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를 리뷰해주세요
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 - 사는 재미를 잃어버린 아저씨들의 문화 대반란
이현.홍은미 지음 / 글담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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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에 나오는 광고 중에서 보다보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광고가 하나 있다. 내용은  아이가 학교에서 여행 아니면 소풍을 가는 것 같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마중 나와 잘 가라고 한 뒤 아이가 떠나자 ‘와우~~’하면서 소리친다. 아이가 집에 없으니 신경 쓸 게 없어 좋다는 뜻 같다. 근데 조금 있으니 똑같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아내마저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잘 가라고 말하지만, 물론 표정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돌아서는 순간 ‘오레~~~’하면서 소리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나 같아도 그런 상황이라면 ‘오레~~’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집에 들어갈 때 맥주 몇 병 사고, 족발이라도 하나 산 다음 혼자 비디오 틀어놓고 신나게 먹지 않겠는가. 눈치 볼 사람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남자나이 4050쯤 되면 짧으면 십년, 길면 이십 년 정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에, 또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실제 했건 안했건 상관없이, 항상 뭔가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 맨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가족 없이 혼자 지낸다는 건 해방과도 같은 마음 아니겠는가.

나이 40이면 예전 같으면 서서히 한 인생의 끝자락에 설 나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60수명에서 40의 나이라면, 80수명에서 40이면 예전의 30대 초반 나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바라보는 눈과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젊은이들을 눈에는 나이든 사람 같지만 정신과 육체도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그건 요즘 얘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겉모습만 나이가 들어 보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조금.

그러다보니 요즘 시니어라는 단어가 갑자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도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것 같다. 시니어는 대개 4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정도의 사람을 말하는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자식도 독립하여 곁을 떠난 나이이기에 혼자의 삶, 정상적이라면 부부 두 사람만의 삶을 꾸려가야 할 나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 더 강한 욕망은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오래 전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거나 바빠서 하기 못했던 일들을 다시 끄집어내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일은 취미삼아, 어떤 일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기에, 또 어떤 일을 부업으로 삼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이런 시니어들의 삶을 재미있게 정리했다. 저자들이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가능하면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독자로 하여금 현실처럼 느낄 수 있게 썼다. 밴드를 다시 시작한 사람,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여행하는 사람, 섹스폰 하나 매고 거기서 자신만의 삶을 찾고자 하는 사람, 블로그에 미쳐 골프보다 블로그가 더 좋다고 소리치는 사람, 스쿠버 다이버로 다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 등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생각지 못한 중년들의 중후한, 요즘엔 이런 것을 댄디 스타일이라고 하던가?, 멋을 살릴 수 있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정리해 놨다. 특히 브런치 이야기는 내일이라도 당장 전문음식점을 찾아가 여유 팍팍 부리며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나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이기에 마치 내 이야기를 보듯이 재미있게 봤다. 특히 블로그를 예찬하는 한 분의 이야기는 나보다 더 고수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일주일에 포스트 하나 쓰기도 버거운 나인데 그는 매일 한 장은 써야 블로그가 유지된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쨌든 이 책을 통해서 나와 비슷한 동년배들의 멋진 삶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순간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나이 4050이면 예전의 30대 중반이거늘 뭔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살아가는 4050대의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또 이들은 지금과 같은 삶을 얼마나 더 오래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이유는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 대부분이,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안정된 직업과 일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050. 분명히 예전과는 달리 풍요로움과 멋을 아는 세대이다. 부모세대를 답답하게 바라보며 좀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나를 포함해서, 아는 멋은 스스로 찾아낸 멋이기보다는 사회가 제공한 멋들이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지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몰라도. 이들이 아는 것은 산업선진화, 고도성장시대에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보상받는다는 것, 풍요로움과 화려함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상황에서 살아온 우리나라의 4050들에게 이 책에 나온 것과 같은 서유럽의 휴양지에서나 생길 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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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0, 인생이 달라지는 선택의 법칙
수지 웰치 지음, 배유정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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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쉽게 결정할 순 없을까? 이 책의 첫 장 제목이다. 요즘은 하도 여러 가지를, 그것도 동시에 결정해야 하다 보니 이 제목만큼 가슴에 와 닿은 것도 없다. 하다못해 식당에 가서 샐러드 종류까지 선택을 해야 하고, 아이 간식거리 하나 사려고해도 매운 맛과 달콤한 맛 중에서 골라야 하는 상황 아닌가. 게다가 일은 또 왜 그리 한꺼번에 밀리는지, 이 사람에게 일 하나 부탁받으면 금방 또 다른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일 이야기가 들어온다.

