좋아요 1 | URL
따란! °_°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