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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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유정의 팬이다. 근데 나의 팬심은 작가가 아닌 작품으로만 향한다. 그래서인가 신간이 나와도 막 설레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의 책도 마찬가지이고. 여튼 미루고 미루던 <완전한 행복>을 드디어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정유정의 전작 중에서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되었다. 2019년에 있었던 고유정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는데, 그 사건이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몰입감과 흡인력을 보여준다. 이 좋은 걸 대체 왜 미뤄왔나 했더니 읽고픈 마음이 1도 안 드는 저 구닥다리 표지 때문이었다. 진짜 은행나무 책들은 하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뿐이다. 출판사는 드럽게 못 만드는 디자이너들을 싹 다 교체해야 된다. 책이 예쁘단 이유만으로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집안 사정으로 떨어져 살게 된 두 자매가 있었다. 시골에서 2년간 조부모에게 길러진 동생은 어찌나 칼을 갈았던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 집착했고, 언니한테는 증오로써 광기를 표출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동생에게 쩔쩔매며 세월이 흐른 뒤, 동생과 만났던 남자들이 전부 변을 당하는 기묘한 역사가 반복된다. 그러다 동생의 전 남편이 실종되었고, 현 남편은 실종자와 아내가 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아내가 두려워 뒷조사해 봤더니 섬뜩한 미스터리가 대거 쏟아졌다. 아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자신은 왜 그녀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일까. 거미줄에 걸린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공포에 잡아먹힐 수밖에.


늘 그렇듯 이번 작품도 요약이 쉽지가 않다. 그리고 여전히 독자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는데 이젠 뭐랄까, 이 분의 작품은 그냥 냅다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지만 기존의 캐릭터들과 달리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광기라는 점이다. 내가 아는 나르시시스트란 완벽한 자신을 황홀해하는 신종 변태 정도였는데, 모든 사이코패스는 나르시시스트라는 작가의 말에 보는 눈이 좀 바뀌었다. 동생 신유나는 미적 요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행복한 감정을 사수하는 일에만 집착한다. 그녀가 말하는 행복이란 불안요소를 전부 제거하여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행과 싸워나가는 삶이 아니라 아예 불행 자체가 없는 완전한 삶이어야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행복의 공식은 뺄셈일 수밖에 없다고.


동생의 광기는 어릴 때 부모와 헤어지고부터 생긴 듯 하나, 느낌상 그전부터 있었던 기질로 생각된다. 어린아이한테 잘 없는 거친 언행과 사고방식이 갑자기 생겨난 느낌은 아니었기에. 동생은 시골집을 방문한 언니를 죽일 기세로 위협했다. 자신이 가져야 할 전부를 언니가 훔쳐 갔다면서. 사정상 저렇게 발악하는 것도 이해한다만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발악이 계속된다는 게 문제였다. 부모는 미안해서라도 동생한테 다 맞춰주었고, 억울하게 죄인 취급받은 언니도 찍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동생에게 밀려 케어 받지 못한 언니는 훗날 독립하여 가족과의 연을 끊다시피 한다. 이런 걸 보면 괴물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내 안의 증오와 복수심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누가 알랴.


신유나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 그래서 이혼했음에도 전 남편을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으며,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또한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 한번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그녀의 행복을 완성시키기 위한 재료이자 밑거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끔 유도하는 말들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그녀는 화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녀와 관계를 정리하려는, 즉 자신을 버렸다고 믿게 한 이들에게는 사고를 가장한 죽음으로 되갚아주었다. 또한 저항하는 소유물에게, 행복을 위한 내 노력들을 왜 알아주지 않느냐고 따져댔다. 이 완벽한 뺄셈 공식을 납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처분 대상이었다. 도자기를 깨부수는 도예가처럼 말이다. 행복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 행동이라니.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려나.


흡사 좀비물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판은 갈수록 커지는 데 뭘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감도 안 오고. 발작 버튼이 눌린 동생은 주변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기세였다. 심지어 딸아이의 폭행도 현 남편이 겨우 막았으니까.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더니 남편과 언니까지 불구로 만들고 감금한다. 이대로면 곧 죽을 텐데 하필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시골집이어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이 상황을 뒤집는 방법은 신유나의 가스라이팅을 깨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정신 지배에서 벗어남으로 겨우 죽음을 비껴간 피해자들. 정말 숨 참아가면서 읽었다. 역시 스릴러소설은 더울 때 읽어야 한다.


동생은 가족과 떨어졌던 그 시기에 성장이 멈춘 듯했다.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굴복시키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한 동생. 누구라도 설설 기게 만드는 그 방식은 자신의 인생론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줬을 터. 헌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를 그저 내버려 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어째서 부모는 의료시설에 기대볼 생각조차 안 했을까. 아무리 교활하고 영악하대도 그렇지,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발악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무조건 오냐오냐하는 것도 하나의 아동 학대란 사실을 모르는 부모가 정말 많다. 아무튼 동생이 사이코패스가 된 데에는 절반 이상이 부모 책임이었다. <종의 기원>의 사이코패스는 날 때부터 포식자의 DNA를 지녔다지만 이 작품에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케이스인데, 그것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저자가 끊임없이 파고드는 인간의 악에 나 역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도 악을 연구한 작품들을 쭉쭉 뽑아내주시길 바란다. 아 그리고 은행나무 디자이너는 진짜 반성 좀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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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23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 별다섯이니 읽어보고 싶네요~!!
표지가 좀 그렇긴 한거 같습니다 ㅋ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포장도 중요한거 같아요 ^^

물감 2023-05-23 15:2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표지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편인데 여기 출판사는 좀 심하더라고요. 그래도 정유정은 대형 작가인데 이렇게나 무성의한 표지라니. 보니까 이 책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책이 다 그렇더라고요. 당연히 내용물이 더 중요하지만 화가 나네요 ㅋㅋㅋㅋㅋ
정유정 작품은 늘 호불호가 있습니다만 전 대만족하며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자극적인 독서라 좋았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