저자는 이런 상황의 원인을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빨리 돌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옛날, 해 뜨는 것을 보고 논으로 나가 자연이 시키는 대로 김매고 거름 주던 시절과는 너무나 판이한 상황이라 뭐 하나를 결정하려해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출장이야기를 한다. 돈 몇 푼 벌겠다고 하와이 강의를 갔는데 그때 자신도 모르게,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워킹 맘의 능력을 믿고 아이 둘을 함께 데려갔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강의시간은 얼마 안 되기에 그것만 후딱 해치우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들과 즐겁게 놀면 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자신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비행기에서 아이가 멀미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결국 저자는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고 만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민하던 중에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좀 더 쉽고 편하게 매사를 결정할 방법이 없을까에 대한 해답이었다. 이 책의 주제인 10-10-10은 이렇게 탄생했다. 

10-10-10. 10분 후의 삶, 10개월 후의 삶, 10년 후의 삶. 저자는 10-10-10을 이렇게 정의했지만 그녀의 의도는 기간을 이렇게 확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10는 지금 현재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간, 두 번째의 10는 조금 먼 미래의 시간이지만 지금의 결정이 분명하게 어떤 모습을 갖춰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간, 그리고 세 번째 10는 먼 미래이지만 현재의 결정이 여러 상황과 연결되어 미래의 내 모습에 분명히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로 잡으면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저자의 말처럼,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는 시간이 있다면 바로 먼 미래의 시간이고 이것이 우리를 순간에 집착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지금 공부가 하기 싫어 다른 일을 하겠다고 뛰쳐나가면 십 년 이후에 나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 회사에서 상관이 지시한 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다면 그 결과는? 아마도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앞에 놓인 일을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다른 것들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데, 만약 십 년 후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지금 당장의 기쁨을 포기해야 하는, 완전히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이상한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저자는 10-10-10의 의미는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먼 미래에도 분명히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데 이때 지금과 먼 미래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간의 10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과 조금 먼 미래, 아주 먼 미래의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야지만 적절한 판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나에게 와 닿은 이유는 이런 방식을 그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동안 많은 것을 결정할 때마다 이것도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면 비전과 미션을 정하는 방법,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달성계획을 작성하는 기법,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할 때 등 어디서든지 이와 유사한 방법을 활용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방식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동안 십년이란 기간을 목표로 놓고 계획을 세우거나 결정을 할 때마다 그 십년 후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라고 하니까 십 년이란 세월을 생각했지 그게 과연 나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사용했던 방식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그게 실제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는 것은 아는 것뿐이지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려면 지금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하나보다.

10-10-10. 책에 나온 내용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특히 스티븐 코비의 책을 보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된 내용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다면, 이 방식을 이미 안다고 짐작하고는 책을 덮지 말고 저자가 말하는 방식으로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 바란다. 지금, 조금 먼 미래, 아주 먼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을 짜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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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 - 뒷골목 아티스트들이 이끄는 뉴욕의 예술경제학
엘리자베스 커리드 지음, 최지아 옮김 / 쌤앤파커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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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하면 떠오르는 것은 브로드웨이와 끝없이 줄서있는 고층빌딩, 그리고 얼마 전에 비행기 충돌 때문에 무너진 무역센터다. 물론 횃불을 들고 있는 자연의 여신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것들은 내가 뉴욕에 갔을 때, 두 번 정도 간 것 같은데, 본 것들이고 또 며칠 안 있어 싫증난 것들이다. 그저 딱딱하고, 화려하고, 요상한 것들이 계획 없이 엉킨 도시라고 할까. 어쨌든 내 생각에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라는 기억뿐이었다. 일단 물가가 비싸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았고, 어디를 가든지 바쁜 사람들 행렬 속에서 한가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뉴욕이 잘 나가는 이유를 뉴욕에 사는 바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보고 할 일이 많아 돈 벌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곳으로 몰리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을 읽어보고는 내가 과거에 봤던 뉴욕은 겉으로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뉴욕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라고 할까. 항공사진 찍듯이 전체적인 모습을 위에서만 바라본 느낌이랄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 간의 관계, 뉴욕이라는 도시의 실체를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책에서 말하는 문화도시로서의 뉴욕을 상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잘 나가는 도시, 바쁜 도시, 증권거래의 중심지 정도의 지식만 갖고 뉴욕을 봤다. 문화, 예술 부분은 돈이 많은 도시이기에 그저 흥청거리는데 필요한 도구라는 생각만 갖고 있을 뿐이었고.

