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양식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5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것으로 시리즈 전 권을 다 읽었다. 이 작품이 제일 두꺼워서 마지막에 읽은 건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성 심리가 기반인 요 시리즈는 주인공이 전부 여자였는데 이 책만 유일하게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것도 의아했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주제가 영 선명치 않아서 애 좀 먹었다. 여튼 주인공과 함께 여러 남녀의 서사도 담겨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미쳤고요.


절친 삼인조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음악을 극혐하던 버넌은 억지로 갔던 음악회를 계기로 각성하여 작곡가의 길을 간다. 남사친은 비상한 감각으로 잘나가는 사업가가 된다. 예술인의 고독을 동경하던 여사친은 조각가가 되려 한다. 목표도 성향도 제각각인 세 사람은 각자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우정을 다져나간다. ㅡ 긴 생략 ㅡ 버넌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자마자 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군에 입대한 버넌의 전사 소식이 들려와 모두를 좌절시킨다. 무엇보다 음악계의 샛별이 사라졌다는 게 쓰디쓴 아픔이었다. 그 이슈가 잠잠해질 때 즈음에 갑자기 뿅 하고 등장해버리는 버넌. 그런데 이 친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기억이 돌아온다 한들 쓰라린 현실의 연장일 터. 그럼에도 다시 천재 음악가로 복원시키는 게 맞는 걸까.


저마다 삶의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스위치가 있다. 여사친은 예술가들의 불행 속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곤 했다. 돈도 집안도 없지만 꿈에 대한 갈망이 꾸준한 친구였다. 반대로 부와 능력, 명성까지 다 갖춘 남사친은 자신의 힘이 사회에 보탬이 될 때에 기쁨을 느꼈다. 모든 게 완벽했으나 사랑만큼은 복이 없는 딱한 친구였다. 이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였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성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애정 과잉의 엄마였다. 엄마는 훌륭한 엄마 역할 놀이에 심취에 있었다. 버넌도 그걸 알고서 내적 손절했으나 겉으론 무난하게 지내는 편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신경 쓰기 싫은 일들을 무시해오다 보니 사회성마저 결여되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행동까지 따라 하게 된 버넌이었다.


가뜩이나 사회성 부족한 애가 작곡에 빠져서 더더욱 마이웨이가 된다. 낌새를 느낀 친구들은, 버넌이 늦게라도 기쁨을 찾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응원만 했다. 얼마 안 되어 옛 친구를 만나 적극 구애 활동에 들어간 버넌은, 사랑만 있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거라는 일방적인 신념을 밀어붙인다. 반면 애인은 버넌이 가난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여자의 마음에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속을 앓는다. 여기서 주변인들의 생각도 반으로 나뉜다. 사랑과 이상만을 고집하는 버넌의 이기심과, 풍요로운 삶을 소망하는 애인의 속물근성. 누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버넌의 방식은 그토록 꺼려 했던 엄마한테 물려받은 인생의 양식이었다. 혐오하던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버넌은 성향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삶의 원동력인 셈이었다. 겨우 세상을 살아갈 목적이 생겼으나 동시에 꺼져가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치 뜨거운 물을 못 느끼고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버넌의 시련은 계속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버넌 부부. 그리고 전쟁에서 사망한 버넌 소식을 듣고 재혼한 아내. 근데 하필 연상의 부자와 재혼하여 질타를 받게 된다.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체 가난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다 나타난 버넌한테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무방비 상태의 기분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윽고 버넌의 기억이 깨어나 재회하고, 그녀는 다시 버넌에게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난 이 장면에서 욕이 잔뜩 나오더랬다. 그렇게 인격을 되찾은 버넌은 옛 천재성을 잃어버려 좌절했지만 기억을 잃은 동안 행복을 만끽했던 것과, 기억을 잃기 전의 고통스럽던 삶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기쁨을 조율해나간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다 잘 됐구나 싶을 때쯤 관자놀이에 하이킥을 꽂는 애거사 크리스티. 하, 정말 이러기 있습니까요.


보다시피 작중 인물들은 삶을 지탱하는 열정의 재료가 전부 다르다. 그 재료물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걸 수도 있고, 남들에게 눈총과 비난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이란 내가 나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을 사랑해야 유지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건 여러 리뷰에 적었던 말이기도 하다. 내 생각과 일치하고 공명하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 이것이 지금 내 인생의 양식이 아닐까 싶다. 먹고 자고 독서 밖에 안 하는데도 질리지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행복이 별거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하고 친하게 지내시면 다 됩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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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0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분명 읽은 것 같은데 이 리뷰 읽는데 완전 너무 새로워서 지금 제 독서앱을 켜봤거든요? 2015년에 읽었다고 되어 있네요. 허허 그것참.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모르겠죠? 도대체 뭣하러 독서를 하는건지 원.
저도 애거서 크리스티 이 시리즈 좋아했어요. 읽는 족족 팔아버렸는데 이건 모았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책들 모아두면 예쁘더라고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읽을 때도 느낀거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란 사람은 한 명이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을텐데 어떻게 책마다 개성있는 인물들의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를 썼을까 신기하고 존경스럽더라고요. 이 책은 재독 찜입니다. 슝~

물감 2023-06-05 11:08   좋아요 0 | URL
ㅋㅋㅋ다락방 님의 글들을 분석해보면요, 읽다가 딱 꽂히는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타입이시더라고요. 특정 부분에 대한 개인의 감상을 위주로 기록하셔서 기억이 안남는 게 아닐까요 ㅋㅋㅋㅋ 이건 N과 S의 독서방식 차이일 거에요.

이 시리즈 정말 좋죠! 작가가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싶어요. 인생 몇회차인가 궁금하고요 ㅋㅋㅋㅋ다락방 님의 재독과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