저자는 뉴욕이 왜 다른 도시에 비해 문화와 예술, 디자인의 중심지가 되었는지를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미있게 표현했다. 물론 책 내용은 인터뷰한 부분만 따옴표로 만들어 이를 연결시킨 것이 아니고, 그 동안 문화와 예술, 인간네트워크에 대한 다양한 논문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발견 물과 적절하게 연결시킨다. 그러다보니 책 내용 자체가 하나의 논문과 같은 짜임새를 보이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뉴욕이란 곳이 가진 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이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이유는 지역경제의 변화가 신속하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과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조업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뉴욕이 오랜 경기 침체 속에서도 남달리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시 전체가 자연스럽게 경제활동의 중심테마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변화의 유연성이 어떻게 해서 다른 지역과는 다른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느냐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뉴욕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전문성이라고 한다. 즉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는 비전문적인 노동집약적인 사업은 버티기가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전문 인력에 대한 배려와 이들을 유인하기 위해 지원구조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손쉽게 일할 수 있는 기본 도시구조, 배송 망, 도시청소, 정리시스템, 그리고 보조원, 웨이터와 같은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끄는 내용은 이곳의 산업화 기회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봤는데 특히 요즘 한창 떠들고 있는 지자체의 자립화 활동이다. 많은 지자체들이 나름대로 원대한 포부를 세워 이를 달성하겠다고 고심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즉 이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이 지역에서 소비해 낼 수 있는 구조인가 하는 문제다. 뉴욕은, 저자에 의하면, 문화와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이자 소비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성공은 바로 수익과 직결된다고 한다. 제 아무리 좋은 상품과 서비스라고 해도 이를 판매하기 어렵다면 누가 그것을 만들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뉴욕은 그 자체가 거대한 소비시장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관심을 끈 것은 뉴욕만의 인적네트워크다. 즉 이곳에는 문화를 창조하고, 기획하고 가공하고 생산, 배송하는 모든 것이 집결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길거리에서, 술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도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로 연결된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을 활용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내용은 바로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화의 이유이기도 한 부분이다.

따라서 뉴욕의 가치는 기본적인 인적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창의성의 교환이며, 이와 같은 결과가 또 다시 인적네트워크를 더욱 키워주는 선순환고리이고, 이것이 바로 뉴욕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이다. 이는 단순히 돈만으로는, 국가와 지자체의 계획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문화 사업에 관심 있다면, 그리고 혹시 지자체의 업무나 도시계획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뉴욕이란 특정 도시에 대한 이야기지만 문화사업의 핵심을 정확히 집어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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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리뷰해주세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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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종교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70~80%가 손을 드는 것을 보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종교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종교를 선택한 사람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뜻에 의해 종교인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쩔 수 없이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천주교 신자이지만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부모님 모두 천주교 신자이기에 태어나자마자 영세를 받은 경우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것과 종교의 교리를 믿는 것, 또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의 본질인 신비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의 예식으로, 또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또는 일 년에 한  두 번 교회, 성당, 절에 가는 사람과 죽음이후의 세계를 믿고 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아, 자신의 가치관과 달라, 친한 사람이 믿는 종교란 이유로 쉽게 종교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마치 운전자격증이나 영어테스트 성적표를 받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떤 종교이든지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비적인 요소로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정신, 영혼, 육체)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정의할 때, 그리고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가치를 설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준이자 종교로서 위치를 얻기 위한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종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내용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없는,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는 접할 수 없기에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무엇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고, 사고할 수 없는, 일상적으로 생길 수 없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종교의 핵심이 신비주의라면,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야만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종교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믿는 대로 이뤄진다는 교리를 알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말을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 천상과 지옥이 있다는 교리에 대해 문제 삼지는 않지만 그것은 단지 교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 이런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바라볼 때 생기는 관념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는 종교를 가진 것이지 미신을 믿는 게 아니라는 시각 말이다.

이 책에는 종교가 갖고 있는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 찾아보고 있다. 고대종교에서 가장 최근에, 물론 최근이라고 해봐야 일천년 정도 이전의 이야기지만, 생긴 기독교까지 그 안에 내재된 신비주의의 내용을 정리했다. 결론은 인간은 ‘정신과 영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의 모습이자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중재자이고, 이를 통해서만이 신비주의의 핵심인 무엇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종교가 이 내용을 담고 있고, 또한 동의하지만 시대에 따라, 종교 자체의 특성에 따라 어떤 종교는 영혼을 강조함으로써 현세와의 관계를 차단했고, 또 어떤 종교는 육체를 강조함으로써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반감시킨 것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기독교적인 사고를 갖고 책을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정신 아니 특정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의 행적과 표현이 담긴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리를 통해 신비주의가 완성되었다는 표현을 쓴다. 즉 정신과 육체를 인정하며, 동시에 이들을 연결시키는 영혼의 존재도 함께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밖에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나도 천주교, 넓은 의미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이지만 기독교 정신만이 모든 종교 중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닌 종교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종교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고, 그 과정 속에서 조직이란, 제도라는, 형식이라는 틀을 통해 신비주의의 순수성을 일정 부분 제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신비주의를 인정한다는 것, 인간은 영혼과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은 내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연결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일정의 자격증 같은 것은 하나 더 장만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필요에 의해 바꿀 수 있는.

역사책처럼 정리되어 있어 오랜 시간의 신비주의 변화상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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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09-08-0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많은 분량인데 벌서 읽으셨나 보네요. 전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개신교를 믿는 저도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책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시대에 종교의 신비주의가 비종교인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궁금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일열 2009-08-1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종교는 과학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니까 비종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들의 문제겠죠 ^^ 이건 가치의 문제니까요. 저는 비종교인들보다 도리어 종교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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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종교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70~80%가 손을 드는 것을 보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종교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종교를 선택한 사람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뜻에 의해 종교인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쩔 수 없이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천주교 신자이지만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부모님 모두 천주교 신자이기에 태어나자마자 영세를 받은 경우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것과 종교의 교리를 믿는 것, 또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의 본질인 신비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의 예식으로, 또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또는 일 년에 한  두 번 교회, 성당, 절에 가는 사람과 죽음이후의 세계를 믿고 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아, 자신의 가치관과 달라, 친한 사람이 믿는 종교란 이유로 쉽게 종교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마치 운전자격증이나 영어테스트 성적표를 받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떤 종교이든지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비적인 요소로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정신, 영혼, 육체)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정의할 때, 그리고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가치를 설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준이자 종교로서 위치를 얻기 위한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종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내용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없는,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는 접할 수 없기에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무엇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고, 사고할 수 없는, 일상적으로 생길 수 없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종교의 핵심이 신비주의라면,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야만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종교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믿는 대로 이뤄진다는 교리를 알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말을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 천상과 지옥이 있다는 교리에 대해 문제 삼지는 않지만 그것은 단지 교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 이런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바라볼 때 생기는 관념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는 종교를 가진 것이지 미신을 믿는 게 아니라는 시각 말이다.

이 책에는 종교가 갖고 있는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 찾아보고 있다. 고대종교에서 가장 최근에, 물론 최근이라고 해봐야 일천년 정도 이전의 이야기지만, 생긴 기독교까지 그 안에 내재된 신비주의의 내용을 정리했다. 결론은 인간은 ‘정신과 영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의 모습이자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중재자이고, 이를 통해서만이 신비주의의 핵심인 무엇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종교가 이 내용을 담고 있고, 또한 동의하지만 시대에 따라, 종교 자체의 특성에 따라 어떤 종교는 영혼을 강조함으로써 현세와의 관계를 차단했고, 또 어떤 종교는 육체를 강조함으로써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반감시킨 것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기독교적인 사고를 갖고 책을 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정신 아니 특정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의 행적과 표현이 담긴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리를 통해 신비주의가 완성되었다는 표현을 쓴다. 즉 정신과 육체를 인정하며, 동시에 이들을 연결시키는 영혼의 존재도 함께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밖에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나도 천주교, 넓은 의미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이지만 기독교 정신만이 모든 종교 중에서 최상의 가치를 지닌 종교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종교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고, 그 과정 속에서 조직이란, 제도라는, 형식이라는 틀을 통해 신비주의의 순수성을 일정 부분 제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신비주의를 인정한다는 것, 인간은 영혼과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은 내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연결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일정의 자격증 같은 것은 하나 더 장만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필요에 의해 바꿀 수 있는.

역사책처럼 정리되어 있어 오랜 시간의 신비주의 변화상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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